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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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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9일, 총성이 울렸다

등록 2005-04-14 00:00 수정 2020-05-03 04:24

미국과 유대인과 우리에게 저항과 범죄로 기억되는 날짜…사회적 ‘기억의 터’란 무엇일까

▣ 김덕호/ 한국기술교육대 교양학부 교수·역사학

얼마 전 미국에서는 한 고등학생이 학교에서 총을 난사하여 9명의 생명을 앗아가고 자살까지 한 끔찍한 사건이 또 벌어졌습니다. 무슨 불만이 그리도 많기에 열여섯살에 불과한 소년이 세상에 대해 그런 방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미네소타주의 인디언 보호구역에 사는 제프 와이즈(Jeff Weise)라는 이 원주민 소년은 평소 나치즘에 열광하고 히틀러를 숭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와이즈의 친구의 증언에 의하면, 와이즈는 범행 전에 <엘리펀트>(Elephant)라는 영화를 빌려다 보았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몇해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콜럼바인(Columbine) 고등학교에서의 총기 사건에 영향을 받아 만든 2003년 작품으로, 그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최고작품상에 해당하는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습니다. 영화 내용을 거칠게 요약하면, 평소에 동료 학생들과 학교로부터 왕따를 당해오던 두 학생이 벌이는 피의 복수극(?)입니다.

콜럼바인의 ‘거사일’은 히틀러 생일

그렇다면 와이즈는 왜 <엘리펀트>를 보았으며, 이 영화를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했던 걸까요? 1999년 4월20일 콜로라도주 덴버시의 교외에 있는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딜런 클리볼드(Dylan Klebold)와 에릭 해리스(Eric Harris)는 총을 난사하여 12명의 동료 학생과 교사 1명이 죽고 26명의 학생이 다쳤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이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들 자신이 ‘트렌치코트 마피아’의 일원이라고 주장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경멸적 용어인 ‘검둥이’(nigger)라는 말과 함께 흑인 학생들의 머리에 총을 쏘았습니다. 그리고 생존 학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 중 한명이 “나는 검둥이들의 머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라고 말하면서 웃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볼링 수업 시간에도 스트라이크나 스페어를 잡으면, “히틀러 만세”(Sieg Heil)를 외쳤다고 합니다.

이들이 사건을 일으킨 날은 바로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태어난 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콜럼바인 사건은 결코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거사(?)를 할 날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왜 히틀러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을까요? 누가 그들에게 인종차별주의를 가르쳤던 걸까요? 도대체 불만이 얼마나 컸기에 많은 급우들을 향해 총을 쏘아댄 것일까요? 그들은 어떻게 그리도 많은 무기- 권총 2정, 반자동 라이플총 2정, 파이프 폭탄 30개- 를 준비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숫자로 이루어진 날들을 어떻게 기억하는 걸까요? 1년을 이루는 각각의 날들은 개인적으로는 생일, 결혼기념일, 약혼식, 제삿날 등 의미 있는 날들로 채색되겠지만, 집단으로서의 기억은 민족마다 국가마다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국가마다 독특하게 지니고 있는 집단기억은 DNA 없이도 세대를 이어가면서 전달, 복제되어 후대의 세대에게 각인됩니다. 이러한 집단적 기억은 학교나 매스컴을 통해 재생됩니다. 집단적 ‘기억의 터’는 공적 매체들을 통해 끊임없이 잘 가꿔집니다.

저에게 4월은 이상하리만치 기억될 만한 사건들이 중첩된 달입니다. 먼저 4월19일이 떠오릅니다. 벌써 45년이 흘렀으니 이제 충분히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숫자로만 기억되는 그날의 사건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와 유산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린 책을 여태껏 보지 못했다면 제가 너무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날의 사건이 학생의거, 학생혁명 등 무엇으로 불리든 간에, 당시 학생들이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키는 데 심대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 이후 한국의 현대사는 학생운동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는 설명이 힘들 정도로 우리의 해방 60년사와 맞물려 있습니다.

독립전쟁과 오클라호마 테러

그러나 4·19는 미국인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날은 미국인들에게 잊기 어려운 상처를 안겨준 날이기도 합니다. 1995년 4월19일은 오클라호마시 연방청사 건물이 폭탄 테러로 파괴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날의 폭발로 무려 149명의 어른과 19명의 어린이가 죽었습니다. 거기에다 다친 사람들도 500명이 넘었습니다. 단일 폭발 사고로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한 사건이기도 했지요. 그러니 미국인들로서는 더더욱 잊을 수 없고 치욕스러운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폭발의 원인 제공자인 티머시 맥베이(Timothy McVeigh)는 2001년 5월 유족과 생존자 대표 열 명이 폐쇄회로로 그의 처형을 지켜보는 가운데 지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여담입니다만, 285명이나 되는 사람이 그의 처형 장면을 보고 싶어해서 결국에는 복권 당첨자 뽑듯이 대표자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의 처형 집행은 연방 차원에서는 38년 만의 일이고, 폐쇄회로 텔레비전으로 방송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맥베이의 범행에서 정말로 놀라운 건 그가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들에게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무분별한 공권력 개입과 국가가 저지른 ‘살인’에 분노하여 정부에 복수할 생각을 했다지요. 특히 웨이코(Waco) 사교집단 습격 사건은 그에게 국가가 개인 또는 시민의 사생활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되새기게 했다고 합니다. 당시 80명의 신도가 사망했는데, 여기에는 17명의 어린이가 포함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연방 건물을 폭파해 국가를 각성시키겠다는 그의 목표가 빗나가, 그가 그렇게도 존중받기를 원하던 개인들이 국가 대신 희생됐던 점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연방청사가 폭파되는 소리를 들으면서, “웨이코에서처럼, 당신들이 뿌린 대로 거둔 것이야”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 역시 거사(?)일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는데, 그날은 바로 북아메리카 동부의 13개 식민지가 영국에 대해 독립전쟁을 시작한 날입니다. 1775년 4월19일 렉싱턴에서 영국군과 아메리카 식민지의 민병대 사이에 첫 교전이 벌어져 민병대쪽에서 사상자가 생기고, 얼마 뒤 렉싱턴에서 5마일 정도 떨어진 콩코드 전투에서는 영국군쪽에서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쌍방은 물러서려야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날의 총성은 세계사를 바꾼 사건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맥베이에게 전제적인 폭압을 일삼은 국가에 대해 시민들이 자위권 차원에서 무장하여 도전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날은 더욱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혹시 그는 자신을 미국혁명 때 영국의 식민제국에 저항했던 독립 영웅들이나 또는 ‘건국의 시조들’과 동일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4·19는 유대인들에게는 또 다른 역사적 의미를 가진 날입니다. 1943년 4월19일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있던 유대인 게토에서 봉기가 일어난 날이기도 합니다. 이날 독일군들이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게토의 유대인들을 내몰라는 명령을 집행하려 하자, 유대인들의 저항이 시작됐습니다. 사실상 유대인들의 소개는 이미 1942년 7월부터 시작됐습니다. 처음에는 쓸모없는 사람들부터 기차에 태워 아우슈비츠와 트레블린카로 보냈습니다.

유대인의 저항이 시작되던 날

그해 7월부터 9월 사이에 40만명의 유대인이 5만∼6만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남은 자들은 주로 15∼50살의 남자였습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남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비난하고 헐뜯는 도덕적 타락이 본격화됐습니다. 게다가 기존의 정치적 분열- 종교주의자, 세속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시온주의 우파 또는 좌파, 반시온주의자 등- 의 골도 더욱 깊어졌습니다. 무력감과 절망감이 이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절망의 끝에 이르러 그들은 저항하기로 뜻을 모으고, 자신들의 정치 노선을 뛰어넘는 연합전선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 투쟁조직’(Jewish Fighting Organization)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나치에 부역했던 유대인 경찰 지도자부터 암살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족을 배반한 대가가 어떻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지요. 그리고 최초의 무장 저항은 1943년 1월 초 히틀러의 오른팔이자 나치 친위대 대장이었던 힘러가 바르샤바 게토를 방문하여 소개 명령을 내린 직후 시작됐습니다.

힘러는 자신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바르샤바에 4만명의 유대인들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에 몹시 화를 냈습니다. 그의 명령에 따라 독일군이 게토에 들이닥친 1월18일, ‘유대인 저항조직’이 독일군을 상대로 처음으로 무력 저항을 했습니다. 이 저항은 4월 봉기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독일군을 상대로 소규모 전투를 벌인 이후, 수많은 유대인이 자기들도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의 좌절과 절망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운명에 순종하기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대인 저항조직은 주로 십대였던 수백명의 유대인들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이들은 직접 만든 화염병과 소총 몇 자루, 몇몇 경화기로 무장하여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답게 죽기 위해서 독일군에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선언문에서 “우리 모두는 인간답게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며 항전의 각오를 다졌습니다. 공장 설비와 필요한 인력의 이동을 끝낸 4월19일- 유대인들의 명절인 유월절(Passover)의 하루 전날- 오전 6시에 독일군들이 대대적으로 게토 안으로 쳐들어왔습니다. 그러고는 격렬한 시가전이 전개됐습니다. 유대인들의 저항이 얼마나 집요했던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천명의 나치 독일군들이 두번씩이나 게토에서 퇴각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게토에 있던 모든 건물을 방화하는 초토화 작전으로 진압하게 되지만, 이들의 처절했던 투쟁은 한달 가까이 이어지다가 결국 5월16일 끝이 났습니다.

역사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던집니다. 어떻게 600여만명으로 추산되는 그렇게 많은 유대인들이 저항 한번 못하고 유순하게 가스실로 끌려갈 수 있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로 이날의 봉기야말로 저항의 의지를 떳떳하게 보여준 사건으로 기억하고자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보여준 행동은 오늘날의 유대인들에게 불굴의 정신과 용기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매년 4월19일,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전세계에서 아우슈비츠로 모여 그들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끌려갔던 길을 행진하곤 합니다. 아우슈비츠에서만도 100만명 이상의 유대인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980년 이스라엘의 교육부에 의해 시작된 아우슈비츠로의 행진은 전세계에 퍼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 특히 젊은 세대가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게 하는 대단한 교육 효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역사란 무엇일까요? 특히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미국의 평범한 사람들이 1775년 콩코드에서 첫 총성이 울린 날이 4월19일이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과연 4월20일을 히틀러의 생일로 기억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맥베이는 4월19일을, 클리볼드와 해리스는 4월20일을 거사일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듯 나름대로 역사에 관심을 지닌 사람들이 엄청난 일을 저지르는 걸까요? 왜 이렇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역사를 나름대로 읽고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걸까요?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 때문에 역사 교육이 잘못된 것일까요? 어떻게 역사를 가르쳐야 할까요? 그런가 하면 지금의 유대인들은 한국인들처럼 자랑스럽게 4월19일을 기억하면서 나치의 압제에 저항했던 조상들을 기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집단적 기억 또는 사회적 기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어쨌든 저에게 4월은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귀화했던 어느 시인의 시에서 묘사된 것처럼 불임의 달이 아니라, 이래저래 사회적 ‘기억의 터’를 풍부하게 만드는 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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