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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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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척, 잘난 척, 약한 척 금지?

등록 2005-05-26 00:00 수정 2020-05-03 04:24

개그우먼들을 대하는 태도에는 우리 사회의 온갖 전통적이고 고질적인 편견들이 농축돼 있어

▣ 김일중/ 방송작가

우선, 개그우먼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를 보여주는 블랙코미디 몇편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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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깜찍한 개그우먼 김효진이 SBS의 <아이엠>에 출연했다. 토크 도중 퀴즈가 나왔다. 1위 아나운서, 2위 교사, 3위 스튜어디스, 4위 비서, 5위 개그맨이라는 순위가 먼저 발표되고, 이것이 무엇에 대한 답일지 질문을 추측하는 것이다. 패널들이 말한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신부감의 직업 아닐까요?” 김효진이 명랑한 표정으로 받아친다. “여자 개그맨이 있잖아요. 그럴 리가 없어요.” 정답은 “이런 여자 나오면 소개팅 꼭 나간다”였다. 정답을 안 김효진은 정말이냐는 표정이다. 신정환이 한마디 툭 던진다. “웃겨주길 기대하는 거죠. 심심하니까.”

정선희의 대성통곡과 조혜련의 터프

#2. 정선희가 신인 시절 동료 연예인과 사귀다가 가슴 아픈 이별을 했다. 몇년 뒤 방송국 복도에서 더욱 멋져진 그와 우연히 마주쳤는데, 속 여린 정선희는 그만 화장실에 들어가 펑펑 울고 말았다. 하필이면 그때 그녀는 코미디 녹화를 위해 산발한 채 앞니에 김 붙인 미친 여자 분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조혜련이 한창 ‘골룸’ 캐릭터로 재미 보고 있을 무렵이다. 엄마가 출연하는 코미디 프로를 보던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엄마가 무섭다는 이유였다. 그는 이 터프한 캐릭터를 한국방송 <즐거운 일요일 해피선데이> ‘여걸 파이브’에서 종종 써먹었다. 게임에 이겨 부상으로 남자 출연자와 1:1 만찬을 하는데 남자 진행자가 일갈한다. “인간과 짐승의 만찬이랄 수 있겠죠.” 조혜련을 포함한 모두가 그의 재치(?)에 박장대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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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여걸 식스’로 이름을 바꾼 코너 ‘여걸 파이브’에는 출연자가 엄수해야 할 조항이 있다. 이른바 ‘3척 금지 조항’이다. 예쁜 척, 잘난 척, 약한 척을 하는 여자는 공공연한 왕따 대상이 된다. 이 ‘3척 금지’야말로 대한민국에서 여자 개그맨으로 산다는 것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불문율이다. 여성으로서의 권리, 예뻐 보이고픈 욕구, 남성 동료들과의 동등한 대우 등 다른 여자들이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들을 온전히 포기할수록, 그리고 그 포기를 자주 방송에서 천명할수록 개그우먼으로서의 성공 가능성은 높아진다.

꾸준히 맥을 이어 등장하는 ‘뚱보’ 개그우먼의 계보는 종종 외모를 개그의 무기로 승화시킨다. 조만간 뚱뚱한 자들의 시대가 올 것임을 웅변하는 ‘출산드라’ 김현숙이나, 턱밑을 긁어주면 귀여운 강아지처럼 헉헉대는 ‘포동이’ 김신영은 서로를 라이벌이라 여긴단다. 심지어 예쁘면 불리해지는 경우도 있다.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소프트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귀염둥이 김형은이 사석에서 예쁘게 꽃단장하고 찍은 사진은 인터넷에서 도리어 엽기 사진 취급을 받았다. 얼굴과 몸매가 예쁘기로 소문난 무용단 출신의 김미연은 외모의 핸디캡(?)을 기상천외한 말투와 노래실력으로 커버했다. 유머러스하면서도 예쁘고 동시에 품격도 갖춘 여자라는 찬사를 제대로 받으려면, 신분이 달라야 한다. 개그우먼으로선 곤란하다. 익살맞은 미녀 탤런트나, 소탈한 섹시 여가수쪽이 그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확률이 훨씬 높다. 한국 연예계에서 ‘웃기다’는 ‘예쁘다’보다 명백히 하위의 가치다.

남성보다 적은 출연료… 소녀가장들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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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우먼의 성공 그래프는 개그맨들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개그맨들이 빠른 각광 대신 빠른 몰락을 겪는 경우가 흔하다면, 개그우먼들은 느리게 주목받고 훨씬 더 오래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각광 수준도 차이가 있다. 개그맨의 최종적인 성공은 버라이어티쇼의 고정 패널을 거쳐 결국 사회자(MC) 자리로 등극하는 것이다. 개그우먼의 경우는 다소 양상이 다르다. 데뷔 15년쯤 된 한 개그우먼은 얼마 전 한 오락 프로그램의 사회자 자리에서 중도 하차해야 했다. 연출자로부터 여자 1인 사회자는 아무래도 허약해 보이니 남자 신인 아나운서라도 한명 붙이자는 끈질긴 요구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분노는 마이크를 둘러싼 헤게모니 분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동일한 역할을 요구받는 사회자임에도, 늘 남자 개그맨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출연료를 지급받는 관행에 대한 울분이었다. 이런 그녀의 처신은 종종 “싸가지가 없다”는 자극적인 평판을 불러일으켰다. 일과 관련된 성차별과 불이익에 따른 피해의식 때문에, 업무상 미팅 자리에서 가시 돋친 자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결과다. 이런 것도 무형의 손해라면 손해다.

하지만 연예인이 아닌 생활인으로서의 생명력을 기준으로 서열을 매긴다면, 개그우먼처럼 막강한 직업도 없다. 송은이의 매니저였던 김용수씨는 단언한다. “개그우먼들은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가치관, 목표의식, 의지, 추진력들이 다른 연예인군에 비해 뚜렷하고 강렬하죠. 얕보면 다칩니다.” 생활력 강한 개그우먼 중에는 유독 일가족의 생계를 떠맡은 소녀 가장들이 많다. 심한 경우는 부모형제뿐 아니라, 남편과 자식의 생계까지 책임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출연료나 행사비, 기타 지출 등 돈의 드나듦에 깐깐하다는 평을 듣는다. 넓은 의미의 깐깐함이 가장 강렬하게 발휘되는 순간은 결혼을 전후한 시점이라고 한다. 남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배우자의 조건인 외모를 오히려 스스로 깎아내림으로써 부와 인기를 거머쥔 자신에게, 상대 남성은 대체 어떤 매력을 느낀 것일까 하는 불안감이다. 성공한 이일수록 불안의 강도는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동물에 자주 비유되던 외모를 지닌 한국방송의 어느 개그우먼은 부부싸움 도중 남편에게 따졌다. “대체 왜 나와 결혼한 거야?” 남편의 짧은 대답은 그녀를 절망케 했다. “신기해서.”

가장 슬픈 사례는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룬 일부 개그우먼에게서 발견된다. 외모와 품격을 팔아 돈과 인기를 사는 메피스토와의 영혼거래를 막 마친 중견 개그우먼들은, 그제야 꾹꾹 억제해왔던 여성성을 꺼내기 시작한다. 사적으로 외모를 꾸미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방송을 통해 대중적인 인정을 받고 싶어한다. 그런데 비극은 대다수의 우리 대중들이 그걸 용납 못한다는 사실이다. 망가져서 돈 번 친구가 예쁜 척을 하기 시작한다는 ‘비호감’(매우 슬픈 용어다)이 확산되기 시작한다. 흑인이고 단신에 뚱보인 오프라 윈프리가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위해 순금 변기로 집을 꾸미든 말든, 성공한 자의 노력과 실력에 더 환호해주는 여유는 아직 우리 대중에게는 남의 나라 얘기다.

누나와 엄마의 포근한 향기를 맡는다

결국은 웃음을 천시하는 풍조가 문제의 뿌리가 된다. 딴따라에 못생기고, 게다가 여자인 인물이 갖는 핸디캡에는 우리 사회의 온갖 전통적이고 고질적인 편견들이 농축돼 있다. 괄괄한 개그우먼이 만드는 오체투지 개그는 연예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박 중 하나다. 성공을 했든 실패를 했든 개인적으로 떠안는 정서적 후유증이 가장 심각하다. 그런 위험한 도박에서 오랜 기간을 거쳐 멋지게 성공한 개그우먼들의 개그에서 진한 삶의 맛이 배어나오는 건 당연한 결과다. 남을 웃기는 일이 남을 울리는 일보다 백배는 어렵다. 개그맨들이 일상에서 그다지 웃기지 않는다는 사실은 삶이 팍팍할수록 그들의 무대가 화려해지기 때문이다. 약자들의 입장에서 강자들을 비꼬되, 강자들은 알아채지 못하는 은유를 구사하는 능력이 진짜 개그의 근간이다. 그래서 유명과 무명, 여성과 남성, 부와 가난, 익살과 사색의 온갖 양극적 가치를 모두 체득한 몇몇 강인한 개그우먼들의 억척스런 수다에서, 누나나 엄마의 포근한 향기를 맡게 되는 것은 무심한 우리 모두에게 행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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