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근골격계 질환자의 산재 승인 어렵게 하는 지침 내려…노동자보다 산재보험 재정난 해소가 중요한가 </font>
▣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노동부가 근골격계 질환자의 산재 승인 기준을 까다롭게 적용하는 내용의 업무지침을 최근 근로복지공단에 내려보낸 것으로 드러나 노동계의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
노동부는 최근 ‘근골격계 질환 업무 관련성 인정기준 처리지침’(이하 업무지침)을 만들어 근로복지공단에 배포했다. 이 지침은 근로복지공단 직원들이 근골격계 질환자의 산재 승인 여부를 판단할 때 기준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근로복지공단 관계자는 지난 11월12일 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노동부 산재보험과에서 전문가들이 참여한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했는데, 여기서 이 업무지침을 만든 것”이라며 “민주노총 등에서 근골격계 질환을 이유로 산재 요양 승인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아 이에 대비하기 위해 이 지침을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퇴행성 질환 여부를 판단한다고?
이 지침은 근골격계 질환자의 산재 승인 여부를 결정할 때 업무 외적 요인이 있는지 철저히 조사하고, 산재로 승인하더라도 요양기간을 대폭 줄이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근골격계 질환자 발생을 줄이기 위한 ‘예방’이 아니라, 근골격계 질환자의 산재 승인을 줄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노동부는 이 지침에 산재보험 재정난 해소를 위한 목적이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노동부 관계자는 “근골격계 질환으로 인한 산재 환자가 최근 급증함에 따라 산재 보험금 지급액도 급격히 증가했다”며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업무지침을 만든) 여러 이유 중의 하나”라고 밝혔다.
노동계는 이 지침이 가뜩이나 산재 승인을 받기 어려운 근골격계 질환자의 어려움을 더욱 가중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가장 큰 문제는 퇴행성 질환(나이가 듦에 따라 발생하는 질환) 여부를 판단하도록 한 것이다. 원진노동환경건강연구소 임상혁 소장(산업의학 전문의)은 “근골격계 질환은 단순반복 작업을 오랜 기간 계속해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퇴행성 질환의 성격을 갖고 있는데, 이 지침은 퇴행성 질환의 업무 관련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며 “이렇게 되면 근골격계 질환자가 산재 승인을 받기가 매우 어려워진다”고 지적했다.
또 이 지침은 산재 판단을 할 때 환자의 사고력(사고를 당한 경력)과 질병, 생활습관을 조사하도록 하고 있다. 업무 관련성을 정확하게 판단해 ‘사이비’ 산재 환자를 막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노동계는 이 조치가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임 소장은 “생활습관이 근골격계 질환의 주된 원인이 아닌데도 이를 조사하는 것은 산재 인정 범위를 축소하겠다는 것”이라며 “이 지침대로라면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자동차 조립공이 건강을 위해 배드민턴을 1시간씩 쳤다고 했을 때, 이 노동자의 어깨에서 발생하는 근골격계 질환은 배드민턴 운동의 영향으로 발생한 것으로 분류돼 산재 인정을 못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업무지침은 근로복지공단 자문의들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업무 관련성 여부를 판단할 때와 재요양 승인을 결정할 때 자문의사의 자문을 받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조치도 노동계의 반발을 사고 있다. 업무 관련성을 정확하게 판정하려면 환자가 일하는 작업장으로 가서 작업 환경을 직접 조사해야 하는데, 근로복지공단 자문의사는 진찰 서류와 방사선 사진만 보고 판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임 소장은 “공단 자문의들은 대부분 임상의사로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할 수는 있지만, 업무 관련성을 판정할 수 있는 전문성은 떨어진다”며 “심지어 환자를 직접 진찰하지 않고 진단하는 경우도 많다”고 지적했다.
산재보험 민영화의 신호탄인가
근골격계 질환자의 산재 요양 기간도 문제로 지적된다. 업무지침에는 치료기간을 결정할 때 대한의사협회의 ‘진단서 작성 지침’을 반드시 참고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이 진단서 작성 지침은 의사가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서 송사에 휘말렸을 때 의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행정지침’이다. 따라서 환자 치료를 위한 의학적 고려가 부족한 이 지침을 적용하는 것은 산재 환자 치료에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어깨의 대표적 근골격계 질환인 ‘회전근개건 손상’은 물리치료 등을 6개월 정도 해보고 증상이 개선되지 않으면 수술을 하게 되는데, 진단서 작성 지침에는 12주 안에 직장 복귀를 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이렇게 되면 환자는 수술은커녕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작업장으로 복귀해야 한다.
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은 이 지침이 아직 공식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노동부 관계자는 “(업무지침은) 아직 논의 단계일 뿐, 시행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지난 11월15일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의 질의에 대해 “현재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고, 앞으로 노동부와 협의해 (시기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노동계는 이 업무지침이 이미 시행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지난 10월 고속철 제작업체인 로템에서 근골격계 질환자 38명이 산재를 신청했는데, 이 중 5명이 퇴행성 질환이라는 이유로 불승인됐다”며 “새 업무지침이 이미 현장에서 적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계는 이번 업무지침을 경영자총연합회(경총)가 시도하고 있는 산재보험 민영화의 ‘신호탄’으로 해석하고 있다. 산재 인정 범위의 폭을 대폭 축소함으로써 산재보험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확산시켜 궁극적으로 사회보험으로서의 기능을 무력화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금속노조 박세민 산업안전국장은 “이번 업무지침은 정부가 산재보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장기적으로 민영화로 갈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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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골격계 질환 통계조차 허술</font>
국내 노동 현장에 근골격계 질환 ‘주의보’가 울린 것은 이미 3년 전이지만, 그 대책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무엇보다 정부의 공식 통계조차 허술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노동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근골격계 질환자는 4532명으로, 2002년의 1827명보다 두배 이상 늘었다. 노동부는 이를 두고 “산재 환자가 급증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실태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는 게 노동계의 주장이다. 노동부 자료를 보면 1천명 이상 대규모 사업장에서 근골격계 질환의 45.9%가 발생한 것으로 돼 있는데, 실제로는 노조가 없고 작업 환경도 열악한 소규모 사업장에서 더 많은 환자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이 통계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다른 나라의 통계와 비교해도 모순은 금세 드러난다. 미국의 경우 노동자 1천명당 10명 정도가 근골격계 질환을 앓고 있는데, 우리는 1천명당 0.4명으로 미국의 20분의 1 수준이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보다 전반적으로 작업 환경이 우수하다는 점에서 이 현상은 이해하기 어렵다. 또 미국에서는 운수업과 병원, 건설 노동자들한테서 근골격계 질환이 많이 나타나는데 우리는 제조업이 전체의 78%를 차지한다. 건설업 등 나머지 직종은 겨우 5% 미만이다. 이런 통계의 허술함 때문에 노동계는 국내에 은폐된 근골격계 질환자가 많다고 보고 있다.
근골격계 질환자는 장기간 산재 치료를 받다가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원진노동환경연구소가 최근 근골격계 질환자 157명을 상대로 정신과 검사를 해본 결과, 43%에 이르는 68명이 정신과 전문의의 진료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임상혁 소장은 “산재 환자 대부분이 직장을 잃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시달리기 때문에 정신과 치료도 병행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산재 치료 시스템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게 우리 노동계의 현실이다. 지난 11월5일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인 (주)SJM의 한 노동자가 자살을 했는데, 이 노동자는 근골격계 질환으로 산재 요양을 받던 중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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