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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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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드르한데 왕짜증이 난다

등록 2004-12-28 00:00 수정 2020-05-03 04:23

새롭게 단장한 민자역사들은 얼마나 편리해졌나… 서울·용산·영등포·동인천·수원·산본역사 입체르포

▣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높은 천장, 시원한 통유리, 환한 불빛, 곧게 뻗은 에스컬레이터, 반질반질한 타일바닥, 깨끗한 화장실. 새롭게 바뀌어가는 철도역의 풍경이다. 민간자본을 유치해 건물을 신축하는 민자역사. 공사가 끝난 직후 대합실이 환해지고 깨끗해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겉보기만큼 철도 이용객도 편리해진 걸까. 늘어난 쇼핑 공간 만큼 줄어든 것은 무엇일까. 줄어든 공간만큼 부족해진 기능은 무엇일까.

12월16일 민자역사 건립 초창기에 세워진 동인천역을 찾았다. 최초의 민자역사인 서울역에 이어 한달 뒤인 1989년 4월 문을 연 동인천역은 본래 지역상인들이 출자한 동인천백화점이 있던 곳이다. 개찰구를 빠져나오니 지하 아케이드가 입을 벌리고 있다. 전철역을 드나드는 사람들, 지하상가를 오가는 사람들로 골목길만 한 너비의 역 앞 통로가 비좁다. 전철역 바로 옆엔 백화점 대신 n조이쇼핑몰이 서 있다. 구제금융기를 거치며 백화점이 망하자 이곳은 쇼핑매장(지하 1층, 지상 1~2층), 불가마사우나(3층), 경륜·경정장(4~5층), 웨딩홀(6층) 등으로 분화됐다.

하지만 2000년부터 발생한 적자는 그칠 줄 모르고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19억원의 적자가 났고, 올해 3/4분기까지만 따져도 6억원에 이른다. 동인천역 주변의 상권이 남동구쪽의 신도심에 밀리면서 n조이쇼핑몰 점포의 3분의 1이 분양이 안 된 상황이다. 여기에 2003년 12월부터 시작한 동인천역 신축 공사 때문에 전철 이용객들이 상가가 붙어 있는 기존 지하통로 대신 지상의 임시 역사를 드나들기 시작하자 지하통로 주변의 상인들은 불만이 하늘 끝까지 쌓였다. 동인천역 관계자는 “장사가 잘 안 되자 민자역사쪽은 전철 이용객이 다니는 공용통로까지 침범하면서 물건을 파는데 막을 길이 없다”며 “법이고 뭐고 무슨 공간이든 장사만 되면 팔아야 한다는 심리가 팽배해 있다”고 털어놓았다. 상인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동인천역은 길이 막힌 지하통로에 기존의 매표소를 그대로 운영하고 있다. 매표소까지 문을 닫으면 사람들이 아예 오지 않는다며 상인들이 매표소를 그대로 열어두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수익을 우선순위로 따져야 하는 민자역사가 오히려 비효율의 논리로 가고 있는 셈이다. 전체 민자역사 면적 중 대합실과 사무실을 포함한 역무시설이 5.8%밖에 되지 않는 이곳은 오히려 철도역이 쇼핑몰 주인의 눈치를 보며 셋방살이를 하는 꼴이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셋방살이인가

적자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동인천역이 ‘난전’처럼 변한 풍경을 보고 난 뒤 이번엔 민자역사 중 최대 수익을 내고 있는 영등포역을 찾았다. 영등포역은 1991년 서울역·동인천역에 이어 민자역사로는 세 번째로 건설됐다. 지하 5층·지상 9층 규모로 연면적 13만4074㎡에는 역무시설 12%(1만6906㎡)를 뺀 나머지 공간을 롯데백화점이 상업·주차시설(11만7168㎡)로 쓰고 있다. 현재 건설 중인 복합상영관이 문을 열면 역무시설 비율은 이보다 줄어들게 된다.

영등포역에서 백화점과 역무시설을 나누는 공간은 3층에 나 있는 공용통로이다. 공용통로를 사이에 두고 백화점과 대합실이 나뉘어 있다. 철도노선 탓에 단절된 동서방향의 길을 지나려면 행인들은 이 공용통로를 지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용통로는 24시간 동안 행인에게 개방될 의무를 지니는 공공의 공간이다. 그러나 91년 백화점이 문을 연 뒤 이 공용통로에선 ‘사랑의 바자회’라는 명목으로 백화점 바겐세일이 연일 벌어졌다. 11월24일, 12월18일 두 차례 영등포역을 방문했을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백화점이 ‘사랑의 바자회’라고 내세운 이유는 여기에서 거둔 수익금 중 매달 200만원을 떼어 서울시 지체장애인협회 영등포지부에 후원금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만원을 위해 연중 ‘사랑의 바자회’를 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2004년 2월 영등포역(철도청)과 롯데백화점(롯데민자역사)이 맺은 ‘공용통로 사용에 대한 협약서’를 보자. 이 협약서를 맺은 것은 백화점쪽이 공용통로에서 바자 행사를 관례적으로 벌여오는 것에 대해 민원이 잇따르자 철도청이 뒤늦게나마 이에 대한 사용료를 물리기 위해서였다. 협약서 내용을 보면 △자유통로는 한달 동안 사용 기간을 12일 이내로 하고 바겐세일 및 특별한 경우엔 별도로 협의하여 기일을 연장할 수 있으며 △사용 면적은 180㎡, 사용 수수료는 1일 30만8천원으로 한다고 돼 있다. 그러나 공용통로는 원칙상 상행위가 금지돼 있을뿐더러 상행위에 대해 철도청이 사용료를 받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다. 영등포역 또한 이런 ‘회계상의 문제’를 인식해 올해 공용통로에서 발생하는 예상 수익 6천만원(1년 동안 200일 기준)을 ’잡비’ 항목에 포함시키고 있다.

역세권 개발 차원에서도 민자역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철도청이 민자역사로 전환한 지역은 대부분 도심 상업지에 역사가 있어 사업성이 높은 곳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복잡한 도심지에 대규모 민자역사를 추가로 얹다 보니 주변 지역에 교통혼잡을 가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원역사의 경우 애경백화점 주차장과 따로 연결되는 동서방향의 고가도로를 2개층에 걸쳐 건설하는 대규모 공사를 했다. 그러나 민자역사 중 가장 덩치가 큰 용산역사는 이런 ‘기본’도 무시한 채 완공돼 주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용산역사 주변 교통, 해도 너무한다

“용산역사 교통대란 주범 현대역사는 각성하라!”

12월17일 서울 용산역 옆 웨딩홀에는 교통혼잡에 항의하는 펼침막이 나부끼고 있었다. KTX와 호남선의 시발역이자 1호선 정차역인 용산역 일대는 앞으로 미군기지 이전 등 주변 지역의 개발 여건이 청색신호를 띠면서 서울의 새로운 도심으로 주목받는 곳이다. 개발 수요를 예측해 지어진 용산역은 역무시설도 최대(3만4240㎡), 상업시설도 최대(17만570㎡) 규모를 자랑한다. 지하 3층, 지상 10층의 건물은 복합상영관, 대형 할인마트, 전자용품 전문점, 의류상가, 식당가 등이 들어서 주변 상권을 빨아들일 흡입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 거대한 건물 주변의 도로 사정은 엉망이다. 평일 낮 시간에도 역사 주변엔 차량들이 뒤엉켜 있었다. 펼침막이 붙어 있는 웨딩홀의 운영자인 김시훈씨는 분통을 터뜨렸다. “용산역사가 들어서면서 우리 가게 앞 도로를 일방통행로로 만들었고 교통체계도 바꿨다. 그러자 용산역 주변 건물을 이용하는 차량들이 모두 가게 앞 도로를 돌아가게 됐고, 여기에 서부이촌동으로 가는 차량과 용산역 주차장을 드나드는 차량들이 모두 1차선 길로 쏟아져 들어온다.” 김씨는 “심지어 일요일 결혼식에 오는 주례자가 웨딩홀을 눈앞에 둔 채 30분 동안 꽉 막혀 있다 아예 차를 버리고 뛰어들어오는 일까지 있었다”고 전했다. 용산역 주변 한강로3가 주민들은 교통난에 항의하며 건교부에 주민 진정을 낸 상황이다. 용산역 주변 교통 사정이 이렇게 심각해진 이유는 서울시 도시계획법보다 상위법인 ‘고속철도건설촉진법’ 적용을 받으면서 인·허가 과정이 간소해졌고, 이 때문에 교통대책 마련에 상대적으로 느슨했던 까닭이다.

장애인들, 미로를 헤치고 엘리베이터로

장사를 하는 내부는 깔끔하지만 바깥엔 상대적으로 인색한 것도 민자역사의 특징이다. 2004년 1월1일 준공식을 한 서울역은 100년 만에 새 단장을 했다며 기대를 모았다. KTX의 출발·종착역인 서울역은 활시위에서 화살이 튕겨나가는 듯한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설명이 붙기도 했다. 대우빌딩과 마주 보는 서울역 앞쪽엔 택시·버스 정류장이 가지런히 정비돼 있다. 하지만 정작 화살 끝에 해당하는 서울역 뒤편엔 공항 리무진 정류장만 표시돼 있을 뿐이다. 택시 정류장 간판은 까닭 없이 고속철도 사무실 정문에 기대 있고, 정작 택시들은 이곳저곳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서울역과 롯데마트 사이에 나 있는 동서방향 보행자 통로를 지나려면 두번씩이나 주차장을 출입하는 차들과 마주쳐야 한다.

민자역사가 쇼핑객 위주로 지어지다 보니 공공시설에는 필수적인 장애인 편의시설이 소홀해지는 경우도 있다. 2003년 2월 문을 연 수원애경민자역사는 일년 뒤인 2004년 초에 철도 이용객을 위한 장애인 엘리베이터를 추가로 설치했다. 불편을 호소하는 장애인들의 민원이 빗발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래 설계안에 없던 승강기를 놓다 보니 자리가 궁색해졌다. 수원역 건너편에서 국철을 타려면 엘리베이터를 모두 세 차례 타야 한다. 길 건너편에서 육교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면 육교를 지난 뒤 다시 승강기를 타고 땅 위로 내려서야 한다. 여기에서 10m쯤 가면 역을 이용하는 장애인을 위한 엘리베이터가 백화점 주차장 끄트머리에 붙어 있다. 세 번째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면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을 지나 또다시 꼬불꼬불 역사 복도를 300m 이상 돌아가야 비로소 전철 대합실에 이른다.

한숨의 끝은 산본역에서 터져나왔다. 지하철 4호선 산본역에 내리자 흰 블라인드 사이로 경륜장 간판이 빼꼼히 보인다. 지하철 통로와 마주하고 생겨난 경륜장이 아이들의 교육상 좋지 않다는 지적 때문에 미봉책으로 블라인드를 달았다. 94년 철도청 자회사로 출범한 지상 3층의 산본쇼핑센터(산본백화점)는 부도가 나고 자본금이 잠식되는 등 수난이 끊이지 않았다. 백화점이 망하자 상인들은 벽을 뜯어내고 통로를 훤히 드러낸 곳에 칸칸이 자리를 잡고 식당·꽃집·옷가게 등 장사를 시작했다. 김낙현 철도노조 공공성확보팀장은 “지난 9월까지만 해도 통로마다 노점상이 꽉꽉 들어차 있었는데, 군포시와 철도청이 용역을 동원해 노점상을 쫓아내고 정리했다”고 말했다. 구제금융 위기 직전인 97년 11월 문을 연 산본쇼핑센터는 영업난에 시달리다 2001년 경매에 넘어갔다. 현재는 우여곡절 끝에 한 개발회사가 빚을 떠안고 사들인 상태다. 이 회사는 내년 7월 어린이용품 전문 백화점을 차릴 계획이라고 하지만 어린이 백화점이 개장한 뒤에도 경륜장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을 예정이다.

“어떻게 하면 지갑을 열게 할까”

민자역사 취재 도중 만난 한 역장은 씁쓸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철도청은 직원들에게 경영 마인드를 키우라고 합니다. ‘A역에 내리면 B백화점을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B백화점에 오려면 A역에서 하차하라’는 식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죠. 역의 경쟁력이 어떻게 하면 승객들의 지갑을 열게 할 수 있을까에 따라 결정됩니다.” 곳곳에 상품 진열대를 늘어놓고 손짓하는 곳. 안 사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곳. 공공재인 철도역사는 공간을 상품화하는 전쟁의 최전선에 놓여 있다.



수익성 700점, 공공성 300점!

그동안 철도청이 민자역사 사업자 골랐던 기준… 내년부터는 철도공사 직영체제로

80년대 후반 철도역의 현대화와 경영 개선을 위해 도입된 민자역사는 서울역·동인천역을 포함해 9곳이 운영 중이다. 신촌·왕십리·창동·청량리역은 공사를 시작했거나 올해 말까지 착공을 눈앞에 두고 있으며, 의정부역·평택역·성북역은 지자체의 인·허가 처리 중이거나 사업 주관자를 물색하고 있다. 산본역쇼핑센터의 경우엔 철도청이 지분 25%를 지니는 민자역사와 달리 지분 40% 이상을 가지는 철도청 자회사로서 94년 설립됐다. 이들 역 중 가장 성공적인 모델은 영등포역으로서, 영등포롯데역사는 올해 3/4분기까지 265억원의 수익을 냈다. 다음으로는 대구롯데(45억원), 안양역(성일개발·30억원), 부천역(지역상공인·20억원), 부평역(대아개발·15억원)이 뒤따른다. 수원애경역사, 서울한화역사, 용산현대역사는 아직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다.
말 그대로 민간자본을 유치해 짓는 민자역사는 1984년 ‘국유철도 재산의 활용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지면서 법적 근거를 지니게 됐다. 이후 철도청 적자 운영에 대한 우려가 심화되면서 1995년에는 이 법이 폐지되고 상대적으로 경영 개선의 측면을 강조한 ‘국유철도 운영에 관한 특례법’이 새롭게 제정됐다. 이에 따라 80년대 후반부터 철도청은 낡거나 비좁은 역사 중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역을 골라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사업 주관자를 공개 모집하여 민간자본을 유치해왔다. 철도청이 사업 주관자를 고르는 과정에서 선정기준 평가항목 및 요소별 배점 기준을 보면 총 배점 1천점 중 700점이 수익성과 관련된 항목이고 공공성과 관련 있는 역사시설 및 건축계획에 관한 것은 300점을 차지한다. 민자역사에서 수익성이 공공성보다 앞설 수밖에 없는 이유다. 민자역사의 자본금 지분도 철도청은 25%밖에 없다. 나머지 75%는 사업 주관자와 일반 출자자가 가진다.
철도청의 ‘민자역사 건립에 관한 업무처리 규정’에 따르면 전체 역사 면적 중 대합실·역무원 사무공간 등 역무시설은 10%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동인천역을 제외한 나머지 민자역사의 역무시설 규모는 10~12%를 차지하고 있다. 출자회사는 자체 부담으로 역무시설과 상업시설을 갖춘 복합역사를
짓고 난 뒤 역무시설은 국가에 헌납하고 나머지 영업시설에 대해서는 30년 동안 소유·운영한 뒤 기부채납하게 된다.
2005년 1월 공사 출범을 앞둔 철도청은 사업 구조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민자역사 방식을 버리고 철도청이 역사를 직영하기로 결정했다. 철도청 사업개발본부 운영기술과 신동선 과장은 “그동안 민자역사 사업을 추진하면서 지나친 상업주의가 논란이 되면서 철도청 직영을 택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철도청은 지난 9월 역사 직영사업을 맡는 자회사 철도개발주식회사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경영 합리화를 명분으로 내건 철도공사가 기존의 민자역사보다 얼마나 더 공공성을 염두에 둔 사업 방식을 채택할지는 불확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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