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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엔 교육철학이 있는가

등록 2005-01-12 00:00 수정 2020-05-02 04:24

이기준 부총리 사퇴파동이 주는 교훈… “능력있다”로 밀어붙였지만 사실과 다른 점 드러나

▣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이기준 교육부총리 파동의 근본 원인은 참여정부의 빈약한 교육철학에 있다.” 이 전 부총리 사태를 바라보는 교육계의 시각이다. 참여정부가 말로는 교육개혁을 외치고 있지만, 그 개혁의 내용을 무엇으로 채울지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은 없다는 지적이다. 이기준 파동은 이런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낸 사례다.

참여정부는 출범 당시 교육의 공공성 강화에 역점을 뒀다. 그러나 윤덕홍 전 부총리의 사퇴 이후 이 기조가 흔들리더니 이번 개각 과정에서는 시장주의에 입각한 신자유주의식 교육정책으로 슬그머니 변질됐다. 이는 미국식 기업형 연구대학 추종자인 이 전 부총리를 교육부 수장으로 발탁한 데서 입증된다.

청와대의 거짓말, 거짓말…

교육원칙의 부재는 곧바로 교육부총리 기준의 부재를 낳았다. 이는 이번 파동에 대한 청와대의 해명 과정에서 감지된다. 청와대는 이 부총리의 도덕성 문제가 하나둘씩 불거질 때마다 “이공계 출신이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공계에 희망을 줄 필요가 있다”는 엉뚱한 논리를 끌어댔다. 노무현 대통령도 이 부총리의 도덕성 시비가 일파만파로 번지자 이를 진화하기 위해 “대학은 산업”이라는 이상한 논리를 댔다.

이런 무원칙은 교육부총리에 대한 인사 검증 시스템의 부실로 이어졌다. 권력 실세들의 ‘사적인 관계’에 의해 천거된 후보가 내정 단계에 접어들자, 후보의 교육철학은 더 이상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후보의 윤리적·법률적 문제를 검증하는 시스템도 무뎌졌다.

청와대는 지난 1월4일 신임 교육부총리 발표 직후 도덕성 시비가 일자, “개혁 의지와 전문적 역량이 중요하다. 윤리적 하자는 그 다음 문제”라며 임용 강행 의지를 밝혔다. 정찬용 인사수석은 “이 부총리는 판공비 과다 지출, 사외인사 겸임, 장남 병역 의혹 등 흠이 있음에도 현 시점에서는 대학 교육을 개혁해서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인재를 길러내는 게 중요한 과제라는 판단에서 이뤄진 것”이라며 도덕성에 대한 검증이 완벽하게 이뤄졌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정 수석의 해명은 곧 거짓임이 드러났다. 청와대는 지난 1월7일 이 전 부총리의 장남이 한국 국적을 포기한 직후 이 전 부총리 소유의 땅에 자신의 명의로 건물을 등기한 사실이 드러나자 “인사 검증 과정에 본인과 배우자만 포함돼 아들의 건물 소유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며 검증 작업이 부실했음을 실토했다. 정 수석은 이 전 부총리의 사외이사 겸직 논란에 대해 “이 부총리가 서울대 총장으로 재직할 당시에는 사외이사 겸직이 법으로 금지돼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당시에는 분명히 법규상 사외이사 겸직이 금지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병완 홍보수석도 “이 부총리가 개인적 치부를 말하지 않았고, 집 한채 정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이 전 부총리는 충남 아산에 부동산을 소유하는 등 상당한 재력가로 드러났다.

청와대는 이 전 부총리의 도덕성뿐 아니라 개혁성과 능력에 대한 검증도 부실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청와대는 이 전 부총리가 도덕적으로는 흠이 있지만, 개혁 의지와 능력이 있어서 발탁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자료를 근거로 그렇게 판단했는지 공개하지 않았다. 청와대 출입 기자들이 인사추천회의록 등의 공개를 요청했으나, 프라이버시 침해를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오히려 이 전 부총리의 서울대 총장 시절에 대한 평가는 청와대의 설명과 정반대다. <한겨레21>이 입수한 지난 2001년 이기준 당시 총장에 대한 서울대 교수들의 ‘중간평가’ 결과도 청와대의 설명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서울대 교수협의회는 이 부총리가 총장에 취임한 지 만 2년이 지난 2001년 3월 전체 1623명의 교수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다. ‘서울대 발전을 위한 설문조사’라는 제목의 이 조사에 모두 937명(63.1%)의 교수가 참가했는데, 이 전 부총리는 모든 항목에서 ‘보통’ 이하의 점수를 받았다.

교수들은 이 전 부총리가 총장에 취임한 뒤 2년 동안 서울대가 대학 개혁 측면에서 국내외 다른 ‘명문’ 대학들에 비해 크게 뒤진 것으로 평가했다. 외국의 명문대학들과 우수교수 충원·연구 인프라 구축·재원 확충·우수학생 확보·총장 리더십·행정 효율화·구성원 복지 항목을 비교한 평가에서 교수들이 매긴 점수(평균)는 ‘훨씬 뒤졌음’과 ‘뒤졌음’의 사이에 해당하는 1.6∼2.3에 그쳤다(점수 범위 1∼7점). 국내 명문대학과의 비교에서도 이 점수는 2.1∼3.6(뒤졌음∼약간 뒤졌음)에 불과했다. 특히 전체 응답 교수들의 76%가 이런 ‘서울대 위기’의 원인으로 ‘총장의 지도력 부족’을 꼽았다. “이 부총리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서울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청와대의 설명이 무색한 대목이다.

이 전 부총리의 공약 이행에 대해서도 교수들은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특히 청와대가 이 전 부총리의 발탁 배경으로 내세운 대학 구조조정 능력과 관련이 있는 항목(학문간 시너지 효과·현실 진단·학문간 균형적 발전·민주적 의견수렴·학문 후속세대 육성)도 1.9∼3.1로 저조했다. 서울대 민교협 회장인 김인걸 교수(국사학)는 “서울대 개혁의 기본 방향은 기초학문과 응용학문의 공생이어야 하는데, 이 부총리는 당시 응용학문에 지나치게 치우쳤다”며 “이 과정에서 민주적 의견 수렴이 이뤄지지 않아 많은 반발을 샀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교수들도 “보통 이하”점수 줘

물론 이 평가에 대해 다른 견해를 나타내는 교수들도 있다. 당시 서울대 교수협의회장을 맡았던 최종태 교수(경영학)는 “국제통화기금(IMF) 이후 서울대학도 구조조정에 내몰리면서 교수들의 분위기가 안 좋았는데, 그런 분위기에서 설문조사가 이뤄져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온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려 900여명의 서울대 교수들이 모두 ‘분위기’ 때문에 이 전 부총리의 능력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지적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교육계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참여정부가 교육개혁에 대한 진지한 고민부터 먼저 할 것을 주문한다. 참교육학부모회 박경양 대표는 “교육개혁은 교육 주체의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민주적 의견 수렴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기준-김우식-안병영의 삼각관계?



이기준 부총리 파동에서 청와대가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것은 ‘정실 인사’라는 비난이다. 참여정부가 업적으로 내세우는 ‘투명한 인사 관행’을 하루아침에 망가뜨릴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정실 인사라는 비난에 대해 “인사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가동돼 이뤄진 것”이라며 “근거 없는 비난에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발끈하고 있다.
하지만 정실 인사 논란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 부총리 발탁에 ‘사적인 관계’가 작용됐다는 정황이 여기저기서 불거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이 있다. 김 실장은 이 부총리와의 ‘40년지기’ 관계에다 안병영 전임 부총리와의 불화설까지 더해져 논란의 근원이 되고 있다.
안 전 부총리와의 불화설은 지난 2000년 연세대 총장 선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행정학과 교수였던 안 전 부총리는 김 실장의 경쟁 후보를 지지했는데, 이때의 앙금이 입각 뒤에도 둘을 불편한 관계로 남도록 했다는 것이다. 안 전 부총리는 경질 사실을 개각 당일 오전에 통보받았다. ‘사고’를 쳐서 경질되는 게 아니라면 미리 언질을 주는 게 관례인데도 청와대는 아무런 배려가 없었다. 안 전 부총리의 한 측근은 “부총리 교체설이 한달 전부터 나오기 시작했고 그 진원지가 김 실장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도 비서실에서 아무런 해명이 없었다”고 전했다.
이해찬 총리도 이 부총리 발탁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총리가 교육부 장관 때 이 부총리는 서울대 총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 총리가 이 부총리의 학교 운영을 높게 평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총리실 관계자는 “총리가 천거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를 높이 평가한 것은 맞다”고 밝혔다. 교육계 인사들은 이 총리와 이 부총리의 ‘궁합’이 잘 맞는다고 평가한다. 시장주의에 입각한 신자유주의 방식의 교육 ‘개악’을 추진하는 데 좋은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실제로 이 부총리가 서울대 총장 때 만든 ‘세계적 연구중심 대학의 창조’라는 보고서를 보면 미국 사립대학의 기업형 연구대학을 대학 개혁의 모델로 삼고 있다. 이 부총리는 서울대를 이 모델로 변화시키려는 꿈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이 이 총리의 구상과 잘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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