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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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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 안나는 의원들의 시대

등록 2005-04-20 00:00 수정 2020-05-03 04:24

‘탈권위’의 첫발 내디딘 17대 국회 1년… 옷차림·차량·의원실 변화들을 본회의장으로 가져와야

▣ 류이근 기자/ 한겨레 경제부 ryuyigeun@hani.co.kr

#풍경 1
지난해 6월 국회 의원회관 233호실. 배일도 한나라당 의원과 홍문국 보좌관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개인적으로 업무가 밀렸을 때 필요에 따라 나올 수 있는 것 아닙니까.”(홍 보좌관) “그런 게 딱 사용주 논리입니다. 자의적으로 휴일을 정하면 하나 마나 한 일이 됩니다.”(배 의원) 이날 ‘다툼’의 원인은 의원실의 주 5일제 때문이다. 토요일에도 나와서 근무할 수 있게 해달라는 홍 보좌관과 근무해서는 안 된다는 배 의원의 주장이 세게 부딪쳤다. 통상 토요일에 쉬고 싶은 보좌관과 토요일에도 보좌관을 부려먹고 싶은 의원의 처지가 뒤바뀐 것이다. 결국 배 의원의 뜻대로 결론났다. 배 의원실의 보좌진들은 지난해 7월부터 거의 완벽한 주 5일제를 해왔다. 대신 배 의원은 웬만하면 일요일에 의원회관에 나와서 다음주 의정활동 준비를 손수 챙긴다.

#풍경 2
이은영 열린우리당 의원은 지난 4월13일 평소처럼 손수 운전대를 잡았다. 오전 7시30분 서초동 집을 나서 올림픽대로를 타고 30분쯤 지나자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도착했다. 이 의원은 약속이 많은 퇴근길은 몰라도 출근길만은 직접 차를 운전하는 편이다. 주말에는 거의 예외 없이 자가 운전이다. 차를 직접 몰고 다니면서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국회의사당으로 출근할 때 출입문을 지켜 선 의경에게서 간혹 신원확인 검문을 받거나, 외부 행사장에서 주차하는 데 애를 먹기도 한다.

그는 바쁠 때는 종종 국회 의원회관 옆 후생복지관 휴게실에서 김밥이나 햄버거를 직접 사와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하곤 한다. 가능한 자료 찾기도 보좌진에게 떠맡기지 않는다. 인터넷 서핑 등을 통해 스스로 하는 편이다.

자전거 출근·구내 식당·인라인 동호회

깁스를 한 것처럼 목에 잔뜩 힘을 줘왔던 의원들이 17대 국회 들어서 과거와 사뭇 달라졌다. 품위라는 이름으로 ‘폼잡기’와 ‘권위주의’에 절어 있던 의원들의 행태가 많이 변한 것이다. 여성 의원들의 양적 증가나 역할 증대 등과 함께 ‘탈권위’는 지난 16대나 그 이전에 견줘 17대 국회의 변화를 설명하는 열쇳말 가운데 하나로 등장했다.

17대 의원들, 특히 초선 의원들의 탈권위적 모습은 여의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승수 민주노동당 의원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자전거맨’이다. 아직까지 날씨가 추워 숙소와 의사당까지 걸어다니고 있지만, 날씨가 더 풀리면 겨울 동안 집 한쪽에 처박아놨던 자전거를 다시 꺼낼 작정이다. 남색 잠바를 걸친 단병호 의원과 한복 차림의 강기갑 의원은 검정색 정장 차림 일색이던 의원들의 패션에 변화를 줬다. 국회 도서관 증축 공사장 옆에 가건물로 지어진 식당이나 구내식당에서는 여야의 젊은 의원들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검정색 세단의 승용차는 다양한 색깔과 차종으로 많이 교체되고 있다.

공간 활용에서도 국회의 변화가 감지된다. 의원실은 의원방과 보좌관방으로 주인과 머슴의 방처럼 엄격히 나누어져 있었으나, 이제 젊은 의원들 상당수가 의원방을 보좌관들과 공유하고 있다. 국회의사당이나 의원회관의 의원 전용 엘리베이터는 지난해 4·15 총선 뒤 자취를 감췄다. 엘리베이터 구석에 서서 다른 사람이 내릴 층을 대신 눌러주는 의원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국회의 변화는 의원들의 연령대가 낮아지고, 권위주의적 문화를 싫어하는 시대흐름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의원들의 평균 연령은 51살으로 16대에 견줘 3살 젊어졌다. 한나라당 의원 10여명이 동호회를 꾸려 여의도에서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달라진 여의도 정치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국회에 입문하기 전부터 인라인 타기를 즐겼다는 김희정 의원은 “운동도 되고 취미생활도 되지만 국회 밖에서 자유롭게 시민들을 만나는 게 활력이 된다”면서 “사실 제일 좋은 건 좋아하는 인라인을 부담 없이 눈치 없이 탈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 동호회는 국회 직원들과 보좌관, 당직자들에게도 문을 열어놓았다. 전문 동호회와 ‘조인트’한 덕분에 초보자는 수준급 인라이너들에게서 1대 1로 강습도 받을 수 있다는 게 자랑이다.

무늬는 바뀌었는데, 국민 불신 왜 커지나

개성을 찾고 존중하는 이런 분위기는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의 권위주의 때 벗기를 넘어서 국회나 당 운영에도 조금씩 투영되고 있다. 무엇보다 ‘3김’ 시대와 달리 1인 지배에 의한 정당정치가 사라졌다. 의원들에게 교시처럼 떠받들어지던 당론은 더 이상 ‘절대반지’가 아니다. 박세일 한나라당 의원은 행정도시건설 특별법에 찬성한 당론을 거부하면서 의원직을 내던지기도 했다.

서원학 한나라당 보좌진협의회 수석부회장은 “17대 국회가 16대에 견줘 권위적인 면이 많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강현우 열린우리당 보좌관협의회장도 “과거와 달리 의사소통 방식과 옷차림, 차량 등 형식적인 측면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다”고 평가했다. 의회 전문가들도 대체로 국회의 탈권위주의적 변화에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지난해 12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17대 국회가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답변이 80.0%로 나타났다. 2003년 같은 조사에서 66.0%였던 것과 비교하면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혐오감이 오히려 더 커졌음을 알 수 있다. 17대 국회의 무늬가 크게 바뀐 것과 달리 그 내용은 과거에 비해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민전 경희대 정치학과 교수는 “17대 국회 들어 문화적 측면과 함께 자유롭게 법안을 발의하는 등 의회의 권위주의 문화가 많이 깨져가고 있지만, 아직 탈권위주의적 문화가 민주적 의회 문화로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17대 국회는 지난 1년 동안 겨우 변화를 위한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내가 초선일 때 함부로 안 그랬어”

나이·당선 횟수 여전히 따지는 서열문화…
막말·파행 등 국회 구태 언제까지 가려나


“젊은 초선 의원이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야!” “내가 초선일 때 그렇게 함부로 나서지 않았어…”
고진화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 연말 의원총회 회의장에서 나이 지긋한 의원들로부터 연거푸 타박을 맞던 기억을 씁쓸하게 떠올렸다. 연단에 나가 보안법 등 ‘4대 법안’에 대해 당론과 다른 의견을 내놓자, 뒷자리에 앉아 있던 선배 의원들이 제지에 나선 것이다. 이는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고 의원은 “서로 가감 없이 얘기해서 의견을 모아나가야 하는데, 선배라는 이유로 후배의 의견을 누르는 게 당연시되는 풍토가 아직도 남아 있다”며 “연배가 정치 공간에서 일을 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17대 국회 들어서도 나이와 선수(당선 횟수)가 우선시되는 의회의 연공서열 풍토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종종 능력에 관계없이 의원의 선수가 당직 임명의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며 “획일적으로 선수나 나이를 위주로 정치권 서열이 매겨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국회가 연공서열뿐만 아니라 여전히 회의장 점거, 막말과 저질 발언, 근거 없는 폭로, 파행이라는 구태를 털어내지 못하고 있다. 김형준 국민대 정치대학원 교수는 “17대 국회의 변화가 생각한 만큼 속도가 붙지 않고 있다”며 “66.5%가 초선 의원인데도 품격 높은 의정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의 변화가 너무 더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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