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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FTA, 독배를 드는가

등록 2004-12-10 00:00 수정 2020-05-03 04:23

내년 체결 목표로 양국 정부간 협상 진행중…부품산업 등 초토화될 수 있다는 우려 제기돼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12월 초 한-싱가포르 자유무역협정(FTA)이 사실상 타결되면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이후 여러 국가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정부의 FTA 협상에 탄력이 붙고 있다. 이에 따라 FTA 로드맵 중 ‘인구 1억7천만명, 총 5조달러 규모에 이르는 통합시장 창출’을 내건 한-일 FTA 협상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한-일 FTA 협상은 내년 체결을 목표로 양국 정부간 본협상이 진행 중인데, 지난해 12월부터 두달 간격으로 서울과 도쿄를 번갈아 오가며 6차례에 걸쳐 협상이 진행됐다.

양국은 이미 통합협정문 작성을 마치고, 자국의 품목별 상품양허안(1천여개 각 품목별 관세 인하·철폐의 폭 및 시기를 담은 안)을 상대국에 제출하기 직전 단계까지 와 있다. 협상은 ‘실질적인 자유화’ 원칙 아래 △상품무역 △비관세조치 △서비스·투자 △경제협력 △기타 무역의제(정부조달·지적재산권 등) 등 7개 분야별로 이뤄지고 있다.

한국은 신중, 일본은 적극적

특히 특정 부문을 협상에서 배제할 수 없고, 장기적이지 않은 이행 기간(관세 철폐 및 인하 시기 단축)을 설정해야 하는 등 각 분야 협상을 패키지로 한데 묶는 ‘포괄적’ 형태를 띠고 있다.

지금까지의 협상 구도를 보면 일본쪽이 공세적으로 달려들고 있는 반면 우리쪽은 복잡한 갈등 양상을 노출하면서 다소 신중한 접근을 보이고 있다. 외교통상부는 적극적이지만 산업자원부가 업계의 반발을 고려해 소극적인 자세로 나오는 등 정부 안에서조차 이견이 빚어지자 일본 협상팀이 “한국이 미온적으로 나오면 우리도 협상을 깨버릴 수 있다”며 오히려 배짱을 부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처럼 한-일 FTA를 둘러싸고 정부 부처끼리 온도차가 있는데다, 산자부 안에서도 체결을 서두르자는 쪽과 속도 조절론을 펴는 주장이 뒤섞여 있으며, 업종별·산업별로도 한-일 FTA에 대한 이해득실 셈법이 제각각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해보다가 안 되면 말지” 하는 식으로 ‘의연하고 담담하게’ 한-일 FTA 협상에 나서고 있는 건 결코 아니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한-일 양국 정상이 내년 타결을 목표로 한다고 서로 약속한데다, 협상을 끌어 타결 시한을 늦춘다고 해서 일본에 뒤진 국내 산업 경쟁력이 크게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지난 98년부터 이미 한-일 FTA 논의가 시작되면서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 제기됐지만 한국과 일본간 기술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며 “어차피 몇년 뒤에는 닥칠 일인데 타격이 최소화될 때까지 마냥 기다리면서 1, 2년 더 시간을 끈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한-일 FTA라는 시장 충격을 통해 국내 산업 고도화와 구조조정을 꾀함으로써 경제 전반의 효율성과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한국 경제의 체질 개선을 위해 한-일 FTA라는 ‘쓴 약’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외교통상부 조세영 과장(동북아통상과)은 “칠레, 싱가포르는 (일본에 비하면) 우리나라와의 무역 규모도 작고 FTA 효과도 작은 편”이라며 “오히려 한번 붙으려면 센 놈하고 붙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업체 사장들도 있다”고 말했다. 한-일 FTA는 지난 98년 학계가 ‘한번 해볼 만한지’ 연구·검토하는 수준에서 출발했으나 전세계적 ‘FTA 대세론’이 휩쓸면서 중간에 정부가 끼어들었고, 이제는 이해득실보다는 국내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FTA라는 핵폭탄급 ‘외부 경쟁압력’을 한국 경제에 끌어들여야 한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고 있는 양상이다. 조세영 과장은 “이제 전세계적으로 FTA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대세”라고 전제한 뒤 “한-일 FTA가 한국 경제에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 정해져 있는 건 없다. FTA는 정부가 ‘관세 철폐’라는 틀을 시장에 던져주는 것이고, 기회와 위협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기계조립·중화학 가장 먼저 타격

그렇다면 한-일 FTA는 한국 경제에 어떤 폭풍을 불러올 것인가? 관세 철폐에 따른 ‘시장 확대와 경쟁압력 증가’가 미칠 영향과 강도는 업종·품목별·기업규모별로 차이가 있다. 그러나 크게 봐서 한-일 FTA는 칠레와 정반대로 ‘공산품 불리, 농수산물 유리’로 정리할 수 있다. 양국간 공동 연구는 “일본은 단기·장기 모두에 걸쳐 이득을 보지만 한국은 단기적으로 손해, 장기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결론이다. 시장 통합 이후 일본 제품의 수입 증가로 인해 대일 무역수지 적자가 더 커지겠지만, 장기적으로 △경쟁 압력과 일본으로부터의 기술 이전으로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강화되고 △일본시장의 비관세 장벽(NTMs·기술장벽, 유통구조, 폐쇄적 소비관행 등 외국 상품을 차별하는 반경쟁적 제도 및 관행)이 개선돼 한국 상품의 일본 수출이 늘고 △한-일 통합시장을 겨냥한 해외 자본의 한국 투자 유입이 증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FTA는 원칙적으로 양국의 수입관세를 없애자는 것인데 우리나라가 부과하고 있는 현행 수입관세율은 기계장비·전자부품·승용차·자동차부품·석유화학제품 등이 7∼8%이고, 정밀특수기계는 5%이다. 따라서 기계조립산업과 중화학공업 등 주력산업은 시장 빗장이 완전히 열렸을 때 가장 먼저 직접적 타격을 받을 공산이 크다. 관세율과 경쟁력 측면에서 약간의 득이 예상되는 부문은 일부 농림수산품과 섬유·피혁 등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일간 무역에서 관세가 붙는 농산물 품목은 8.8%에 불과해 엄청난 농산물 수출증가 효과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반면 일본의 주력산업 수입관세율은 승용차·자동차부품·기타수송장비·전자제품은 무관세이고, 기계장비(0.2%)와 금속·석유화학(3%)도 제로 관세에 가깝다. 우리로서는 FTA를 맺어도 관세 철폐의 효과가 거의 없는 셈이다. 자동차공업협회에 따르면 자동차 부품산업의 경우 일본이 신제품 개발기술은 4년, 설계기술은 3년, 생산기술은 2년 정도 한국에 앞서 있고, 첨단기술력에서 갈수록 차이가 벌어지고 있으며, 강점으로 꼽히던 가격 경쟁력에서도 일본에 추격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한-일 FTA 체결 이후 일본 완성차의 한국시장 점유율은 현재 0.5%에서 2010년 2.2%(전체)로, 중대형차는 현재 4.1%에서 16.5%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일본 자동차 부품 한국시장 점유율(현재 2.8%)은 관세 폐지에 따라 11.7%(2015년)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창욱 수석연구원은 “경쟁 압력이 강화되고 기술 이전이 증가하더라도 한국 부품의 일본시장 및 역외시장 점유율 증가는 미미한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거대한 구조조정 바람 휘몰아칠 듯

그러나 이러한 업종·품목별 예측을 넘어 한-일 FTA가 체결되면 경제 전반에 거대한 구조조정 바람이 휘몰아칠 공산이 크다. 특히 국산 부품업체들은 일본 상품과의 경쟁에 노출되면서 더 이상 존립 기반을 갖지 못하고 대규모 파멸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한신대 송주명 교수(국제학부)는 “철강·석유화학산업·가전산업도 관세 인하로 일본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강화돼 고부가가치 제품을 중심으로 수입이 급증할 것”이라며 “대기업 조립 메이커들도 일본 수입부품의 단순 조립자로 전락하고, 대일 부품의존 체질이 더욱 강화돼 기계부품산업의 대규모 파멸을 자초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통상당국이 “경쟁을 통한 효율화”를 내세우고 있지만 이런 명분은 한낱 기대와 억측에 불과할 뿐, 국내시장을 내줘 대일 종속이 심화되고 한국 경제를 지탱해갈 중소 부품업체들의 도산이 잇따르면서 한국 경제가 ‘내실 없는 약탈경제’로 전락할 것이라는 얘기다. 송 교수는 또 “경쟁력 강화론도 주력산업이 이미 죽은 연후에야 떠돌 망령에 불과하다”며 “한-칠레 FTA가 농업을 중심으로 한 문제였다면 한-일 FTA는 주력산업 전반의 운명이 걸린 국민경제 전체를 건 ‘무모한 도박’”이라고 말했다. 동아시아 분업 체계 구축은커녕 ‘한국 산업의 허리’라고 할 수 있는 조립·기계부품산업이 일본 부품공급 체계에 강하게 종속되는 수직분업 구조가 더욱 고착화된다는 것이다.

물론 자동차·전자·석유화학·기계 등 일본과 가격경쟁이 치열한 업종은 가격 경쟁력 약화를 우려하며 관세철폐 유예기간을 늘려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전경련이 지난 7월 1522개 업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조사에서, 대일 수입규모 및 수입의존도가 큰 품목에 대해서는 상당수 업체가 원가절감을 위해 오히려 수입관세를 조속히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조사가 말해주듯, 대기업이 부품조달선을 일본 업체로 변경할 경우 국내 중소 부품업체들은 사활적 경쟁압력에 내몰려 수도 없이 쓰러질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각종 수치를 들이대며 “윈윈게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극소수 기업을 제외한 대다수 한국 기업들에는 생사를 가름하는 극약처방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한국은, 목줄(부품산업)이 묶여서 생선(완제품)을 삼켜도 주인(일본)한테 토해 바쳐야 하는 비참한 ‘가마우지 경제’ 신세로 전락해 일본이 떨어뜨려주는 기술만 받아먹고 살아야 할 수도 있다. 송 교수는 “한-일 FTA는 몇몇 민감한 산업이나 무역적자 같은 일시적 피해에 그치지 않고, 부품·완제품을 가리지 않고 한국 주력산업 전반에 걸쳐 산업구조 고도화와 고부가가치화를 이끌 첨단·고기술 분야를 무력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경련 “M&A 통해 기술 받자”

한편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경쟁력 측면에서 헤비급(일본)과 미들급(한국)이 맞붙는 것인 만큼 품목별 관세철폐 유예기간을 늘리고 국내 보완대책을 마련하라며 ‘속도 조절론’을 펴고 있다. 전경련 박대식 국제경제팀장은 “국내 시장을 내주는 대신 일본으로부터 기술협력은 확실히 받아야 한다”며 “일본 기업들이 공짜로 핵심기술을 한국에 넘겨줄리 만무하기 때문에 M&A를 통해 핵심기술을 받는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전경련은 한-일 FTA 협정 체결을 이미 대세로 받아들이고 일본 기업과의 제휴를 통해 핵심기술을 공동 개발하는 방안까지 내놓고 있다. 박 팀장은 “일본 산업은행한테서 해외로 나갈 의향이 있는 일본 중견기업들 리스트를 받고 우리쪽은 기술도입 의사가 있는 업체 이름을 넘겨줘 서로 대량으로 교환하는 M&A 작업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장기적 이득’의 원천으로 불리는 일본의 비관세 장벽 철폐, 나아가 통합시장을 겨냥한 해외투자 유입이 기대만큼 일어날 수 있을까? 외국상품의 일본시장 진입을 가로막는 요인은 폐쇄적 소비관행 등 ‘사적 비관세 조치’들이 많고 정책적 비관세 조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게다가 협상을 통해 일본의 사적 비관세 조치까지 완전히 풀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투자 역시 민간기업의 영역이라서 양국 정부가 개입하기 힘들 뿐 아니라 일본의 산업정책은 오히려 해외투자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FTA가 투자 유입을 촉진해 관세 철폐에 따른 손해를 만회해줄 것”이라는 주장은 정작 ‘떡 줄 사람은 생각이 없는’ 막연한 추측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산업연구원 유관영 연구위원은 “한-일 FTA가 체결되면 비교우위 논리에 따라 영양가 있는 쪽은 일본이 특화하고 한국은 그렇지 못한 산업으로 갈 우려도 있다”며 “이럴 경우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신산업정책은 김이 빠지게 되는데, 따라서 일본으로부터의 기술이전이 FTA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했다.

한-일 FTA 협상에는 시장개방 ‘외압’을 통해, 일본이라는 버거운 상대와 겨루면서 국내산업 구조조정을 도모한다는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경제가 효율적인 경제구조로 이행하기 전에 국내 산업이 붕괴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점차 부각되고 있다. 이처럼 한-일 FTA를 둘러싼 회의론과 반대론이 확산되고 있음에도 협상은 베일에 가려진 채 속도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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