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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지식 패권 삼성경제연구소

등록 2005-03-22 00:00 수정 2020-05-02 04:24

발빠른 이슈 제기로 정책 방향에 입김… 국가의 이데올로기까지 좌우하는가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노무현 정부 출범 직전인 지난 2003년 2월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별관에 둥지를 틀었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는 ‘국정과제와 국가운영에 관한 어젠다’라는 내용의 방대한 연구 보고서가 제출됐다. 총 400여쪽 분량의 이 보고서는 삼성경제연구소(삼성연) 연구진 70여명이 공동으로 작성한 것이었다. 보고서 내용은 비공개에 부쳐졌다.

국가운영까지 걱정하는 ‘오지랖’

아직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보고서 내용만큼이나 관심을 끄는 대목은 ‘삼성연의 법적 지위’와 ‘보고서의 주제’가 빚어내는 부조화다. 재벌그룹 소속의 여러 민간 경제연구기관들 가운데 하나인 삼성연이 ‘국정과제’나 ‘국가운영’ 방향을 제시한다는 게 언뜻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물론, 민간연구소라고 해서 국가적인 과제를 고민할 수 없다는 말과는 전혀 무관하며, 민간 연구기관의 통상적인 행태와는 많이 다르다는 뜻이다.

삼성연은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국정과제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평소에 쏟아내는 보고서에도 국가적인 현안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담아낼 때가 적지 않다. 2만달러론, 산업 클러스터(집적단지), 동북아 중심 프로젝트 등과 관련된 연구 보고서가 그런 예다. 그룹 계열사를 중심으로 한 기업 컨설팅을 제외하고는 성장률, 금리, 환율 등 경제 변수들에 대한 의견을 낼 뿐인 다른 민간 연구기관들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삼성연의 관심사가 소속 그룹 또는 경제 영역을 훨씬 넘어 ‘국가적인 차원’에 이르고 있음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예는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1년에 제기한 ‘강소국론’이다. “우리나라는 네덜란드, 핀란드, 스위스 등 이른바 작지만 강한 나라의 발전 모델을 따라 첨단기업 육성 등 선택과 집중 전략을 펴야 한다”는 게 강소국론의 요체였다. 삼성연은 강소국론을 담은 보고서 발표와 함께 각 언론 매체의 현지 취재 후원을 통해 강소국론을 대대적으로 확산시켰다.

삼성연이 지난해 9월 의정연구센터와 공동으로 개최한 토론회에서도 이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의정연구센터는 잘 알려진 대로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열린우리당의 이광재·서갑원·백원우 의원이 주축을 이루는 의원 모임이다. 당시 삼성연은 ‘경제 재도약을 위한 10대 긴급 제언’을 통해 △디지털 칸(한국의 디지털 실험장화) △네오 뉴딜(정보기술 투자) △소프트산업의 성장 엔진화 등 과제를 제시했다. 당시 토론회에서 논의된 내용은 정책자료집, 벤처 관련 법안에 반영됐다고 서갑원 의원은 전했다.

노무현 클러스터 전략도 미리 제기

삼성연의 이런 오지랖 넓은 행보를 어떻게 봐야 할까?

이 연구소의 핵심 임원은 “우린 삼성그룹의 외곽 조직이 아니라 ‘대한민국 경제수비대’라는 자부심으로 일한다”고 말한다. 삼성그룹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나라 경제 전반을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일한다는 설명이다. “외환 위기를 겪고 보니, 한국 경제가 위험해지면 삼성그룹이고 연구소고 똑같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한국 경제 전체를 고민하는 쪽으로 연구 방향을 잡는 게 결국 연구소나 그룹에도 좋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여기에 “소속 그룹의 이해관계에 얽매이는 연구를 할 경우 연구원들을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할 수 없다”는 설명을 곁들인다. 연구직이란 게 자존심과 사명감을 먹고사는 특성을 띠기 때문에 ‘돈’ 외에 ‘동기부여’를 해줘야 한다는 설명이다.

국가적 고민을 온통 다 짊어지고 있는 듯한 태도에 거부감을 느낄 이들이 적지 않겠지만, 삼성연이 굵직굵직한 이슈(사회·경제적 현안)를 선점하고 화두를 제기하는 데 누구보다 발빠르다는 것에 대해선 별다른 이견이 없다. 이는 삼성그룹의 비약적 성장세라는 후광과 맞물려 삼성연의 성과물에 대한 주목도를 높이는 요인이다. 경제성장률 전망에서조차 삼성연이 한국개발연구원(KDI)보다 더 높은 관심을 끈다.

삼성연의 주장이나 연구 성과물이 언론을 비롯한 바깥의 관심을 끌고 화두를 제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부 정책으로 연결되는 예도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노무현 정부의 산업정책을 특징짓는 클러스터 정책이 한 예다. 지난해 6월 산업자원부에서 발표한 ‘산업단지 혁신 클러스터화’ 추진 방안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 클러스터 정책은 구미·창원·울산 등 전국 산업단지 6곳의 연구개발(R&D) 기능을 강화해 질적 성장을 꾀하는 내용으로 돼 있다.

공공 부문 ‘삼성 배우기’는 유착인가

이런 내용의 클러스터 정책이 나오기 1년 전인 2003년 5월 삼성연은 ‘한국 산업과 지역의 생존전략 클러스터’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삼성연이 김대중 정부 시절 강소국론을 제기할 때부터 제기해온 클러스터 전략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 실리콘밸리처럼 기업, 대학, 연구소 등을 특정 지역에 모아 그물망(네트워크)처럼 묶어 사업전개, 기술개발, 부품조달, 인력·정보 교류 등에서 상승(시너지) 효과를 내자는 게 산업 클러스터 전략의 방향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삼성연의 클러스터 전략 제기 뒤 노무현 대통령의 입에서 클러스터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다. 노 대통령은 2003년 11월12일 대전·충남 지역 언론과 만난 자리에서 “지방화 전략 중에는 지역의 학교와 산업을 함께 연결시키고 그것을 기술혁신의 중심으로 삼아나가는 ‘지역혁신 산·학·연 클러스터 전략’이 있다. … 충청권에서는 대덕연구단지라고 하는 아주 고도의 지식집적 단지가 있어 ‘국가 혁신 클러스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같은 달 26일 전북지역 언론과 만난 자리에서, 27일 부산~거제간 연결도로 기공식 연설에서도 클러스터 전략을 입에 올려 ‘2만달러론’과 함께 대통령의 ‘애용어’라는 평을 낳았다.

삼성연이 제기한 클러스터 전략이 대통령의 입을 거쳐 산업자원부의 정책으로 이어졌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정부가 2003년 8월10일 청와대 중재로 확정한 ‘10대 국가적 미래전략 산업’에서도 이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정부 역량을 집중하기로 선정된 10대 전략 산업은 △지능형 홈 네트워크 △지능형 로봇 △미래형 자동차 △디지털TV 및 방송 등이다. 삼성연이 비슷한 시기에 초안을 마련한 ‘2만달러로 가는 길’에도 10대 성장동력 산업을 발굴·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담겼다. 예시한 10대 부문이 정부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데다 전후 관계를 명확히 알기 어렵지만, ‘10대’라는 구호의 유사성은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6개월 만인 2003년 8·15 광복 경축사에서 공식적으로 제기해 정부 경제 정책의 선회로 여겨진 ‘2만달러론’이 나오는데도 삼성과 삼성연의 역할이 컸다는 게 정설이다. 재계는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 전국경제인연합회 주도로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 결의문’을 채택한 데 이어 이건희 삼성회장이 남미식 경제 불황에 빠지지 않으려면 ‘마의 1만달러 덫’에서 빨리 탈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국민소득 증대를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삼성과 삼성연이 집중 부각되면서 정부 부처를 비롯해 공공 부문에서 ‘삼성 배우기’가 잇따르는 현상 또한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금융감독원은 4월 중 경기 용인 삼성인력개발원에서 국·실장급 간부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삼성연 주관의 ‘변화·혁신 연찬회’를 열 예정이다. 앞서 기획예산처는 올 1월, 국무총리실은 지난해 삼성연 주관의 특별 연수를 실시한 바 있다.

삼성연의 이런 행보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도 일부 있다. 국가적 과제와 행정에 대해 활발한 의견을 냄으로써 정책으로 연결시키는 건 어떤 면에선 연구기관 본연의 임무일 것이기 때문이다. 삼성연이 특정 재벌 소속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음성적 로비가 아닌 ‘양성적 이론’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예전보다는 진일보한 ‘재벌-정부의 관계맺음’이란 평가도 나온다.

지난해 9월 삼성연과 대규모 토론회를 열어 삼성과 유착된 것 아니냐는 구설에 오르기도 한 의정연구센터 소속 서갑원 열린우리당 의원의 설명을 들어보자. “국회의원은 ‘가공유통업’이라고 생각한다. 앉아서 정책을 만들 수 없으니 분야별 전문가의 얘기를 듣고 공동 발표도 하면서 정책을 개발하는 것이다. 삼성연과 토론회를 연 것은 여러 의견을 듣는 한 통로였다.” 서 의원은 “당시 토론회를 바탕으로 3권의 공동 정책자료집을 냈고, 벤처·중소기업 지원 법안에도 일부 반영했다”고 덧붙였다.

정책 의견 통로를 다양화해야

삼성연이 국가적 과제에 대한 목소리를 내고, 정부 정책에 반영되는 현상 또한 이런 시각으로 볼 수 있을 법하다. 정책의 용광로에 바깥의 경험과 의견을 녹여내는 건 마땅한 처사일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삼성연이 다양한 의견을 이루는 실타래의 한 갈래가 아니라 ‘오직 하나’로 여겨질 만큼 패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국가적 의제(어젠다) 설정에선 다른 민간 연구기관은 물론, 정부 출연 연구기관들의 목소리 또한 거의 들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런 해석을 지나친 것으로 돌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부 관련 기관에서 앞장서 제시해야 할 국가적 고민과 과제를 삼성연이 대신해주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김기원 방송통신대 교수는 “재벌이 국민 경제를 지배하는 현상은 김영삼 정부 때부터 두드러졌는데, 이제는 여기서 나아가 정치·사회 전반과 이데올로기까지 주도하는 현상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풀이한다. “한국개발연구원을 비롯한 정부출연 연구기관들이 정부 부처의 용역을 수행하는 데 진을 빼는 사이에 삼성연은 탄탄한 물적 토대와 내부 인센티브 시스템에 힘입은 선도적인 이슈 선점을 통해 사회적 담론을 독점적으로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삼성연이 국가적 의제에 관한 보고서를 주도적으로 내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어도 특정 기업집단 소속 연구기관이 담론을 독점하는 데 따른 위험성은 경계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부 출연기관을 비롯한 다른 연구집단과 진보 진영이 치열한 자세를 견지하고, 집권 세력이 정책 의견을 듣는 통로를 다양화하는 데 힘을 쏟는 것 말고는 지식 독재의 위험을 피할 뾰족한 수는 없을 듯하다. 삼상연더러 입 닫고 일손 놓으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기에.



삼성연을 키운 사람들

언론계 출신 최우석 부회장 첫손에 꼽혀…정규현 소장, 아시아 최고의 싱크탱크를 노린다

삼성경제연구소(삼성연)를 국내 최대의 싱크탱크로 키운 인물로는 최우석(65) 부회장이 첫손에 꼽힌다. 최 부회장은 1995년 5월 2대 연구소장직에 올라 2003년 9월까지 8년여 재직하며 다른 민간 연구기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연구소의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일보> 기자로 출발해 <중앙일보> 편집국장·이사를 거친 최 부회장은 언론계 출신답게 읽히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주력했다. 좋은 연구 성과물이라도 연구소 내부에만 머물면, ‘연구를 위한 연구’에 그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와 친분이 깊은 한 언론계 인사는 “최 부회장은 ‘연구소는 외부와 소통하고 공익적 기능을 아울러 수행해야 한다’는 방침에 따라 연구소를 재벌그룹의 인하우스(내부 기관)에서 싱크탱크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말했다.
신문사의 기획취재처럼 순발력 있게 진행되는 연구 방식에 대해 처음에는 불만도 적지 않았지만, 언론을 비롯한 바깥의 호평을 받는 등 성가를 높이면서 삼성연만의 색깔로 굳어졌다.
최 부회장은 엄청난 독서량으로도 유명하다. 석·박사급이 즐비한 연구진 가운데 유일한 학사로 연구소를 장기 집권한 것은, 삼성그룹의 인사 스타일 못지않게 꾸준한 독서에서 배어나온 아이디어에 힘입은 바 컸다고 한다. 최 부회장은 2003년 9월부터는 연구소장직에서 물러나 부회장으로 대외활동과 자문역을 수행하고 있다.
최 부회장에게서 바통을 이어받은 정구현(58) 소장(대표이사 사장)은 미국 미시간대 경영학 박사 출신으로 1978년부터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해왔다. 정 소장은 한국의 싱크탱크에서 나아가 아시아 최고의 싱크탱크로 거듭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를 위해 국내 민간 연구기관으로는 처음으로 올해 중 중국 베이징에, 내년엔 일본에 연구분소를 설치할 계획이다.
윤순봉(49) 부사장은 풍부한 아이디어로 정평이 나 있다.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한 경제·경영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인 ‘세리시이오’(sericeo.org)의 아이디어도 그에게서 비롯됐다고 한다. 구수한 입담으로 각종 단체나 기관의 인기 강사로 꼽힌다.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에 근무하다 1986년 5월 연구소로 옮겨 경영전략실장·연구조정실장을 지냈다.
경제연구본부장을 맡고 있는 정문건(53) 전무는 연구소의 대표적인 논객으로 외부에 널리 알려져 있는 편이다. 정 전무는 미국 밴더빌트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한국은행 조사부 연구위원,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한 바 있다.




살림살이도 국내 1위

박사급 인력 수는 타의 추종을 불허…영업수익도 다른 연구소의 2배 이상

연구기관의 핵심인 박사급 인력 수만 보더라도 삼성경제연구소(삼성연)는 국내 다른 경제연구기관들을 압도하고 있다. 삼성연의 박사급 연구진은 70명으로 LG경제연구원(13명), 현대경제연구원(10명)의 6~7배에 이른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세 연구기관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었던 것과 견줘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삼성연구소의 박사급 연구진은 대표적인 국책 연구기관으로 꼽히는 한국개발연구원(KDI)보다 19명 더 많다. 미시 분야를 촘촘하게 아우르고 있는 산업연구원(KIET) 역시 박사급 인력은 삼성연에 견줘 8명 모자라는 수준이다. 박사급 머릿수만으로 우열을 단순 비교할 수 없겠지만, 삼성전자를 필두로 한 삼성그룹의 팽창세와 맞물려 경제연구소도 비약적인 성장 가도를 달려왔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스템(DART)을 보면, 삼성연은 지난 2003년(2004년 재무제표는 아직 제출되지 않은 상태) 경영자문용역(195억원), 인력개발용역(382억원), 출판수입(5억8천만원) 등 582억원의 영업수익(일반 법인의 매출과 비슷)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견줘 급여(129억원), 복리후생비(41억원), 교육훈련비(262억원) 등 영업비용은 607억원이었다. 삼성연은 28억원의 이자수입 등을 통해 영업 손실을 메움에 따라 7200만원의 당기순이익을 거뒀다.
같은 해 한국개발연구원은 이자수입 등을 합친 총수입으로 따지더라도 282억원(올해 예산으로는 294억원)에 그쳐 삼성연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현대경제연구원은 2003년 한해 101억원의 영업수익을 올려 살림살이 규모가 삼성연의 6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LG경제연구원은 연수기관인 인화원과 더불어 LG경영개발원으로 합쳐져 비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핵심 인력이나 살림살이 규모에서 삼성연은 국내 제1의 경제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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