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명 맞아 ‘새세대 대중조직’변신 꿈꾸는 총련
북한사회 변화와 함께 내부 보신주의도 타파해야
▣ 도쿄· 오사카=글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이 조센징!”
우익 시위대의 확성기 차량에서 갑자기 한 사람이 뛰쳐나와 <한겨레21> 취재진에게 달려들었다. 일본 경찰 3명이 즉각 몸으로 막았지만,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다. 확성기 차량에는 ‘일본정신재무장’ ‘천황중심단결’이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고, 6명의 시위대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기자는 시위 현장을 좀더 지켜보려고 경찰에게 “한국에서 온 취재진”이라고 설명했지만, 경찰은 “당신도 조센징이니, 시위대를 자극할 수 있다”며 내쫓았다.
극우단체 소음 속에 치러진 50돌 중앙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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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4일 오전 11시 일본 도쿄 이케부쿠로의 도쿄 조선중고급학교.
총련 50돌 중앙대회는 “조센징은 일본을 떠나라”는 극우단체 일본애국당의 소음 속에서 시작됐다. 이날 일본 각지에서 모인 재일 조선인은 2200명.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칠순의 할머니와 양복을 말끔히 다려 입은 할아버지가 대부분이었고, 총련 일꾼을 양성하는 조선대생들을 빼면, 젊은이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공화국 국가 연주로 대회가 시작되자,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형 초상화 앞에서 허종만 책임부의장이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이 보낸 축하 메시지를 대독했다. 이어 서만술 총련 의장이 기념 보고사에서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께 동포 모두의 뜻을 모아 충성을 다짐하자”고 하자, 참석자 전원은 동시에 일어나 열렬히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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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가 끝난 오후 2시, 우익 시위대 차량은 여전히 일장기를 휘날리며 정문 앞길을 막고 있었다. 대회 진행요원은 쏟아져나오는 조선인들에게 일일이 당부했다.
“우익이 있으니, 조심히 가세요.” “노약자는 젊은이 뒤를 따라가세요.”
2200명의 조선인은 불과 6명의 우익 시위대 때문에 후미진 주택가로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가와사키에서 2시간 길을 달려온 권상호(83)씨는 “일본놈들은 내 한평생 동안 이랬어. 그래서 우리가 통일을 해야 해, 통일을!”이라고 울부짖듯 말했다.
총련의 동포들이 힘든 건 비단 ‘우익’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은 일상 속에서도 보통의 일본인들에게 차별을 느끼고 산다. 재일 조선인에 대한 제도적 차별은 개선되고 있지만, 일본인 대다수의 내면에 조선인을 깔보는 ‘쇼비니즘’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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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은 집을 사고 파는 것도 힘들어요. 상대방의 신원 증명을 위해 외국인등록증을 보여줘야 하는데, 일본인들은 ‘조선적’을 확인하고 나면 매매가 ‘꽝’이 되기 일쑤죠. 하다못해 학원강사를 하려고 해도 힘들어요. 조선적이면 학원에서 고용을 꺼리고, 일한다고 해도 일본 이름을 써야 해요.”
총련계 동포에 대한 일본 사회의 거부감과 차별은 일본인 납치 문제로 극에 달해 있다. 식민 지배에 대한 불편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일본 사회가 납치 문제를 기점으로 공세를 퍼붓고 있는 것이다. 이날 취재를 온 일본 언론들도 대회장 바깥의 우익 시위는 외면한 채 ‘부자세습 왕국’의 ‘괴기스런’ 대회 풍경에만 집중했다.
“2002년 조-일 정상회담 때 우리 공화국(북한)이 일본인 8명을 납치했다고 인정했어요. 이후로 하루가 멀다 하고 방송들이 이 문제로 특집을 다루며 떠들고 있어요.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은 일본이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건 말이 안 돼요. 일제시대 때 조선에서 강제로 끌려와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8명과 비교가 됩니까?”
일제시대 강제 징용으로 현해탄을 건너와 총련 교토본부에서 한평생을 일한 김선측(82)씨는 한순간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바뀐 자신의 처지에 대해 억울해했다.
하지만 강제 징용과 종군 위안부 등 일제 수탈의 역사적 경험이 없는 젊은 세대는 일본 미디어의 비판에도 귀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총련의 산하단체에서 일하는 한 동포는 “조국이 정말로 총련이 말했던 것처럼 ‘사회주의의 낙원’이었다면 납치 문제는 없었어야 했다”며 “그럼에도 조국과 총련은 이제껏 그런 일이 없었다며 우리를 속여왔다”고 비판했다.
“조국과 총련도 우리를 속여왔다”
5월22일 총련 50돌 기념 오사카 동포대축전에서 만난 류유자(간사이외국어대 4)씨는 총련의 학생조직인 ‘유학생동맹’에서 활동하면서 지난해 일제 강점기 조선인 유골 반환 문제를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유엔까지 갔다왔다.
“젊은 세대의 가장 큰 문제는 조국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총련도 문제예요. 공화국이 무조건 옳다고 해선 안 돼요. 잘못이 있으면 잘못했다고 하고, 잘했으면 잘했다고 해야죠.”
젊은 층 이탈로 총련의 조직력도 급속히 떨어지고 있다. 현재 총련계 동포로 알려지고 있는 동포 수는 20만명. 재일동포 60만명 중 3분의 1 정도다. 하지만 총련은 정확한 회원수를 밝히지 않고 있다. 교토의 한 총련 일꾼은 “총련에 회비를 내는 진성회원은 2만명도 채 안 될 것”이라며 “젊은 층을 잡지 못하면 총련은 역사 속에 사라질 운명”이라고 말했다.
이런 위기의식은 총련 중앙에서도 읽혀진다. 그래서 총련은 1998년부터 ‘대중조직으로서의 총련’과 ‘새 세대(젊은 층) 중심의 사업’을 주요 사업방침으로 내세우고 있다. 현장에서는 대중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해 ‘공화국’ 완장도 뗐다.
5월21일 오전 가와사키시의 ‘아리랑의 집’. 칠순이 넘은 조선인 1·2세대 30여명이 젊은 선생의 지도로 기공운동을 하고 있었다. 2003년 4월 총련 산하의 비영리기구(NPO·일본 정부의 보조를 받는 시민단체) 법인이 설립한 이 노인복지센터에는 조선인 회원 150명이 드나든다. 이 가운데 3분의 1은 한국 국적이다. 해방 뒤 18살 때 일본에 건너온 김임수(78)씨는 “20년 전에 한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스스럼없이 이곳에 온다”며 “윗선에서만 북과 남이 있지, 현장에선 그런 게 없다”고 말했다. 이곳의 노인들은 매일 아리랑의 집에 나와 <가요무대>를 틀어놓고 한국 노래를 부르고, <겨울연가>의 ‘욘사마’를 이야기한다. 아리랑의 집에는 김일성·김정일 초상화도 없고, 북한의 정치색 짙은 노래도 들리지 않는다. 이같은 노인복지센터는 아리랑의 집 말고도 전국에 15곳이 있다.
북조선 눈치 보고, 윗사람 눈치 보고
총련이 운영하는 아동교실도 지역마다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 아동교실은 미취학 아동에게 ‘조선말 교육’을 시키는 프로그램이다. 총련 250개 지부에서는 동포생활종합상담센터가 설치돼 동포들의 취직·결혼·교육 상담을 해주고 있다. 일본에 4개 지부가 있는 재일본조선인인권협회는 재일 조선인의 교육받을 권리와 직업선택의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총련에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총련 중앙이 북한 체제에 강박돼 있는 이상 근본적인 변화는 어렵다는 것이다. 총련 중앙본부에서 일했던 한 관계자는 “총련 집행부의 인사권은 사실상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가 쥐고 있다”며 “집행부가 북조선 눈치를 보기 때문에 북한 사회의 변화가 없는 한 총련이 근본적으로 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총련 조직의 ‘밥그릇 걱정’ 때문에 개혁이 더디다는 분석도 있다. 자유로운 일본 사회 안에 존재하면서도, 50년 동안 변변한 ‘저항’ 한번 없었던 것은 ‘윗사람에 찍혀서 잘리면 일본 사회에 나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총련 중앙본부에는 100여명이, 각 지부와 조선인 학교 교직원으로 6천~7천명이 일한다. 일본 사회에서 정규 학교로 인정되지 않은 조선인 초·중·고급학교와 조선대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은 사람은 총련의 테두리 밖에서 생활하긴 더욱 힘들다.
윤건차 가나가와대 교수는 총련 개혁의 발목을 잡는 것은 일본인의 조선인 사회에 대한 편견과 총련 조직의 밥그릇 챙기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재일 조선인은 대학을 나와도 갈 곳이 없어요. 자영업을 하거나 민족단체에 취직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총련은 월급은 적지만 안정된 직장인 측면이 있어요. 물론 총련 일꾼들은 민족적 자부심과 이상 때문에 순수하게 일하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이런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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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련에서 총련, 건청에서 민단 |
1945년 8월15일, 조선은 해방이 됐지만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들은 해방을 맞지 못했다.
해방 당시에는 약 200만명의 재일 조선인들이 있었다. 대부분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사람들이다. 1945년 해방으로 그해 12월까지 64만명이 조선반도로 돌아갔다. 하지만 미군은 12월부터 한국으로의 금전 유출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귀환자의 지참금을 1천엔으로 제한했다. 1천엔은 당시 담배 20갑밖에 살 수 없는 금액이었다. 혼란스런 조국의 정치 상황 속으로 귀환해서 생활 터전을 잡기란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60만명의 조선인이 일본에 남았다.
일본 정부는 1947년 외국인 등록령을 공포해 재일 조선인을 ‘외국인’으로 보고 각종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때 재일 조선인들은 국적란에 ‘조선’이라고 써야 했고, 조국의 분단으로 지금은 어디에도 없는 나라가 됐다. 1948~49년에는 조선인 학교에 폐쇄령을 내리고 민족교육 탄압을 시작했다.
투쟁의 선봉에 선 건 1945년 10월에 결성된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이었다. 조국 귀환과 생활 보호 등 재일 조선인의 권익을 위해 결성된 일본 각지의 단체가 통합된 조련은 김천해(일본공산당 중앙상임위원)를 중심으로 한 좌익 계열이 주도했다. 반면 우익 계열은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건청)에 이어 재일본조선거류민단(민단)을 창설해 활동했다.
연합국 총사령부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일원으로 활동한다는 이유로 1949년 조련을 강제해산했다. 조련의 활동가들은 1951년 재일본조선통일민주전선(민전)을 결성해 한국전쟁 때 반미반전 투쟁을 펼쳤다. 일찍부터 조선인 학교를 일구었기 때문에 민전 활동가들은 동포들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그래서 이들이 벌이는 폭력투쟁에는 매회 수천명의 조선인이 참가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총련)은 1955년에 결성된다. 당시 북한은 일본과의 수교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급진적인 투쟁 조직체인 민전을 재외동포 대중조직인 총련으로 전환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양국간의 관계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고, 총련은 일본 사회 내의 섬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에 따라 총련은 50년 동안 ‘북한 대사관’으로서 역할과 ‘재일동포의 대중조직’으로서 역할을 동시에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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