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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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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에겐 ‘클래스’가 있다

등록 2005-06-14 00:00 수정 2020-05-02 04:24

세계 일류선수들의 ‘절대적 고급감각’을 재현하는 축구 신동
한국 축구계에 결핍된 ‘생각하는 축구’를 추가시켜주다

▣ 한준희/ 문화방송 축구해설위원·사커라인 수석필진

유럽 챔피언스리그 50년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골들 중 하나를 터뜨렸던 인터밀란의 전설적 포워드 산드로 마촐라(이탈리아)는 “좋은 골게터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하며, 그것은 후천적으로 만들어지기보다는 선천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마촐라 본인이 언급했던 그 특별한 무언가란 ‘최적의 슈팅 타이밍을 아는 본능’ 그리고 ‘대담성’과 같은 심리적 덕목이었다. 설사 많은 기술적 덕목들이 부단한 노력에 의해 습득될 수 있다 하더라도, 감각적인 측면들까지 100% 후천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흑백TV 화면의 시대에 마촐라가 터뜨렸던 유명한 골 장면에서도 그 ‘타이밍의 본능’은 중요한 포인트였다.

한편, 믿을 수 없으리만치 절묘한 골을 ‘외관상 여유 있게’ 잡아내는 솜씨가 전매특허인 우리 시대의 전설 데니스 베르흐캄프(아스날·네덜란드)는 10여년 전, “나는 강한 슈팅을 때릴 것인지, 상대를 속이는 칩샷을 시도할 것인지를 1초가 채 안 되는 순간에 결정한다”고 말했다. 베르흐캄프가 말하는 ‘결정’이 논리적 두뇌 회전에 의한 것인지, 마촐라가 의미했던 바와 같은 선천적 본능의 귀결인지, 혹은 둘 다의 절묘한 조합에 의한 것인지를 알아내기란 매우 어렵다. 하지만 무엇에 더 많이 의존하든지 간에, 우리가 베르흐캄프를 ‘극도로 지능적인 축구 선수’로 일컫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수준이 있으면서 고급스럽다!

대한민국 축구와 축구팬들 역시 이러한 ‘본능’과 ‘지능’을 지닌 공격수의 출현을 목말라해왔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우리는 그러한 덕목의 냄새를 짙게 풍기는 새로운 유형의 신세대 축구 선수를 만나고 있다. 그가 바로 ‘박주영’이다.

박주영의 플레이에는 해외 축구 언론에 매우 빈번하게 등장하는 말인 ‘클래스’가 있다. 한마디로 ‘수준’이 있으면서 ‘고급스럽다’. 물론 이 ‘수준’과 ‘급’이라는 어휘들을 명확하게 정의 내리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지구촌 축구광들은 그 어휘의 특별한 정의를 제공받지 않고도 어떤 선수의 플레이들을 통해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베르흐캄프의 절묘한 볼 터치와 상대편을 우롱하는 듯한 칩샷, 공격 라인의 움직임을 한눈에 읽어내는 감각적 패스 등은 클래스의 좋은 예다. 또 베르흐캄프는 이러한 플레이를 축구 선수 커리어 내내 선보여왔다. 힘과 스피드, 운동량의 측면에서 현저히 저하된 노장 선수들이 여전히 이따금씩 자신의 장기들을 선보일 때, “(어떤 시기의 상태를 의미하는) ‘폼’(form)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class)는 영원하다”는 축구 격언이 정확하게 적용된다. 수준이 발현되는 빈도는 연령이 높아짐에 따라 줄어들었으되 그 수준는 어디로도 가지 않았다는 의미다. 몇해 전 배가 나온 디에고 마라도나(아르헨티나)가 자신을 위한 헌정 경기에 나섰을 때, 그 경기를 지켜본 축구광들은 마라도나의 패스에서 분명 최고수의 ‘클래스’를 느꼈을 법하다. 극단적인 경우로, 일흔살인 고령의 보비 찰턴(잉글랜드)은 근자의 자선경기에서 잠깐 동안 그것을 드러내기도 했다.

고도의 ‘집중력’이 놀랍지 않은가

박주영에겐 틀림없이 클래스로 일컬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클래스는 연령이 낮아도 드러난다. 그러한 이유로 ‘천재’니 ‘신동’이니 하는 말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플레이의 여러 대목들에서 박주영은 이미 ‘탈아시아적’ 선수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득점을 올리거나 창조해내기 위한 장면의 필수 조건인 부드러운 볼 터치, 수비수의 움직임을 읽고 자신의 진행 방향과 템포를 반사적으로 조절하는 센스, 대담한 결단력을 엿볼 수 있으나 결코 무리하지 않는 간결한 드리블, 적절한 슈팅 기회를 찾아내는 감각, 침착성과 집중력이 크게 돋보이는 슈팅, 효율적인 위치를 향해 침투하는 영리함, 일정 시간 볼 소유권을 지켜낼 수 있는 재간, 여기에 프리킥 같은 세트플레이를 담당할 수 있는 역량까지. 이 모든 부문들이 박주영의 ‘클래스’가 묻어나오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것들 중 일부는 바로 마졸라와 베르흐캄프가 언급한 내용의 핵심을 잘 반영하고 있다.

‘월드컵 4강 국가’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척박한 한국의 축구 환경에서, 박주영은 그 연령대의 선수로선 좀처럼 지니기 어려운 덕목들을 종합적으로 보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속해 있는 세대와 잘 어울리게도 대한민국에서는 꽤나 ‘새로운 유형’이다. 무엇보다(적어도 현재까지 그의 모습을 보건대) 박주영이 한국 축구의 몇 가지 고질적 난제들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그간 우리는 ‘체력’과 ‘역동성’을 강조해왔음에도 ‘섬세함’과 ‘효율성’이 여전히 떨어지는 문제점들을 지적해왔으며, 때로는 ‘수준급 발재간’을 지닌 경우에도 발재간과는 다른 의미의 ‘요령’이 결여돼 있음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또 ‘열심히 뛰는 것’에 더해 ‘생각하는 축구’를 할 필요성에 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이러한 지적이 후자의 덕목에 견줘 전자의 덕목이 소홀히 취급돼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지적의 진정한 의미는 한국 축구를 더 탁월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후자에 해당하는 덕목들의 추가가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이 대목에서 “축구에서의 이상적인 스피드는 육체적 스피드와 정신적 스피드가 결합될 때 나온다”는 이야기를 한번쯤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적어도 현재로선, 박주영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필수불가결한 결핍을 한국 축구에 추가해줄 수 있는 적절한 자원임이 틀림없다. 물론 우리는 또다시 ‘냄비’가 돼서는 안 된다. 하지만 냄비가 끓고 있다고 해서 ‘냄비 속에 있는 내용물’이 근본적으로 ‘거품’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냄비’와 ‘거품’은 별개일 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말하는 ‘내용물’에는 ‘클래스’가 있으며 ‘스타일’도 신선하다.

“왜 우리가 박주영에게 열광하고 있는가?”를 좀더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그의 플레이 스타일과 클래스의 문제도 있다. 현재까지 이 어린 선수가 우리 축구팬들이 갈망하는 ‘판타지’를 매우 성공적으로 충족시켜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실의 이면에는 그가 지닌 고도의 정신력이 중요한 구실을 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표팀의 2006 월드컵 본선 진출의 중대 고비였던 우즈베키스탄, 쿠웨이트와의 2연속 원정 경기를 포함해 소속 클럽에서의 국내 경기들까지를 막론하고 박주영 골의 상당 부분은 놀랍게도 경기의 초반부나 말미에 터져나온다. 이러한 사실은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는데, 첫째로 다득점이 쉽사리 이루어지기 어려운 종목인 축구에서 그의 득점이 승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공산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경기 초반의 선제골은 그의 팀이 전술적 이니셔티브를 쥐고 이후의 경기를 풀어갈 수 있는 중요한 밑거름을 제공하며, 막판의 득점은 승패를 결정짓는 열쇠가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드라마’인 축구에서 이것을 곧잘 해내는 박주영의 활약에 팬들이 감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어쩌면 그것은 축구에서의 ‘마술’이다. 두 번째의 의미는 이러한 득점 분포가 그 선수가 지닌 고도의 정신력, 특히 ‘집중력’으로 일컬을 법한 매우 중요한 덕목을 반영한다는 점이다. “시작 뒤 5분, 끝나기 전 5분을 조심하라”는 잘 알려진 축구의 격언은 일반적으로 경기 초반과 말미에 선수들이 집중력을 결여하기 쉬움을 의미하고, 그렇다면 이 시간대에 중요한 역할을 해내는 선수는 정반대의 의미에서 집중력과 경기 몰입도가 훌륭한 것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브라질에서 얻은 요령, 그리고 투지!

물론 어린 박주영의 정신력을 높이 살 만한 다른 이유도 있다. 그가 프로 무대 데뷔 시즌과 국가대표 데뷔 두 경기를 통해 선보인 전체적인 활약상이 바로 그것이다. 청소년 시절부터 큰 주목을 받았던 공격수들은 이전에도 존재했다. 하지만 박주영의 프로 데뷔 이후 지금까지의 활약은 이전 선배들의 데뷔 시즌 활약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앞선다. 외국인 선수들의 평균 수준과 향상된 현재의 K-리그가 절대 녹록한 무대가 아님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 박주영의 ‘몸싸움’ ‘물리적 능력’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뚜껑을 열어본 결과 의외로(?) 박주영은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브라질 축구 유학을 통해 체득한 요령과 더불어 투지 또한 살아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많은 국민들이 지켜본 바와 같이, 국가대표 데뷔전과 원정 경기, 그것도 절박한 상황에서 경기 막판에 급작스럽게 찾아온 한번의 기회를 정확한 슈팅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선수 커리어에 오래도록 기록될 그러한 종류의 ‘사고’를 치기 위해서는 집중력은 물론이고 대담성, 침착성 등 여러 가지 심리적 덕목들이 요구되게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박주영이 칭찬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다.

한국 축구에서 지극히 중요한 선수로 자리매김할 박주영이 언젠간 유럽에 진출해서 경기력과 경험을 한 차원 성숙시키고 국제적인 선수로 올라서기를 기원하는 마음은 모든 축구팬들에게 매한가지일 것이다. 박지성과 이영표가 최고의 클럽컵 대회에서 맹활약해서 자신들의 가치를 세계 축구계에 널리 알린 2005년이기에 그 기대감은 더욱더 크다. 물론 “박주영이 당장 유럽 리그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 정답은 박주영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정답을 만들어가야 하는 사람은 박주영 본인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유럽 무대에는 다양한 유형의 이적 사례들이 존재한다. 세계적 주목을 받았던 남미 출신의 신성들도 유럽 무대 초기 적응에 실패해서 몇 시즌을 겉돌며 고생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신성들은 이적 첫 시즌부터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 오랜 유럽 무대 경력을 가진 노련한 스타들도 리그나 클럽을 옮길 경우, 이적 이후의 성공이 100% 보장되지 않는다. 선수 본인의 노력 이외에도 클럽, 감독과의 궁합 등 여러 요소들이 개입할 수 있는 까닭이다.

유럽 리그에 불가능은 없다

하지만 박주영과 유럽리그의 궁합을 바라보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기본적인 시각은 다음과 같다. 박주영은 아시아권에서 물리적 투쟁에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유럽 무대에서는 일견 상위권에 포함되기 쉽지 않은 ‘물리적 측면’들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러한 어려움을 자신의 클래스와 감각, 지능 등을 사용해 극복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극복은 앞으로 축적될 그의 국제경기 경험과 성장세, 지금까지의 성실도와 정신력을 감안할 때,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K-리그를 세심하게 관찰하라

다가오는 독일 월드컵, 국가대표팀의 준비 과제는?

2006 독일 월드컵 본선이 1년 남았다. 계획적인 대표팀 관리와 운영이 절실한 시점이다. 지금부터 독일 월드컵까지의 상황은 2002 한-일 월드컵 당시의 그것과는 여러모로 다른 측면이 있다. 기본적으로 K-리그가 연중 계속돼야 한다. 해외파 선수들도 국제축구연맹(FIFA)의 에이(A) 매치 데이 이외에는 차출이 쉽지 않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한-일 월드컵 시절과는 ‘본격 준비 기간’이 다를 수밖에 없다. 더 구체적으로, 우선 이번 두 차례의 원정 경기에서 나름의 몫을 해낸 김한윤의 사례에서 보듯이, K-리그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통해 새로운 우수 선수를 발굴해야 한다. 또 이천수, 최태욱, 조재진 등 앞서 활약했던 대표 선수들에게도 관심을 가져 모든 선수들이 동기를 갖고 경쟁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래야 자연스러운 경기력 향상으로 이어질 것이다. 물론 이는 K-리그의 질적 향상에도 유익하다.
무엇보다 홍명보, 김태영, 최진철이 대표팀을 떠난 이래 지속적으로 불안함을 드러내온 수비진을 강화해야 한다. 아시아 예선 통과로 약간의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된 시점에서,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수비 조직을 재정비하고 조직력을 다져나가야 한다. 특히 수비진의 구성에는, 월드컵 본선에서는 아시아권 선수들보다 좋은 체격과 운동 능력을 지닌 세계 강호들과 맞붙게 된다는 사실이 고려돼야 한다. 또 독일에서 펼쳐지는 월드컵임을 감안, 남은 기간 유럽 강호들과 친선 경기를 반드시 ‘원정 경기’로 치러야 한다. 강자들과의 원정 평가전이야말로 독일 월드컵 준비에서 절대로 생략해선 안 될 필수 절차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대표팀의 중요한 공격 옵션으로 떠오른 박주영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올라운드적 재능의 박주영이기는 하나, 지나치게 잦은 역할 변경이나 최적이 아닌 포지션에의 기용은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겨레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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