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강제 두발 단속이 다시 논란 속으로…대규모 거리시위 준비하는 청소년들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4월12일 서울 ㄴ고는 발칵 뒤집혔다. 전날 저녁 8시께 청소년 온라인 커뮤니티 ‘아이두’(www.idoo.net)에 올라온 동영상이 문제의 발단이 됐다. 이 학교 1학년 ㄱ(17)군이 휴대전화로 찍은 화면에는 학생주임이 두발 단속에 걸린 1학년 학생 2명을 무참히 짓밟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교사는 엎드린 자세로 벌을 서고 있는 아이의 허리춤을 잡고 허벅지를 자신의 무릎으로 내리찍기 시작했다. 한 아이는 차마 3대를 견디지 못하고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교사는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세운 뒤 욕설을 퍼부으며 따귀를 때렸다. 아이들은 고개를 들어 교사를 바라보지 못했다. 시간이 지났지만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시대의 야만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ㄱ군은 “인격적 모멸에 못 이겨 머리를 자르고 싶진 않다”고 말했다.
‘일진회’ 파문으로 학교 보수화 진행
2005년 봄, 대한민국 중·고등학생들의 최대 화두는 다시 한번 두발규제 철폐다. 지난 2000년 “학생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구호로 시작된 두발규제 반대운동은 전국적인 서명운동과 텔레비전 토론을 거치며 ‘사회적 합의’를 이룬 듯 보였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지난 2000년 10월 “학생·학부모·교사들의 의견을 수렴해 학교별로 새로운 규정을 만들라”는 결론으로 문제를 마무리지었다. 지난 3~4년 동안 각 학교에서 두발 규정이 완화됐지만, 올해 초 터진 ‘일진회’ 파문으로 학교의 보수화가 진행되면서 두발규제 논란이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돌출한 상태다.
배경내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세계인권선언이나 유엔 아동권리협약, ‘인간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는 헌법 조문을 되뇌는 것도 이젠 지쳤다”고 말했다. 청소년 전문 뉴스 포털 ‘인터넷뉴스 바이러스’(www.1318virus.net)와 청소년 온라인 커뮤니티 ‘아이두’(www.idoo.net) 등을 둘러보면, 지난 3월부터 전국에서 이어진 청소년 인권 침해의 참상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 성수공고에서는 개학 첫날인 지난 2월15일 학생 150명이 운동장에서 무릎을 꿇린 채 머리카락이 잘렸고, 서울 송파고에서는 “머리카락를 자르라고 했는데도 4번에 걸쳐 이를 따르지 않으면 퇴학”이라는 무시무시한 학칙까지 등장했다. 서울 경기공고, 대구 ㅇ고, 광주 고려중, 경기도 고양 무원고, 서울 한양공고 등 “수업시간에 교사들에게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렸다”는 아이들의 제보는 수를 헤아리기 힘들었다. 그 모멸감을 견뎌내는 것은 오로지 아이들의 몫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불만을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한 학생들은 과격한 저항을 시도하기도 한다. 지난 3월25일 경기 분당 대진고에서는 정문으로 들어서는 운동장 바닥에 누군가가 빨간색 락카로 “인권의 공동묘지 대진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낙서를 했다. 구령대엔 ‘대한민국 헌법 12조.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갖는다’, 스쿨버스 옆에는 ‘두발 자유’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써 있었다. 교사들은 각 교실을 돌아다니며 손에 락카 자국이 있는 학생들을 잡으려 혈안이 됐지만, 끝내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4월11일 찾은 학교 정문에는 아이들이 뿌린 락카 자국이 아직 선명했다. 이 학교의 한 학생은 “방법은 잘못됐지만, 이런 방식으로밖에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우리 입장도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교사들의 낮은 인권 의식 여전
두발규제를 둘러싼 갈등이 커지자 교육부는 4월13일 전국 시·도 교육청에 “강제 이발이나 학생과 학부모의 의견 수렴 없이 강제로 생활지도 규정을 적용하지 마라”고 공문을 내려보냈다. 교육부 관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인격적인 모멸감을 준다거나, 비교육적인 방법으로 두발 단속을 하지 말라고 교육하고 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제도와 관습은 여전히 학생들을 외면하고 있다. 개학 첫날 학생 150명의 집단 삭발을 저지른 서울 성수공고의 경우 청소년단체들로부터 항의를 받는 한바탕 홍역을 치렀지만, 교사들을 구해준 건 학부모들이었다. 지난 3월25일 열린 총회에서 학부모들은 “두발규제를 계속해야 한다”며 교사들의 손을 들어줬다. 두발 단속은 다시 정당성을 회복했다.
교육부의 공문 한장이 학교 분위기를 바꿀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장 큰 걸림돌은 학생을 대하는 교사들의 인권 의식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2002년 12월 전국 초·중·고등학교 교사 87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교사의 인권의식 조사 연구’를 보면, 학생이 사생활을 보호받을 권리에 대해 “매우 중요하다”고 답한 교사는 10.3%에 불과했다. 두발·복장의 자유에 대해 같은 의견을 밝힌 교사는 전체의 5.7%였다.
희망을 잃은 학생들은 다시 한번 거리로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두’, 청소년들의 자치모임인 ‘21세기 청소년 공동체 희망’,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등에는 5월께 대규모 거리시위를 열자는 ‘격문’이 쏟아지는 중이다. 학생들의 희망은 교육부가 나서 법으로 두발 자유를 못박아주는 것이다. 교육부는 “두발 문제는 각 학교가 자율적으로 알아서 할 일”이라는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
강퍅한 어른들의 비합리적 ‘권위주의’에 도전하는 학생들의 싸움은 승산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신지예 한국청소년모임 대표는 “우리의 조그만 행동을 모으고 모아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밝게 외쳤다. 그 모습은 1987년 6월을 뜨겁게 달궜던 어른들의 옛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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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다. 교육인적자원부는 그해 10월4일 “조만간 시·도 교육청 주관으로 두발 문제 대토론회를 열고 학생·학부모·교원·시민단체의 의견을 수렴해 새로운 규정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바위에 달걀을 던져 일궈낸 소중한 승리에 청소년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곧 시련이 닥쳐왔다. 2000년 11월19일 오후 3시50분 서울시 감사소위원회에 참여한 교육위원들의 분노의 목소리가 서울시 교육청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그들은 “학교장의 승낙 없이 학생단체를 조직해 서명운동을 한 학생들을 처벌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인종 전 서울시 교육감은 “각 학교에서 서명 주도학생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교는 ‘상황 파악’이 끝나자 ‘행동’에 돌입했다. 아이두 운영자 이준행(21)씨가 다니던 서울 단대부고는 “다른 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이씨에게 활동 중단을 요구했다. 이씨는 물러서지 않았고, 이듬해 7월 학교를 떠나야 했다.
이씨는 “같이 활동했던 친구 절반은 활동을 접었고, 절반은 나처럼 학교를 떠났다”고 말했다. 학교에 남은 아이들은 치욕을 곱씹으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했다. 1년 동안 쌓인 소중한 경험들은 축적되지 못하고 허공 속에 흩어졌다. 거짓말처럼 교사들은 다시 가위와 ‘바리깡’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씨와 ‘아이두’에서 활동했던 신휘재(21)씨는 한국 생활을 포기하고 독일로 떠났고, 웹디자인을 담당했던 온인선(19)씨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그 여름, 아이들은 겨우 열여섯, 열일곱이었다. 우리 사회는 어쩌면 이렇게 잔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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