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관세화론 등 협상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 따져야…전업농 대규모화만 추진하는 농정도 문제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정부가 과천청사에서 쌀 협상 최종 결과를 공식 발표한 날은 ‘공교롭게도’ 2004년 한해 마무리를 딱 하루 앞둔 12월30일이었다. 허상만 농림부 장관의 기자회견 형식으로 이날 발표된 협상 결과는 이미 간헐적으로 알려졌듯이 쌀 수입의 관세화를 미루되 의무수입물량을 올해 4%에서 앞으로 10년 동안 7.96%로 늘리도록 돼 있다. 쌀 의무수입물량(TRQ)의 10%를 ‘밥쌀용’으로 내년부터 시판한 뒤 2010년까지 이를 30%로 늘리는 내용도 이미 알려진 대로다.
7.96%는 눈속임?
정부는 쌀 협상 결과 직후 관세화 유예 연장을 위한 이행계획서(C/S) 수정안을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무역기구(WTO)에 보낸 데 이어 WTO 회원국들의 점검을 받은 뒤 최종안에 대한 국회 비준 절차를 거치는 대로 시행할 예정이다. 정부는 이번 쌀 협상을 비교적 성공적이라고 자평하는 분위기여서 협상안은 국회 비준을 거치기도 전에 마치 기정사실로 굳어진 듯 여겨지고 있다. 이 때문에 쌀 시장 추가 개방에 반발하며 재협상을 촉구하는 농민들의 목소리는 개방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무지의 소치 또는 억지스런 떼쓰기로 치부되는 분위기다.
쌀 협상 결과를 바라보는 관점의 다양한 편차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협상이 행정부 단계에서 끝났을 뿐이지 실제 시행을 위해선 아직 국회 동의 절차를 남겨두고 있다는 점이다. 헌법 60조에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또는 입법 사항에 관한 조약의 체결에는 국회의 사전 동의를 얻도록 규정하고 있다. 정부가 “이번 쌀 협상은 우루과이라운드(UR)의 후속 협상임에도 쌀의 관세화 유예 연장이라는 주요 내용 변화가 있기 때문에 국회의 비준 동의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비준동의서를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국회 동의라는 게 어차피 요식 절차고, 개방이 대세 아니냐’는 반문이 있을 법한데, 그렇게만 보기엔 이번 쌀 협상에서 드러난 문제가 너무 많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밥쌀용’, 질적으로 다른 개방
우선, 정부가 성공적이라고 자평하는 근거로 여겨지는 의무수입물량 7.96% 수준을 보자. 농업계의 암묵적 요구 수준이 6%, 정부가 갖고 있던 복안이 7%, 미국 등 상대편의 요구 수준이 15% 안팎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점에서 겉보기에 선방한 듯이 보이는 이 수치에는 함정이 있다. 비중을 따지는 잣대인 국내 쌀 소비량의 기준연도가 1988~90년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국내 1인당 쌀 소비량이 1990년 120kg, 95년 109kg, 2003년 83kg 등으로 크게 줄어드는 추세여서 의무수입물량 7.96%가 해당 시점의 소비량을 기준으로 할 때는 크게 늘어난다. 2014년에 이르면 의무수입물량이 국내 소비량의 13~14%까지 치솟을 것으로 추정된다. 7.96%라는 수치가 통상관료들의 협상 실패를 모면하기 위한 눈속임용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에 수입물량의 일부를 ‘밥쌀용’으로 시판할 수 있도록 하여 개방의 질적 수준이 달라졌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지금까지는 쌀을 수입하더라도 쌀과자 등 ‘가공용’에 그치던 것이 새해부터는 동네 할인점에서도 밥짓기 위한 외국 쌀을 살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외국 쌀을 국내로 들여올 때는 지금처럼 국영무역 방식을 따르고, 시중에 풀 때도 재정을 동원해 안전장치를 둔다 하더라도 국내 쌀값이 국제 가격의 4~5배에 이르는 점을 감안할 때 일정한 한계를 띨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허상만 장관은 협상 결과 발표 때 “WTO 농업협정문은 예외조처(관세화 유예)를 2005년 이후로 연장하기 위해선 회원국들과 2004년 말까지 협상을 종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며 “협상 상대국들과 50여 차례에 걸쳐 관세화 유예 조건을 최대한 유리하게 도출하기 위한 협상을 진행해왔다”고 강조했다. 협상의 상대방이 있는데다 시간의 제약 아래에서 벌어지는 ‘밀고 당기기’를 우리 쪽에만 마냥 유리하게 이끌 수는 없지 않느냐는 주장인 셈이다. 9 대 1의 싸움이고, 일종의 특혜인 관세화 유예를 못박아둔 것과 마찬가지인 채 진행한 협상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런 항변에는 일부 수긍할 점이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구심을 떨칠 수 없는 것은 협상이 벌어지는 내내 제기됐던 ‘자동 관세화론’을 둘러싼 여진 탓이다.
“협상 뒤 자기들이 다치지 않으려면…”
쌀 협상을 앞둔 2004년 초 각 언론매체에선 ‘9월 말까지 쌀 협상을 마무리짓지 못하면 쌀 수입은 자동적으로 관세화로 전환된다’는 요지의 이른바 자동 관세화론이 잇따라 제기됐다. 이 때문에 불리한 조건에서라도 협상을 마무리짓지 못할 경우 10월부터는 쌀 수입이 완전 개방(관세화)된다는 게 상식처럼 통했다. 분위기가 슬그머니 바뀐 것은 8월께 농림부와 농촌경제연구원에서 ‘관세화 의무론’을 들고 나온 때부터였다. 협상이 결렬되더라도 소정의 국내법적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곧바로 관세화되지는 않고 관세화해야 할 의무를 진다는 것이었다. 협상 시한은 어느 순간 9월 말에서 12월 말로 바뀌어 거론되기 시작했다.
정승 농림부 공보관은 “(농림부가) 공식적으로 자동 관세화론을 제기한 적이 한번도 없으며, 애초부터 관세화 의무론을 폈다”고 말했지만, 쌀 협상과 관련해 대단히 중대한 사안인 자동 관세화론이 상식으로 통하던 때도 한 차례의 해명자료가 나오지 않았던 점에서 여전히 의문을 떨치기 어렵다. 자동 관세화론이나 관세화 의무론이나 우리 쪽에는 불리한 카드를 스스로 꺼내는 것이란 점에서 의구심은 더욱 커진다(국제통상법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는 WTO 협정문 어디에도 자동 관세화론은 물론, 관세화 의무론의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협상이 깨지면 (우리에게 가장 불리한 선택인) 관세화가 불가피하다’는, 노름으로 치면 패를 보여주는 듯한 발언을 스스럼없이 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송기호 변호사는 이와 관련해 “협상 뒤 책임을 회피할 통로를 열어놓기 위한 것”으로 분석한다. “자동 관세화나 관세화 의무 논리대로라면, 어떤 협상 결과가 나오더라도 이것 아니면 더 불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통하게 된다. 협상에서 성공했는지, 실패한 것인지를 검증할 기회를 원천 봉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이호중 정책보좌관(강기갑 의원실)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펴고 있다. “쌀 협상이란 게 공무원들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잘해봐야 욕먹을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협상 뒤 자기들이 다치지 않으려면 WTO 협정문에 대한 유권해석을 보수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곧 협상의 목표치를 최대한 낮추는 것으로 이어진다. 농정 최고 책임자의 뚜렷한 농정 철학이 없는 상태에서는 이런 보신주의가 판을 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는 물증으로 뒷받침되는 순도 100%의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고, 정황증거에 따른 추론일 뿐이다. 그럼에도 미흡한 협상 결과와 맞물려 농민들의 절망감을 키우고 있다. 더욱이 정부는 이런 논란을 판가름하는 데 어느 정도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협상 전문’(협상팀이 본국에 보고한)의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농업계에서는 이 때문에 정부 차원의 협상이 매듭됐다고 해서 사안을 종결지을 수는 없으며, 국회 비준에 앞서 협상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과 책임 소재를 국회 청문회 등을 통해 따져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농지법 개정안, 이농만 부추길 수도
쌀 협상의 과정과 결과 이상으로 농민들을 맥빠지게 하는 것은 전반적인 농정의 난맥상이다. 지난 12월 국회를 통과한 개정 농협법에서 농협중앙회의 신용·경제 부문을 분리하는 시기를 농협중앙회에 맡김에 따라 농협의 경제사업 기능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일선 농업계의 숙원을 저버린 게 한 예다. 이는 ‘1구역 1조합’ 조항을 삭제해 농협의 경쟁을 통한 지역조합의 통폐합을 유도하려던 방안이 무산된 것과 함께 농민의 이익을 외면하고, 농협쪽의 로비가 작용한 것이라는 의혹을 낳았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농지법 개정안을 둘러싼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도시민이 영농계획서를 제출하고 ‘농지취득자격증명’을 받아 농지를 구입한 뒤 이를 농업기반공사를 통해 전업농에 5년 이상 임대할 경우 농지를 무제한 매입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뼈대로 한 이 법 개정안은 비농업인의 농지 소유 합법화로 토지 투기를 조장한다는 비난에 직면해 있다. 도시 자본을 끌어들여 농촌을 활성화한다는 애초 취지와 달리 도시 근교의 땅값만 올려 되레 이농을 부추기게 될 것이란 점 때문이다. 1989년 ‘토지공개념위원회 연구보고서’를 빼고는 국내 토지소유 구조에 대한 실태가 전혀 공개되지 않고 있는데다 변칙적인 토지 투기가 성행하고 있는 현실 탓에 이런 걱정을 기우로만 돌리기 어렵다.
이 때문에 쌀 개방 확대에 맞춰 논농업직불제 확대 등 정부 나름의 대책을 내놓고 있음에도 농정에 대한 신뢰도는 자꾸만 추락하고 있다.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은 “쌀 전업농의 대규모화를 지향하는 정부의 농업 구조정책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말했다. 농지은행을 통해 무료로 임차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요건을 충족시키기 않은 상태에선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이다. 김 전 장관은 “전업농 규모화에 매몰되기보다는 다양한 경영체를 육성하는 쪽으로 방향을 맞춰 규모와 상관없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을 받을 수 있게 해야한다”고 말했다. 농정이 농촌이 망해가는 속도를 늦추는 데 머물고 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는 불가능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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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계획서 수정안은 3개월 안팎으로 예상되는 WTO 회원국들의 검증 기간을 우선 거치게 된다. 이 기간에 정부는 기술적·절차적 사항과 양자 차원의 부가적 사항에 대한 협의를 계속해 나라별·쟁점별 협의 사항을 다듬어 만든 최종안에 대한 국회 동의를 묻게 된다. 국회 비준을 받게 되면 정부 협상 결과대로 쌀 시장의 개방 폭이 단계적으로 늘어난다.
정부 계획대로라면 쌀 수입의 양적 확대와 함께 새해 6월께부터 수입쌀이 시중 판매될 것으로 보인다. 수입쌀은 앞으로도 국제입찰 등 국영무역을 통해 들어오게 되며 이 중 ‘밥쌀용’은 공매를 통해 도매업자에게 방출된다. 이에 따라 우선은 가격이 싼 쌀을 사려는 식당 등 업소용으로 공급될 가능성이 높다.
할인점 등 대형 유통망의 경우 농민 반발을 우려해 당분간 여론 추이를 살필 가능성이 높아 일반 소비자들이 직접 구매할 수 있는 시기는 약간 늦어질 수 있다.
새해에 시판될 수입쌀 물량은 전체 의무수입쌀의 10%인 2만2558t이다. 수입쌀 중 밥쌀용 시판물량이 30%로 늘어나는 2010년에는 이 규모가 9만8193t으로 늘어난다.
수입쌀의 방출이 늘어날수록 국내 쌀에 대한 수요가 줄어드는 만큼 국산 쌀값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정부가 시판용 쌀을 공매할 때 높은 가격을 써내는 업체에 물량을 배정하는 방식으로 국내외산 쌀값의 가격차를 줄인다는 방침이지만 일정한 가격차는 불가피해 보인다.
물론, 이는 정부의 계획대로 일정이 진행될 경우이며, 쌀 협상안이 국회 비준을 받지 못할 경우 사정은 달라질 수 있다. 정부는 비준 실패는 곧 쌀의 관세화를 뜻한다고 주장하지만, 일부 통상 전문가들은 사실과 다르다고 밝히고 있다. WTO 협정문 어디에도 협상 결렬 뒤의 관세화 여부에 대한 명시적인 규정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국회 비준 실패 뒤의 상황은 유동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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