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종이잡지 <한겨레21>의 미래를 위한 강준만 교수의 고언
당파적 전선 사이사이의 DMZ를 주목할 때</font>
▣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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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의 활자매체가 인터넷의 성장으로 인해 생사의 기로에 섰다. 서구의 활자매체 산업은 과거 텔레비전의 도전에 직면했던 할리우드 영화사들의 방법을 원용하기로 결심했다. 그 방법의 법칙은 “깨부술 수 없다면 껴안으라”는 것이다.
지난 3월 <뉴욕타임스>와 <보스턴글로브> 등 미국을 대표하는 신문을 소유한 뉴욕타임스컴퍼니가 포털 어바웃닷컴을 인수한 건 바로 그런 ‘할리우드의 법칙’을 실천한 사건이었다. 이에 자극받아 다른 신문들도 온라인 사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메시지로 승부 걸겠다는 환상 버려야
그로부터 약 한달 뒤 세계 최대의 언론재벌인 뉴스코퍼레이션 회장 루퍼트 머독은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 신문편집인협회 초청 강연에서 “종이로 된 신문은 오는 2040년까지는 유지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신문은 인터넷을 두려워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디지털 혁명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활자매체 산업이 온라인에 직접 뛰어들라는 주문이었다.
머독처럼 ‘돈 놓고 돈 먹기’ 하는 사람들에겐 그게 쉬운 일이겠지만, 한국의 시사주간지, 그것도 돈이 없는 진보적 독립 언론사인 <한겨레21>에겐 하나마나 한 소리다. 그렇다고 앉은 채로 당할 수는 없으니 인터넷 시대에 시사주간지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메시지로 승부를 걸겠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내용만 좋으면 사람들이 구독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건 언론인·지식인들이 곧잘 빠지는 함정이다. 얼마 전 <한겨레>에 연재된 ‘한겨레에 바란다’는 고언들을 읽으면서 내내 떠올린 건 그런 생각이었다. <한겨레>가 그 고언들을 100% 이상 실천에 옮긴다 하더라도 <한겨레>의 어려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고언들은 한결같이 메시지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자본주의를 깔보지도 말고 고상하게 보지도 말자. 대중매체에 대한 완벽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한국 자본주의 현실에서 메시지보다 훨씬 중요한 게 ‘광고·유통·마케팅’이다.
인터넷의 경우에도 사람들이 메시지가 좋아서 인터넷으로 몰려가는 게 아니다. 인터넷은 라이프 스타일이다. 시사주간지가 라이프 스타일에 파고드는 데 있어 메시지의 역할은 미미하다. 인터넷에 푹 빠져 시사주간지를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무슨 수로 내용을 검증받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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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겨레21>의 성장과 발전에서 ‘메시지’와 ‘광고·유통·마케팅’이 각각 차지하는 중요도를 3·7제로 본다. 메시지가 3이라면 광고·유통·마케팅이 7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면은 광고·유통·마케팅에 대해 이야기할 자리는 아니기에 메시지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다. 30%의 몫이라곤 하지만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으므로, 메시지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역설이 가능해진다.
두 가지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다. 하나는 ‘고급지 전략’과 ‘대중지 전략’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은 ‘당파적 노선’과 ‘초당파적 노선’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겨레21>은 여태까지는 둘 다 그 중간적 성격을 보여왔는데, 그게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노빠, 적대적이거나 침묵하거나…
‘고급지 전략’은 지금보다 더 어렵게 가는 것이다. 물론 당장 희생이 뒤따른다. 떨어져나가는 독자들이 속출할 것이다. 새로 생기는 독자는 느리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과의 확실한 차별화와 독자의 충성도 강화를 위해선 고급지 전략이 불가피하다. 고급한 내용을 여하히 쉽게 풀어주느냐 하는 점이 관건이겠지만, 이전보다 전반적으로 내용이 어려워지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역으로 ‘대중지 전략’도 생각해볼 수 있겠으나, 그건 <한겨레21>이 숙명처럼 안고 있는 ‘도덕성 준수’라고 하는 원초적 굴레 때문에 재미를 보기 어렵다. 대중지 전략은 ‘식인 상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머독의 뺨을 칠 수 있을 정도의 선정주의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게 당파성 문제다. ‘초당파적 노선’은 진보성의 포기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진보성을 견지하되 현실정치에 대해 초당파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걸 이해하기 위해, 우선 한국 저널리즘 전체의 치명적 약점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주목해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겠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저주, 신자유주의에 대한 옹호와 찬양. 이 두 가지 이외의 다른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양쪽의 주장을 공정하게 동시에 다루면서 비교 평가하거나 중간적 주장을 내세운 걸 한국 언론에서 단 한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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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의원과 386 의원들간의 싸움. 각자 자기가 옳다는 주장을 중계하는 것 말고, 조금 더 깊이 파고들어가 열린우리당, 아니 한국 정치 전체를 위해 공정하게 시시비비를 가려줄 능력이 있는 매체가 한국 사회에 단 하나라도 존재하는가? 이 문제에 관해 가장 선진적인 모습을 보였던 <한겨레21>마저도 양쪽의 주장을 소개하는 데만 그쳤음은 이미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맹목적인 ‘노조 죽이기’와 맹목적인 ‘노조 감싸기’. 이 두 가지 이외에 다른 목소리를 내는 매체가 한국 사회에 단 하나라도 존재하는가?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런 매체들의 노동 문제에 대한 태도는 무관심에 가깝다. 일부 노동조합의 타락은 이미 오래전부터 떠돌던 이야기다. 그러나 그 어떤 언론도 그걸 건드리지 않은 채 모든 ‘취재권’을 검찰에 양보했다.
이른바 ‘노빠’에 대해 무조건 적대적인 언론과 이들에 대해 무조건 침묵하는 언론. 이 두 가지 이외에 다른 목소리를 내는 매체가 한국 사회에 단 하나라도 존재하는가? 그들의 지지 방식과 행태가 정말 한국 사회의 진보에 기여할 거라고 믿는가? 개혁·진보적 입장에서 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왜 들리지 않는가?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는 건 무슨 이유에서인가?
인정할 건 인정하자. 한국 사회는 모두 당파싸움에 미쳐 돌아가는 사회다. 그래서 당파적 전선 사이사이에 엄청난 규모의 DMZ가 생겨났다. 이 DMZ엔 철조망도 지뢰도 보초도 없지만 그 누구도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걸 다루는 게 시사주간지들의 몫일 텐데, 평소 무슨 세뇌교육을 받은 건지 ‘조금 늘려쓴 신문기사’ 패러다임에서 좀처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볼게 없다고?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왜 그럴까? 아니, ‘진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수구 또는 보수라 지칭되는 세력과 각을 세우고 있는 세력을 무조건 편드는 게 진보인가? 불행히도 한국 사회의 진보는 지금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패거리 진보’라 이름 붙일 만하며, <한겨레21>도 크게 보아 그 범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진 않다.
<한겨레21>을 포함한 활자매체들로부터 외면당하는 DMZ엔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할 소재들이 무궁무진하게 많다. 그건 한국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서도 꼭 공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사안들이지만, 그게 암흑 속에 푹 파묻혀 있는 것이다.
<한겨레21>이 그런 문제들을 과감하고 슬기롭게 다룸으로써 볼 게 없다고 건방을 떠는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면 안 될까? 진보와 보수를 초월해 먹물 냄새를 풍기는 그 누구건 현실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지식과 이해를 얻기 위해 <한겨레21>을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날을 기대하는 건 과대망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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