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슬픔>의 작가 바오닌이 겪은 그 역사적인 하루… 버려진 아이의 엄마를 찾아주고 죽은 듯이 자다
▣ 바오닌(Bao Ninh)/ 소설가
4월30일 오후의 스콜은 우리가 떤선 공항 여기저기 번지는 불길을 잡는 것을 도왔다. 다시 해가 솟고, 바람이 거세게 불고, 시커먼 연기 기둥도 서서히 잦아들고, 재만 빈 하늘에 흩어져 날렸다. 남베트남군 낙하산 부대의 마지막 병사들이 참호 속에서 헐떡이며 기어나와 두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거나 목덜미 뒤로 모아 깍지를 끼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누거나 포로로 삼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빨간 모자의 천사’들은 몸에 지녔던 모든 종류의 무기들을 던져놓고, 후줄근하게 늘어진 군복을 벗어던지고, 팬티만 걸친 몰골로 구불구불 열을 지어서 도시를 향해 느릿느릿 걸어나갔다. 기관단총, 수류탄, 단검, 철모, 전투복, 군화 같은 것들이 활주로를 따라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공항의 주검들을 거둔 뒤 ‘개사냥’
공항 곳곳에 사이공 작전 개시일인 26일부터 계속된 폭격과 포격의 잔해, 그리고 30일 전투의 검은 찌꺼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우리 24연대 부대원들은 주검을 거두어 수습하는 임무를 맡았다. 많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어 방공호나 참호의 모퉁이, 비행기 뱃속이며, 탱크와 장갑차 등의 잔해 등을 구석구석 뒤지고 다녀야 했다. 대부분은 군인들이었지만, 간혹 몇몇 민간인들의 사체도 있었다. 죽은 지 며칠이 지난 주검들도 있었다.
특히 우리 중대는 아주 이상하고도 중요한 임무를 맡아야 했는데, 그것은 ‘개 사냥’이었다. 수백 마리의 저먼 셰퍼드들이 군사 활주로의 동쪽 모퉁이에 있는 우리를 부수고 달아나 비행장 전체로 퍼져 있었다. 그 개들은 우리가 흔히 보는 집 지키는 개가 아니라 몸집이 소처럼 크고, 호랑이처럼 포효하며, 화살처럼 빠르게 달려들고, 미친 듯이 날뛰는, 성질이 아주 흉포한, 외양도 끔찍스런 맹수들이었다. 거의 저녁이 다 되어서야 우리는 공항의 비룡문을 마악 뛰쳐나가려던 마지막 맹견의 목에 겨우 올가미를 던져 잡을 수 있었다.
날이 저물었다. 불길도 모두 꺼졌다. 하루의 마지막 햇살이 공항을 붉게 물들였다. 베트남공화국 주력군 최후의 병사들이 C130 전투기 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항복을 해왔다. 놈들이 이른 아침부터 몸을 숨기고 있던 비행기는 박격포에 한방 맞아 조종석이 활짝 열려 있었고, 기관단총에 동체 양편이 곰보처럼 패어 있었다. 녀석들에게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비행기가 폭발하지 않은 거였다. 게다가 그 C130기는 아주 우스꽝스런 비행기였다. 그것은 북베트남군의 화력에 의해 모든 활주로가 완전히 닫히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기착한 비행기였다. 목숨을 건 비행을 통해 그 항공편이 포위된 도시에 쏟아놓은 것은 하나같이 쓸데없는 것들이었다. 크리스털 잔들이 그득 담긴 나무 상자, 가죽신발로 가득 차 있는 상자, 여성용 화장품 상자… 그리고 신문들! 수백장의 방콕발 28일자 <네이션>, 같은 날짜 홍콩에서 발행된 <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 <천주교 향도자>, <플레이보이>, <스타 앤드 스트라입>…. 빈틈없고 일사불란한, 정말로 효율적이라는 미 군사기구의 운영기제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다.
1975년 4월30일 밤에 우리가 최초의 전승기념물로 얻은 것은 잠이었다. 비행장 곳곳에 해먹(그물침대)이 펼쳐졌다. 해먹을 걸지 못한 사람들은 공항 청사의 난간에, 대합실 의자 위에, 또는 매표소 책상 위에 벌러덩 누워서 잠을 청했다.
그러나 우리 조의 세 사람, 나와 꾸앙, 응이는 그 행복을 누릴 수 없었다. 우리는 잠시 누울 곳을 찾아 공항 청사로 들어서다가 정치사령관인 호에와 맞닥뜨렸다. 그는 아이를 둘 데리고 있었는데, 큰애는 열살 남짓, 작은애가 이제 겨우 예닐곱살쯤 되어 보였다. 공항의 비룡문 바깥의 주차장에는 수백대의 주인 없는 차량들이 방치되어 있었는데, 문이 잠겨 있는 리무진 속에서 부대원들이 이 아이들을 발견한 것이다. 두 아이는 부모를 따라 공항에 왔다. 그러나 아이들을 차 안에 남겨놓고 청사 안으로 들어간 부모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28일 밤부터 30일 오후까지 포격이 쏟아지고 총알이 빗발치는 그곳, 타는 듯한 더위 속에서 물 한 방울, 쌀 한톨 없이 그 숨막히는 공간에 줄곧 갇혀 있었던 것이다. 부대원들이 차 문을 부수고 그들을 끄집어냈을 때, 두 아이는 간신히 가는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물을 주고 음식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자 두 아이는 아주 빠른 속도로 기운을 되찾았다. 그들의 가족은 후에에서 도망쳐나온 뒤 공항에 오기 직전까지 외삼촌의 집에 머물렀다. 아이들은 외삼촌 집이 동칸 거리에 있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 번지수는 외우지 못했다.
두 아이를 가족에게 데려다주어야 했다. 정치사령관의 명령이다. 그대로 쓰러질 것처럼 졸음이 밀려오고 몸이 천근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주차장에서 ‘난쟁이’ 지프 한대를 고르고, 방금 총을 내려놓은 사이공 병사들 중에서 한명을 끌어내 운전을 맡겼다.
우리는 두 꼬마를 데리고 공항을 빠져나와 이제 막 해방된 도시를 향해 달렸다. 드넓고 속이 깊으며 위대한 도시는 수만 갈래의 교차로로 얽히고설켜 있었다. 낙하산병이라는 운전사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기만 했고, 게다가 미토 촌놈이라 사이공의 지리에도 깜깜해 그저 조바심을 치며 이리저리 차를 몰아댈 뿐이었다. 돌고 또 돌고, 느릿느릿 기어도 자꾸만 길을 잃었다. 해방군은 5개 군단이나 되었지만, 사이공이 워낙 거대한 도시라서 30일 밤늦게까지 아직 해방군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은 거리가 아주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총소리는, 공중에 대고 쏘는 것인지 아니면 교전 상황인지는 분명치 않았지만, 혼동의 밤하늘에 점점 더 크게 울려퍼졌다. 차 안에 앉은 우리 셋은 실탄을 장전한 총을 손에 움켜쥔 채 사거리와 오거리들을 지나면서 거리를 샅샅이 뒤졌다. 사람들이 붐비는 곳은 길이 아예 꽉 막혀 있었고, 한갓진 곳은 인기척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밤 11시가 가까워서야 겨우 동칸 거리를 가리키는 표지판을 찾을 수 있었다. 중기관총을 부착한 지프는 꼬마들이 낯익은 자취를 발견해주기를 바라면서 끝간 데 없이 긴 길을 엉금엉금 기었다. 길 끝에서 끝까지 갔다가 차를 돌려 한번 더 달렸다. 정말 다행히도 지프의 연료가 거의 다 떨어져갈 즈음에 형제 가운데 어린 녀석이 외삼촌 집 앞을 찾아냈다.
전승의 기쁨, 상실의 고통
우리는 벨을 누르고 대문을 두드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한 사람이 살금살금 걸어와 문을 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두 아이의 어미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부부는 혹시 미군 비행기라도 얻어탈 수 있을까 하는 바람으로 28일 밤에 두 아이를 태우고 공항에 갔다. 그런데 공항 문 앞에 차를 주차하자마자 포격을 만났다. 제정신이 아니어서 두 아이를 차 안에 남겨둔 채 어미는 어미대로, 아비는 아비대로 뛰었다. 28일 밤, 29일 낮과 밤, 그리고 30일 하루가 꼬박 다 가도록 누구 한명 두 아이를 찾아 공항에 나가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피곤하고 짜증스럽고 잠이 쏟아졌다. 우리는 어미에게 두 아이를 인계하고는 바로 돌아섰다.
지프의 연료가 다 떨어져, 우리는 운전사를 풀어주고 떤선 공항으로 가는 길을 ?퉤“駭? 우리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엄청나게 졸리기도 했다. 게다가 평화가 온 것이 확실했기에 딱히 서두를 이유도 없었다. 우리는 마땅한 장소를 찾아 우선 밤을 넘기기로 했다. 그곳은 집도 없고 나무가 많은 것이 공원처럼 보였다. 내가 첫 번째로 경계를 서고, 꾸앙 그리고 응이가 나머지 절반의 밤과 아침을 맡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보초를 맡은 응이는 날이 훤히 밝았는데도 우리를 흔들어 깨우지 않고 제멋대로 해먹에 누워 다시 늘어지게 잠을 청했다. 이상한 소음에 나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본능적으로 늘상 끼고 다니던 AK소총을 집어들었다가 다시 조용히 자리에 누웠다.
날은 이미 하얗게 밝았다. 꽤 많은 수의 호기심 어린 군중이 우리 해방군 세 사람의 ‘숙영지’를 커다란 원을 그리며 에워싸고 있었다. 꾸앙과 응이는 황급히 일어나 해먹을 빠져나갔지만, 나는 그대로 누워 있었다. 해먹의 그물코 사이로 나는 드리워진 나뭇잎을, 더 높이, 아득히 높은 오월의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평화, 그렇다, 평화가 왔다. 불현듯 나는 그것을 기억해냈고, 이 장기 항전에서 죽어간 또는 살아남은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세대의 거대한 꿈의 도시, 단장의 사이공, 그 가슴에 내가 안겨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눈물이 얼굴 전체를 흠씬 적셨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 자신이 조용히 울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승리의 날 그 눈물은 뜨겁고도 쓰라린 것이었다. 이제 서른해가 된다. 그러나 아직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도시의 가슴속에서 전쟁의 기억으로 잠 못 이루고 뒤척일 것인가. 그 슬픔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두 눈에 음울한 안개를 드리울 것인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모들이 전쟁통에 아이 하나, 아이 둘, 아이 셋, 심지어는 아이 모두를 잃었다. 아내는 남편을 잃었고, 연인들은 헤어져서 두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4월30일. 전승의 기쁨, 평화의 행복 그리고 상실의 고통. 향과 꽃 그리고 연기와 향불.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것들은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토록 하나인 것이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윤석열, 언론사 단전·단수 지시했나…“계엄 문건 이상민도 전달”
탄핵 외치면 “중국인”…민주주의 위기 실감한 청년들
냉담한 현실 [그림판]
김경수 “민주당, 여론 압도 못 해…한 사람 독주 허용 않아야”
헌재, 최상목에 “마은혁 헌법재판관만 임명 안 한 근거 뭐냐” [영상]
“명태균은 다리 피고름 맺혀도”…윤석열 병원행 분개한 명씨 변호인
[영상] 윤석열, 계엄 51일 만에 만난 김용현에 ‘답정너’ 신문
서부지법 판사실 문 부순 ‘사랑제일교회 특임전도사’ 구속
[단독] 김용현 “윤석열, 계엄 법령 다 찾아봐”…윤 주장과 배치
‘전광훈 지시 받았나’ 묻자…서부지법 난동 전도사 묵묵부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