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페이지 고백법과 변칙촌지 명품가방으로 돌아본 기자들의 촌지 문화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1월12일 심야 여의도의 한 소줏집. 4명의 현직 언론사 기자가 모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구치 가방이 그렇게 비싸?” “나도 선물이라고 샤넬 화장품이랑 고급 스카프 받은 적 있는데 그것까지 거절하기는 그렇더라고.” “JP는 기자들하고 밥 먹으면 발렌타인 30년산을 한병씩 들려줬잖아. 술에는 우리가 또 관대하잖아.” “따지고 보면 그것도 촌지지.” “근데 불편하면 그냥 조용히 돌려주면 되지 않나? 난 그러는데. 퀵서비스 비용은 깨지지만.” “솔직히 촌지 문제가 요즘에도 그렇게 심각한가? 거의 사라진 거 아냐?” “그러게. 이상호 혼자 ‘오버’한 거 같아.” “그렇게 말하지 마, 당신도 구악돼.”
두서없는 말들이 오갔다. 이들은 입사한 지 10∼12년차 정도로 지난해 12월27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구치 핸드백 선물’을 ‘양심고백’했던 이상호 기자와 엇비슷한 경력이었다. 궁금증은 한 군데로 모아졌다. 이 사건의 ‘야마’가 뭐냐. 내부 고발이냐, 개인의 공명심이냐.
내부고발이냐, 개인의 공명심이냐
<인터넷 한겨레>에 1월6일 낮 첫 보도가 뜬 뒤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언론계 촌지 관행에 대한 질타와 함께 이상호 기자의 고백에 대한 지지가 쏟아졌다. 다음날인 7일 문화방송이 자체 조사에 따라 변탁 태영 부회장과 식사하는 자리에 동석했던 이들이 강성주 보도국장과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 <신강균의 뉴스서비스 사실은>의 진행자인 신강균 차장이라고 밝히자 파문은 급속히 번졌다. 특히 이 두 사람이 변 대표와 학연으로 연결돼 있어 논란이 커졌다. ‘미스터리’ 운운하며 의혹을 부추겼던 일부 신문들은 진행자의 도덕성을 물고늘어지며 미디어 비평 자체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 “악의적 부풀리기”라는 질타를 받기도 했다. 여론은 ‘내부 고발’에 대한 공감대를 넓히는 쪽으로 무게가 쏠렸다.
그러나 언론계 내부에서는 미묘한 물결이 일고 있다. 가장 큰 것은 이상호 기자의 이번 ‘고발’이 유별나다는 주장이다. 촌지 관행에 대해 언론계도 많이 자정된데다, 부적절한 사례에 대해서는 노조 등을 통해 충분히 문제 제기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다는 논거가 이를 뒷받침한다. 한 종합일간지 정치부 기자는 “지난해 총선 전 한 정당 후보와 저녁식사를 할 일이 있었는데 동석한 기업인에게서 10만원 상품권이 두장 들어 있는 봉투를 받았다가 다음날 퀵서비스로 돌려보냈다”면서 “가끔 집으로 선물이 배달돼 오기도 하지만 받을 만하면 받고 정도가 지나치다 싶으면 돌려보낸다”고 말했다. 그는 “경력 10년차 미만의 기자들 사이에서 이런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경력 12년차인 한 방송사 기자는 “부득이한 술자리나 부득이한 촌지 수수란 없다”면서 “직업인으로서 품위를 지키느냐, 관행에 젖어 사느냐 개인이 선택할 문제일 뿐 강요되고 눈치 보는 관행은 거의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회사 직속 선배가 ‘알아두면 좋을 취재원’이라며 중견업체 간부와의 만남을 주선했을 때 “밥만 먹고 나오겠다”고 미리 밝혔고 그대로 했다고 한다.
문화방송 사람들은 당혹감 속에 이상호 기자의 문제 제기 방식에 대한 불만도 내비친다. 시사교양국의 한 PD는 “이상호 기자가 누구보다 주도 면밀하고 포털 수준의 자기 홈페이지를 관리하며 인터넷 속성을 잘 아는 사람인데 ‘파장이 커질 줄 몰랐다’고 말하는 건 이해되지 않는다”면서 “문화방송이 비교적 열린 조직인데 굳이 홈페이지를 통해 밝힌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 두해 전 문화방송에서는 한 국장이 성접대설로 곤욕을 치르다가 내부 총회를 통해 진위를 밝혔지만, 도의적 차원에서 자진 사퇴한 일도 있다. 문화방송이 이번 일을 신속히 조사해 관련자를 밝히고 징계한 것도 ‘과거와는 달라진 언론 풍토’의 단면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촌지는 날로 교묘하고 세련돼지는 것에 견줘 언론인들의 긴장 수준은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다. 돈봉투가 거의 사라졌다고 해서 촌지가 없어진 것은 아니며, 언론 풍토가 바뀌었다고 해도 취재원 관리를 명목으로 한 부적절한 관계는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편의 제공’을 빌미로 한 골프나 외유 접대, ‘가족 선물’을 빙자한 상품권이나 시착권(특정 브랜드의 특정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액면가 없는 상품권으로 주로 의류업계에서 주로 쓰임) 제공, ‘상품 홍보’를 명분으로 한 물품 제공 등은 가격이 높아도 거부감이 엷어지기 마련이다. 한 방송사의 차장급 기자는 “골프나 외유 등은 피하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지만 식사 자리에 최고급 양주를 들고 나와 마시고 한두병씩 ‘앵기’거나, 고향 친구가 재배한 거라며 고가의 건강식품 등을 주면, 솔직히 난감하다”면서 “따지고 보면 다 변칙 촌지인 셈”이라고 말했다. 한 종합일간지 차장급 기자는 “새 상품이나 공연 티켓을 사무실로 보내오는 것은 애교 수준”이라고 말했다. 자동차 구입비 편법 할인, 병원 이용 편의와 수술상품 할인, 호텔·콘도 이용료 할인과 예약 편의 등은 홍보를 넘어선 노골적인 특혜라는 것이다.
최고급 양주, 거절할까 말까
이번 사건의 발단처럼, 고발된 당사자와 고발한 기자가 최고급 음식점에서 만난 것은 그 자체가 촌지라고 볼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한 경제전문지 경력 15년차의 기자는 “우리가 만나는 ‘고급 취재원’이 대부분 기업 간부급 이상인데, 그 사람들 만나서 설렁탕만 먹고 헤어질 수 없는 게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한달 전 고발했던 기업 대표가 초청한 식사 자리는 누가 봐도 ‘앞으로 잘 봐달라’는 뜻이고 그 자리에서 명품이 전달된 것은 ‘선물’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언론계에서 크고 작은 촌지 관행은 끊임없이 불거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개신교단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는 <시사저널>의 여의도순복음교회 관련 보도에 대한 해명 기자회견을 마치고 교단 총무가 직접 나서 참석 기자들에게 “‘교통비’를 마련했으니 받아가시라”고 알리며 20만원씩이 든 돈봉투를 나눠줬다. 봉투를 나눠주던 중 부족해지자 급히 봉투를 만들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기자들은 받지 않거나 돌려줬지만, 교단쪽은 “안면 있는 사이에 너무 예민한 게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지난해 11월 한 의류업체는 신상품 출시기념 기자간담회에서 80만원가량 되는 남성 정장을 살 수 있는 시착권을 뿌렸다. 10월에는 종합일간지가 포함된 9개 언론사 경제부장들이 SKT로부터 중국 정보통신 박람회 출장을 명분으로 현지에서 골프와 술 접대를 받은 사건이 알려져 언론 노조와 단체가 자정선언문을 발표했다. 여름에는 한 자동차 회사가 신차 발표회장에서 참석자들에게 50만원이 든 돈봉투를 끼워 보도자료를 나눠줬다가 망신을 사기도 했다. 6월에는 농림부와 농업기반공사가 출입기자들의 중국 취재 경비를 지원하는 바람에, 청와대가 나서 관련 공무원들을 징계했다.
구체적 제재없이 양심에 맡긴다?
집단으로 뿌려진 촌지는 쉽게 노출되고 제재 강도도 세지만, 일대일로 음성적으로 이뤄진 거래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고급 취재원이 건넨 촌지는 쉽게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돈 때문만은 아니다. 한 종합일간지 기자는 “한 재벌기업 고위간부에게 20만원짜리 상품권을 받았을 때 기분도 좋지 않았고 욕심도 전혀 없었지만, 그 ‘유력 취재원’과의 관계를 고민하다가 돌려주는 데 이틀이 걸린 일이 있다”고 말했다.
각종 특혜나 편의 제공, 상품 홍보 등으로 세월 따라 촌지는 얼굴을 바꿔가며 ‘업그레이드’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대응은 개별 기자들의 양심과 판단에만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다. 언론사나 노조·기자협회의 윤리강령은 ‘품위와 소양’ 강조에 그친다. 일부 언론사는 취재원에게 제공받는 식사나 선물의 상한가를 명기해놓기도 했지만, 이 역시 현실에 적용되기 어렵다. 3만원을 넘어서는 접대는 받아선 안 된다고 정하고 있는 한국방송은 그 이상일 경우 돌려주거나 신고해야 한다는 방침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를 어겼을 때 어떻게 할지 구체적인 제재 방침은 모호하다.
일각에서는 기자의 양심과 윤리를 어차피 하나하나 규정에 따라 취급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있다. 윤리강령을 세분화하고 벌칙 조항을 강화한다고 해서 개별 행위를 일일이 통제할 수도 없고, 사람과 정보를 다루는 기자 업무의 특성상 양심과 윤리의 ‘마지노선’은 각자 정하고 지키는 게 오히려 현실적이라는 얘기이다. 하나 개인의 양심과 윤리를 개인의 잣대로만 판단하면 누구라도 자기 합리화의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결국 남은 방법은 공동체의 상식에 따르는 건강한 상호 비판과 감시이다.
문화방송의 한 기자는 “‘외부 충격적’으로 문화방송의 윤리기강 문제가 도마에 올랐지만, 전체 구성원이 긴장하는 좋은 계기가 됐다고 본다”면서 “다만 이 기자가 외부 고백에 앞서 당사자들에게 따끔한 문제 제기를 하고 그것을 가로막는 것에 맞서고 그 결과를 공개했더라면 상호 비판과 감시의 전범이 될 수 있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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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없는’ 조·중·동의 비난 빌미 준데 책임감… 결국 우리 언론사회가 성숙해질 계기
문화방송은 1월13일 강성주 보도국장, 신강균·이상호 기자 등 3명에게 ‘윤리준칙 위반’을 사유로 각각 정직 3개월과 2개월, 감봉 3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이 사건의 ‘고발자’이자 ‘징계자’인 이상호 기자는 13일 오후 <한겨레21>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회사의 처분을 달게 받겠다”고 말했다. 그는 “문제 제기 자체에는 후회 없다”면서 “비록 의도는 아니었지만 우발적인 계기로 알려지게 됐고, 그것이 일부 언론을 통해 악의적으로 부풀려지면서 문화방송이 응당 받을 욕 이상의 욕을 먹게 된 것에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파장이 커질 줄 몰랐나.
홈페이지에 글을 올린 것은 가장 낮은 수준의 문제 제기였다. 2단계는 회사 공채널에게 보고하는 것이고, 3단계는 출장에서 돌아온 뒤 노조와 기자회를 통해 하려고 했다. 사나흘 뒤에도 회사에서 아무런 피드백이 없기에 직속 간부에게 보고하고 글은 내렸다. 기사화될 줄 몰랐다. <한겨레> 기사를 미국에서 보고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미담 기사로 읽혔을 수 있지만 나에 대한 고발 기사다. <한겨레>가 조·중·동식 선정주의를 따른 것은 아닌지 실망스럽다. 어쨌든 내가 원인 제공자다. 이런 윤리 문제를 제기할 자격이 없는 조·중·동이 문화방송을 부패집단으로 호도하고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을 흔들어대는 빌미를 주게 돼 어이가 없다.
홈페이지에 글을 올린 이유는.
기자로서 자본의 공세에 대해 강력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쓴 양심고백이다. 구치 핸드백으로 대표되는 달콤한 유혹에 주목했다. 학연과 상사라는 미묘한 관계를 이용하는 치밀함도 주목했다. 일반적인 식사 자리였으면 그렇게 민감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홈페이지는 평소 회사 사람들이나 지인들이 주로 온다. 간접적으로 선배들에게 내 뜻이 전달되길 바랐다.
두 사람과 미리 상의할 수는 없었나. 이 기자보다 앞서 가방을 돌려줬다는데.
상의하려면 싸워야 할 것 같았다. 이미 두 차례 식사 자리 제안을 받았으나 거부한 상태였다. 그날 자리는 내 의사에 반해서 마련됐다. 박차고 나오지 못했던 건 솔직히 그동안 회사에서 늘 ‘통제 어려운 놈’ ‘데리고 있기 힘든 놈’으로 찍힌 것에 대한 부담도 있었다. 나도 이런 거 할 수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고 두 선배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선배들이 (핸드백을) 돌려보낸 줄은 몰랐다. 공채널로 보고할 때에는 출장에서 돌아오기 전에 시정되고 납득할 만한 조치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어떤 조치를 원했던 건가.
잔인한 질문이다. 두 분이 뜻하지 않고 낙마했고 곤란에 처하게 됐는데… 죄스럽다. 인사위에서 만났는데 눈물이 나도록 감사했다. 나를 위로해주고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준 선배들이다. 쟤들(조·중·동 지칭)에게 욕먹을 만큼 형편없는 분들 결코 아니다.
이 기자의 공명심이 지나치게 앞섰던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심사숙고한 결과다. 그런 말 듣기 싫어서도 그냥 넘어가고 싶었다. 먼저 나서지 않는 사람은 맞을 필요도 죽을 필요도 없다. 사람들은 뒤에서 쉽게 그런 말 한다. 난 해야 할 일 한 거다. 공명심이니 영웅주의니 하는 얘기에는 개의치 않는다.
문화방송 경영진 책임론이 급물살을 타고 있는데.
문화방송 종사자들은 모처럼 온 자성적 계기를 수포로 넘기지 않을 만큼 의식 있는 이들이다. 문화방송뿐만 아니라 우리 언론 사회가 성숙해질 계기라고 믿는다. 기자도 그렇지만 공영방송도 자본과의 관계를 제대로 설정하지 않으면 시장논리에 굴복된다. 먹먹하고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상징적인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미국 출장에서 정언유착 문제를 취재한 걸로 알고 있는데, 언제 방송되나.
모르겠다. 어디에 배치될지도 모르겠다. 회사에서 결정하는 대로 따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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