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수 사형 43주기를 맞아 다시 돌아본 이 땅의 ‘비양심적’ 법관들
▣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헌법 제103조의 법관의 양심에 관한 조항이다. 이는 법관이 법원 안팎의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존엄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우리 사법부가 반세기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신뢰를 받도록 지탱해줬다. 하지만 군사독재 시절 공안기관의 간첩조작 사건에서 그 ‘양심’은 종종 실종됐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 비난의 주인공들은 이후 대법관 등의 요직을 거쳐 우리 사법부를 대표하는 원로로 추앙받고 있다.
‘대쪽’ 이회창 총재도 참석지난 12월21일로 43주기를 맞은 조용수 사장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법관의 양심 논쟁을 일으킨 대표적 사건이다. 5·16 군사쿠데타의 혼란기에 발생한 그의 죽음은 이후 공안기관의 간첩조작 사건에서 법관의 역할을 평가하는 기본 틀로 자리잡았다. 는 1961년 2월13일 창간된 신문으로, 평화통일을 주장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이해를 대변하는 논조로 발행 3개월 만에 3대 일간지로 급부상하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신문이다. 그러나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권은 를 ‘빨갱이 신문’으로 몰아 쿠데타 이틀 만인 5월18일 이 신문을 폐간하고 발행인인 조 사장을 특수범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내용상으로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시켰다.
조 사장의 유족들은 당시 혁명재판부에 심판관으로 참여했던 법관들이 법관의 양심을 저버리고 군사정권에 협력했다고 비난한다. 조 사장의 친동생인 용준씨는 “군인이었던 재판장은 제쳐놓고라도 민간인 신분이었던 심판관들은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여줬어야 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당시 혁명재판소에 참여했던 3명의 심판관에는 법조계에서 ‘대쪽’으로 추앙받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포함돼 있었다. 26살의 ‘신출내기’ 판사였던 이 총재는 혁명재판소 심판2부에 ‘차출’돼 사건의 1심 재판에 참가했다.
법관의 양심에 따라 판결했다?당시 혁명재판소가 조 사장에게 씌운 혐의는 세 가지다. 북한과 연관이 있는 조총련계의 자금을 받아 를 창간했고, 사설 등을 통해 반국가단체인 ‘북괴’를 이롭게 했으며, 이적단체인 사회대중당 간부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 가지 혐의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사설 등으로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주장은 당시 의 논조를 볼 때 사실과 크게 달랐다. 사건 진상규명대책위 김자동 위원장(당시 기자)은 “는 북한을 ‘북괴’라고 표현하는 등 김일성 정권의 반민족적 행위를 가차 없이 비판했고, 통일에 소극적인 장면 민주당 정권도 비판했다”며 “그런데도 심판관들이 논조를 문제 삼은 것은 신문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판결을 내렸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당시 실렸던 사설들을 보면 재판관들의 판단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김일성 정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 민족끼리의 통일 운운하며 마치 자기들만이 민족이익의 유일한 대변자인 것처럼 선전하고 있지만, 미소 양국의 냉전 전략을 일방적으로만 추종해왔다는 점에서 그들은 남한의 보수반동 정권과 조금도 다름없는 반민족적 과오를 범해왔다. …김일성 정권이 진심으로 민족자주 정신에 입각한 평화적인 통일을 바란다고 자처한다면 남한에서와 마찬가지로 북한 동포들에게도 통일 문제를 비롯한 모든 정치 문제에 대한 의견을 발표하고 그 의견에 따라 활동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1961년 5월11일 ‘북한 정권은 먼저 민족자주 정신에 서 있다는 증거를 보여라’)
“자유당 정권은 ‘북진통일’이라는 반통일론을 뚜렷이 내걸었다는 의미에서 차라리 민주당 정권보다는 솔직했다. 그런데 지금 장면 정부는 ‘용공적인 통일보다는 차라리 분단된 상태가 낫다’는 사실적인 반통일론을 내걸고 있으면서 입으로만 평화, 민주, 자유에 입각한 통일을 촉진하고 있는 것으로 가장하고 있다….”(1961년 4월22일 ‘통일외교에 실패한 장 정권은 물러나야 마땅하다’)
북한계 자금으로 를 창간했다는 혐의도 당시 돈을 건넨 것으로 지목된 재일동포 이영근(1990년 사망)씨가 북한과 무관한 인사라는 점에서 전혀 신빙성이 없었다. 이씨는 박정희 정권에 철저히 협력해 조총련계 재일동포의 추석성묘단 방문을 성사시켰고, 사망한 뒤에는 노태우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을 정도로 ‘반북’ 인사였다. 조용수 사장은 재판에서 자신의 혐의를 조목조목 반박했으나, 혁명재판부는 이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 사장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당시 재판은 공개재판의 원칙 등 재판의 기본을 완전히 무시한 요식행위에 불과했다”며 “심판관들은 재판이 끝난 뒤에 ‘군인들의 외압이 있었다’고 변명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전 총재를 비롯해 당시 재판에 참가한 법관들은 “법관의 양심에 따라 판결했다”는 태도를 밝히고 있다. 이 전 총재는 지난 2002년 대선 때 이런 ‘전력’이 논란이 되자 한 인터넷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서울지법 판사 중에서 연소자 순으로 뽑혀 혁명재판부에 말석으로 참가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5·16이라는 특수한 상황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당시 똑같은 상황에서 이 전 총재와는 다른 선택을 한 법조인도 있었다. 주종환 참여사회연구소 이사장은 “소설가 한무숙, 한말숙씨의 오빠인 고 한복 변호사는 혁명정부로부터 혁명재판소 재판관으로 일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끝내 이를 거절했다”며 “그는 그 대가로 괘씸죄에 걸려 6개월간 감옥살이까지 했다”고 밝혔다.
민복기 대법관 등 인혁당 판결의 주역이 전 총재와 함께 심판관으로 참여했던 강현태(67) 변호사는 지난 12월22일 과의 전화 통화에서 “당시 재판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됐고, 군인 등의 외압에 관계없이 양심에 따라 판결했다”고 밝혔다. 강 변호사는 “판결은 5명(재판장, 법무사, 심판관 3)이 다수결로 결정했는데, 누가 유죄 의견을 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조용수 사장은 2심이자 최종심(심리를 열지 않고 서류로만 판단하는 재판)인 혁명재판소 상소심에서도 사형이 선고돼 1961년 12월2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김자동 위원장은 “ 사건은 이후 중앙정보부가 해외 인사를 간첩으로 선정해놓고, 반체제 인사를 그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몰아 간첩죄로 처벌하는 간첩조작 사건의 효시였다”며 “피해자들은 법관의 양심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지만 그 기대는 여지없이 깨져버렸다”고 탄식했다.
사건 뒤 13년 후에 발생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도 법관의 양심 논쟁에 불을 지폈다. 유신헌법의 긴급조치에 따라 군사재판으로 졸속 진행된 1, 2심 결과를 당대 최고의 법률가인 대법관들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당시 최종심에는 대법원장이었던 민복기(91) 대법관을 비롯해, 이후 차례로 대법원장을 역임한 이영섭(사망)·이일규(84) 대법관과 헌법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주재황(86) 대법관 등 ‘쟁쟁한’ 법관들이 참가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1, 2심 재판은 중앙정보부의 살인적인 고문 논란을 논외로 치더라도 재판 절차상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우선 변호인들에게 반대심문의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고, 증인신청을 할 수 있는 기회도 박탈했다. 이 때문에 변호인과 피고인들은 2심이 끝나도록 자신의 혐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또 재판은 피고인별로 1명의 가족만 참관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됐다. 재판부는 국방부 출입기자들의 취재를 허용하면서도 재판 내용을 메모하거나 방청한 내용을 보도하는 것을 금지했다. 피고인들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제시된 증거도 졸렬하기 짝이 없었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주범’으로 몰린 고 도예종씨의 경우 이라는 책이 이적표현물로 지목됐다. 그러나 이 책은 러시아혁명의 비인도성과 몰인간성을 비판한 책으로 미국의 한 우익인사가 쓴 책이었다.
당시 군법회의법(제359조)은 피의자한테서 고문과 폭행, 협박, 신체구속의 방법을 동원해 받아낸 진술은 유죄의 증거로 채택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피고인들이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음에도 도씨를 비롯한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피고인의 진술 제한과 변호인의 심문권 박탈, 비공개 재판 등으로 피고인의 권리가 침해됐다는 주장에 대해 “법정의 수용 능력을 고려한 것으로 위법이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또 고문을 바탕으로 작성된 조서의 불법성을 제기한 것은 “증거의 취사 선택과 사실 인정은 심판관의 전권”이라며 배척했다. 박홍규 교수(영남대 법학)는 “당시 법원은 인권보장과 적법절차 준수라는 형사소송법의 기본 이념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라며 “법관들이 양심에 따랐다면 당연히 파기 환송됐어야 할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고문 당했다는 주장도 묵살그러나 당시 최종심에 참가했던 이일규 전 대법원장은 과의 전화 통화에서 “법관의 양심에 따라 판결했다”고 밝혔다. 이 전 법원장은 “30년 전 사건이라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정당한 절차에 따라 재판이 진행된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는 외압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다른 대법관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없었다”고 밝혔다. 이 전 법원장을 비롯한 13명의 대법관들은 그 뒤 사법체계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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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총재의 연루 의혹을 밝힐 수 있는 기회는 김대중(DJ) 정권 출범 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찾아왔다. 사건이 군사독재 정권 시절 공안기관의 ‘만행’을 밝힐 수 있는 가장 대표적 사건이기 때문에 DJ 정권의 의지가 강했다. 하지만 그 기회는 ‘실현’되지 않았다. 의문사 진상규명 사건의 시효가 1974년 유신정권 이후로 한정됐기 때문이다. “DJ 정권 출범에 공헌한 JP를 보호하기 위해 타협한 거죠.” 김자동 진상규명대책위원장의 분석이다.
하지만 대책위는 재심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 지금의 대법관 구성을 볼 때 재심이 받아들여질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과거사진상규명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과거사진상규명법은 시효를 반드시 1945년 광복 이후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5·16 군사정부가 저지른 만행을 제대로 밝혀낼 수 있습니다.” 당시 ‘혁명정부’는 폐간 절차도 제대로 밟지 않고 재산을 ‘강탈’했다. 당시 돈으로 5천여만원에 이르는 사옥과 윤전시설 등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용준씨는 “과거 민주주의를 파괴했던 세력과 그에 동조한 ‘부역자’들이 지금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하고 있다”며 “과거사가 제대로 규명되면 국보법 폐지에 여론의 힘이 실릴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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