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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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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따라 ‘닭’ 따라 즐겨왔도다

등록 2004-11-18 00:00 수정 2020-05-03 04:23

닭으로 살펴본 대한민국 맛 유행사… 1960년대 대중화 뒤 튀김통닭·닭갈비·찜닭 다양해져

▣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돌고 도는 입맛 유행의 한가운데엔 항상 ‘그’가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항상’은 아니었다. 우리가 그를 자주 만나게 된 것은 40여년 전부터다. 당시 그를 만나려면 시장에 가야 했다. 그곳에선 맨살을 드러낸 채 늘어져 있거나 무럭무럭 김이 나는 솥단지, 또는 부글부글 기름 끓는 불가마에서 막 건져올려지곤 했다. 60년대 닭은 그렇게 다가왔다.

놀라워라, 양념통닭의 등장

한국계육협회 김한웅 부장은 “우리나라에서 닭을 기른 것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1960년대 이전엔 농가에서 몇 마리의 닭을 내놓아 기르는 정도였다”고 말한다. 귀한 손님이 왔을 때 씨암탉을 잡는 것 말고는 더 이상 달걀을 낳지 못하는 늙은 닭이나 수탉 고기를 먹는 것 정도였다. (2002년)를 보면 1930년대엔 닭 1마리에 2원으로 쇠고기 2.4kg과 맞먹었고, 달걀 10개가 쇠고기 600g 가격과 같을 정도로 닭이 비쌌다. 닭고기가 대중화된 것은 1960년대 중반 고기만을 얻기 위한 ‘육계’가 대규모로 사육되기 시작하면서였다. 부화한 지 30~40일 만에 1300~1500g으로 자라나는 육계종이 보급되고 닭고기 공급이 늘어나면서 요리방법도 변화했다. 종래의 삼계탕·닭볶음탕의 보신 개념에서 벗어나 전기 통닭구이·장작숯불 통닭구이가 선을 보였다. 시장에서도 찜닭·통닭을 즉석에서 요리해 팔기 시작했다. 음식문화연구가 주영하씨는 “식용유가 대중화되면서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 튀김통닭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1970~80년 사이엔 소비량도 부쩍 늘었다. “1970년 닭고기의 전체 생산량은 4만5천t으로 국민 1인당 닭고기 소비량이 1.4kg이었으나, 10년 뒤인 1980년에는 1인당 소비량이 6.9kg으로 10년 만에 5배나 뛰었다.”(). 기름으로 튀겨 파는 통닭에 한국식 매콤달콤한 양념을 가미한 양념통닭의 등장은 닭고기 소비 증대에 큰 몫을 했다. 양념통닭의 인기를 업고 ‘페리카나’라는 토종 브랜드도 탄생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닭고기를 전문으로 하는 패스트푸드점이 입성했다. 1984년 두산그룹이 들여온 KFC에 이어 10년 뒤엔 대한제당이 파파이스를 들여왔다. 바야흐로 ‘치킨 시대’가 열린 것이다. 소스나 조리 매뉴얼 같은 것은 세계적으로 표준화된 방법을 따랐으나, 닭 자체는 신선도 때문에 수입 냉동육을 쓸 수 없고 국산 냉장육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치킨 시대는 한국 양계농도 ‘치킨닭’ 을 기르게 됐다.

BBQ 등 ‘토종’들의 야심찬 도전

1995년엔 한국산 치킨 프랜차이즈 BBQ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당시 BBQ를 창업한 (주)제너시스 윤홍근 회장은 “이미 치킨 시장은 포화상태”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제너시스 장영학 마케팅부장은 “BBQ가 자신 있었던 것은 두 가지 대목이었다”고 설명한다. 외국산 패스트푸드점은 넓은 매장과 높은 브랜드 보증금이 필요하고 주로 번화가에 있기 때문에 주택가 등 틈새 입지를 겨냥하자는 것과, 어른들을 상대하는 기존의 치킨호프집은 닭을 먹기 위한 곳이 아니라 맥주를 마시는 곳이기 때문에 거꾸로 맥주 대신 닭을 위주로 한 가족형 매장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현재 우리나라엔 치킨 프랜차이즈만 200개가 넘는데, 이 중 점포 수가 가장 많은 BBQ는 전국에 1750곳의 매장을 거느리고 있으며 치킨 시장도 크게 성장해 BBQ·KFC·파파이스 3개 치킨 전문점의 합계 매출액은 2000년 5천억원에 이르렀다. 여기에 후발주자인 교촌치킨은 간장을 기본 양념으로 한 특유의 달콤하고 바삭한 맛으로 승부해 2002년부터 수도권을 중심으로 체인망을 늘려 2년 만에 전국에 1058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재래시장에서 기름이 뚝뚝 흐르는 튀김통닭을 사먹던 시절부터 깔끔한 포장에 한입에 쏙 들어가는 치킨에 이르기까지 숨가쁘게 달려오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선호하는 치킨의 종류가 세대를 나누는 지표가 된다는 것이다. 계육협회 김한웅 부장은 “시장 통닭을 먹으며 처음 닭을 만났던 30대 후반~40대와 어릴 적부터 KFC 조각을 입에 물었던 20대 초반 젊은이들은 여전히 튀김치킨을 좋아하는 반면, 80년대 중반 양념통닭이 한창 뜰 때 청소년기를 보낸 20대 후반~30대 초반은 양념치킨을 좋아한다”고 분석했다. 여기에 10대들의 요즘 기호를 덧붙이면 이들은 ‘꼬치 세대’라 불릴 만큼 꼬치에 열광하고 있다.

‘치킨’의 흐름과는 별도로 닭요리 또한 외식업계 유행을 주도해왔다. 1990년대 초반 크게 인기를 끈 춘천식 닭갈비는 야채와 당면의 맛과 육즙이 이뤄내는 조화가 특징이었다. 특히 닭갈비집에는 ‘뼈 없는 닭갈비’라는 메뉴가 등장해 일일이 뼈를 발라내는 수고를 줄여 매출 증대에 큰 공을 세웠다. 김한웅 부장은 “당시 닭갈비집이 선풍을 일으키며 곳곳에 매장이 들어선 것은 미국에서 저렴한 가격에 닭다리 냉동육을 수입해 ‘뼈 없는 닭갈비’로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조류독감 파동으로 2003년부터 닭다리 냉동육 수입은 금지됐다.

춘천식 닭갈비 물결이 휩쓸고 간 뒤 21세기 초미를 장식한 주자는 안동찜닭이었다. 닭볶음탕과 비슷한 조리법이긴 하지만 소갈비 양념을 하고 야채·당면을 듬뿍 넣은 안동찜닭은 한동안 전국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다 2002년께부터 성장을 멈춘다. 업계 관계자들은 “손님들이 음식을 주문한 뒤 테이블에 나오기까지 조리시간이 많이 걸리고, 음식점마다 맛이 똑같지 않아 프랜차이즈점으로서의 장점을 살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는데 자고 나면 한채씩 생겨나는 듯하던 안동찜닭은 이제 완전히 불닭집에 대세를 내주고야 말았다. 불닭의 인기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는 예측할 수 없으나, 불닭집 주인들 또한 안동찜닭의 교훈을 되새기며 주변에 늘어나는 경쟁자들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선호 치킨으로 ‘세대’를 안다?

닭이 이처럼 맛 유행의 첨단을 선도해온 까닭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초기엔 정부의 양계농 지원육성책이 있었고 이후엔 여기에 고기닭의 사육·도축·유통·조리에 이르기까지 계열화된 시스템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꼽는다. 또 음식점 창업을 고려하는 사람들에게 닭고기 식당이 돼지고기·쇠고기에 비해 훨씬 돈이 덜 든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다. 돼지고기만 해도 고기와 식사가 곁들여지기 때문에 매장도 넓어야 하고 시설도 갖춰야 하는데, 닭은 주로 배달영업이 많아 소규모 점포를 적은 돈에 차릴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1997년 구제금융 때 직장에서 밀려난 회사원들이 3천만~4천만원 정도의 퇴직금으로 손쉽게 차릴 수 있는 것이 치킨집이었기 때문에 점포 수의 증가와 메뉴의 다양화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김한웅 부장은 “40, 50대보다 20대가 닭고기를 더 선호하기 때문에 앞으로 젊은층의 입맛에 호소하는 메뉴들이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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