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핵 포기 전제’ 여전하지만 미국 대외정책에 미세한 변화… 6자회담의 앞날이 궁금하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표류가 장기화될 조짐이다. 한국을 비롯한 당사국들이 북한을 회담장에 불러 앉히기 위해 숨가쁘게 달려왔지만 다들 빈손으로 올해를 넘기게 된 셈이다. 그렇다고 내년 초에 회담이 열릴 가능성도 커 보이지 않는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재선 취임식이 2005년1월20일에 열리고, 곧바로 국무부나 국방부 장관 등의 고위직 상원 인준청문회가 뒤따른다. 그 아래 대북 정책 담당 실무자들이 제자리를 다시 찾아가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빨라야 3월은 돼야 본격적인 협상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북한은 그때까지 움직이지 않겠다는 자세다. 지금 협상에 들어가봐야 담당자들이 교체되면 또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실속 없는 회담장에 나가 헛발질은 하지 않겠다는 기류다.
일본, 악화된 여론을 넘어
북한의 이런 느긋한(?) 자세와는 달리 한국을 비롯한 미국, 일본 등은 올해 안에 북한을 6자회담장에 끌어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 동남아, 유럽, 일본 등을 순방하며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우호적인 분위기 조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12월21일부터 나흘간 중국을 방문하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도 북핵 6자회담의 조기 개최를 위한 중국과의 긴밀한 협의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할 예정이다.
일본도 악화된 여론에도 불구하고 6자회담 재개 노력에 힘을 보태주려는 모습이 뚜렷하다. 피랍 일본인 가짜 유골 논란으로 대북 경제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강경 목소리가 커지고 있음에도 일본 정부는 6자회담에 미칠 악영향을 감안해 애써 자제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북한이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등을 구실로 6자회담 참석을 미루고 있는 마당에 일본까지 대북 제재 조처로 가세하면 6자회담이 더 오랜 기간 공중에서 맴돌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는 호소다 히로유키 일본 관방장관이 “6자회담이 있는데다 우리는 모든 대북 정책 정보를 (미국과) 긴밀히 주고받아왔다”며 “미국 정부의 입장을 고려할 것”이라는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미국은 6자회담에 남다른 애착을 보이고 있다. 지금은 북한을 비롯한 주변 이해 당사국들을 6자회담의 틀 안에 묶어놓아 지역의 위협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것이 최선의 정책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다른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북한에 납치된 피해자의 가짜 유골 사건으로 일본 내 북한 제재 목소리가 나날이 높아가고 있으나, 미국은 이례적으로 신중한 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은 고이케 유리코 오키나와·북방담당상과 만난 자리에서 “시기와 방식에 논의의 여지가 있다”며 “경제 제재라는 카드는 보여주는 것이 유효하지, 실제 착수하면 큰일”이라고 말했다고 이 전한 바 있다. 또 리처드 바우처 국무부 대변인도 12월14일 정례 브리핑에서 “제재의 경우 특히 제재 위협은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제재의 집행은 면밀한 계획 아래 정교하게 이뤄져야 효과를 극대화하고 기대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일본 강경파들의 독자적인 대북 제재 강행 움직임을 적절하게 견제하려는 의도가 감지되는 발언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만한 대목은 미국 부시 행정부의 미세한 태도 변화다. 궁극적으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제거라는 전략적 목표를 겨냥하지만,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술 차원의 적잖은 변화가 감지된다. 부시 정부는 기존의 ‘체제 교체’(regime change)에서 김정일 정권의 유지를 전제로 한 북한의 ‘체제 변형’(regime transformation)으로 북한 설득 논리를 바꾸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수단들을 발굴 중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체제 변형도 결국은 체제 교체 의도를 숨기기 위한 외교적 수사에 불과하다”며 깎아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체제 변형으로의 목표 수정은 그렇게 삐딱하게만 볼 내용은 아니다. 미국 행정부가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북한과 공존하려는 진정성이 어느 정도 배어 있기 때문이다.
‘다자간 경제협력 패키지’준비중
미국의 조지프 디트러니 대북협상특사는 지난 11월30일 뉴욕에서 한성렬 유엔주재 북한 차석대사와 만난 자리에서 최근 미묘하게 바뀐 미 정부의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체제 변형의 핵심은 북한이 진정으로 경제 개혁과 개방을 할 의지가 있다면 적극 돕겠다는 것이다. 물론 북핵 포기라는 전제가 붙어 있긴 하다. 한-미 관계에 정통한 한 국책 연구소 관계자에 따르면 국무부는 부시 행정부 이후 처음으로 북한이 6자회담에서 핵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지를 보이거나, 이를 유도하기 위해 북한에 가시적으로 보여줄 ‘다자간 경제협력 패키지’를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일본 도 12월16일 북핵 6자회담 미국쪽 수석대표인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가 미국 정부가 김정일 정권의 전복을 노리고 있다는 일각의 견해를 부정하면서 ‘체제 변형’을 통해 서서히 북한의 대외 개방을 이끌어낼 방침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북한) 스스로의 노력이 바람직하다”며 변화를 촉구하기도 했다. 집권 2기를 맞는 조지 부시 행정부가 대북 정책의 큰 틀을 ‘체제 변형’으로 수정해 최종 확정했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최근 미 국무부 당국자들은 파월 미 국무장관의 한달 남은 임기 안에 6자회담을 열어 일정한 성과를 남기려고 유화적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는 해석도 있기 때문이다. 또 차기 국무장관으로 내정된 라이스 현 국가안보보좌관이 이런 국무부 중심의 대북 정책 수정에 동의했는지도 불확실하다.
어쨌든 파월 국무부 장관 중심의 체제 변형 추구가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는 북한의 호응을 얻는 게 관건이다. 그러나 11월30일과 12월3일 뉴욕에서 두 차례 열린 양자 접촉에서 북쪽은 “미국의 정책 변화 추이를 지켜본 뒤 6자회담 재개 여부를 밝힐 수 있다”라고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12월4일 “이번 뉴욕 접촉 결과를 분석해보면서 우리(북)는 미국쪽이 우리에 대한 정책 변경 의지는 의연히 보이지 않고, 6자회담 과정을 우리의 평화적 핵 해결을 포함한 모든 핵계획을 먼저 없애는 공간으로만 이용하려 한다는 판단을 가지게 된다”면서 여전한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나마 온건보수적 대북 정책을 추구해왔던 파월 국무장관 중심의 협상파들로서는 크게 낙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미국 대북정책의 복잡성과 경직성전문가들은 미국 대북 정책의 치명적 약점으로 정책 결정 과정의 복잡성과 경직성을 꼽는다. 행정부 내 정책 결정 과정의 복잡성과 다양한 부서 및 기관들 사이의 상호 충돌하는 조직적 이해관계가 구조적으로 관료주의를 낳고 유연성을 발휘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즉, 어느 한 부처가 아무리 유연한 정책을 펴려 해도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부처가 ‘딴지’를 걸 경우 운신의 폭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미 부시 행정부가 처한 사정이 이와 비슷하다. 미국의 대북 정책 기조는 분명하다. 군사용이든 평화적이든 이유를 불문하고 북한이 우라늄 핵 프로그램의 존재를 인정하고 폐기를 먼저 약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지금 우라늄 핵 프로그램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은 북한이 6자회담장에 나와 모든 핵 포기를 약속할 때 비로소 유연해질 수 있다는 입장이다. 북한은 지금 “뭘 믿고 모든 핵 프로그램을 포기할 수 있느냐”고 하소연한다. ‘체제 변형 추구’라는 유연한 전술적 변화가 ‘북한의 우선 핵 포기 관철’이라는 기존 전략적 목표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형국이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계엄 모의’ 무속인 노상원 점집…소주 더미에 술 절은 쓰레기봉투
‘원팀’ 한덕수·권성동…민주 “내란비호 세력” 공세수위 높인다
홍시·곶감 줄이고 식후 1~2시간 뒤 섭취 [건강한겨레]
“한덕수, 내란특검 즉각 공포하라”…국무총리 공관으로 향하는 시민들
‘일단’ 원톱 굳힌 이재명…국힘서도 외면당한 한동훈
국가유산청 “김건희 종묘 차담회, 사적 사용 맞다”
커피 애호가 몸엔 이 박테리아 8배 많아…카페인 때문은 아니다
현실의 응시자, 정아은 작가 별세…향년 49
“닥쳐라” 김용원이 또…기자 퇴장시킨 뒤 인권위원에 막말
[단독] ‘명태균 폰’ 저장 번호 9만개…김건희·홍준표와 소통도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