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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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솥단지의 아우성이 들리는가

등록 2004-11-12 00:00 수정 2020-05-03 04:23

유례없는 3만여 음식업주들의 여의도 집단 시위 현장… 세금감면 요구 들어줘도 임시책일 뿐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kimyb@hani.co.kr

고대 중국의 하(夏), 은(殷), 주(周) 3대 때는 구정(九鼎)을 인수하는 것이 곧 왕권의 장악을 뜻했다. 이 때문에 왕권이 바뀔 때마다 구정을 둘러싼 쟁탈전이 벌어졌다. 구정은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구주(九州)의 쇠를 모아 만든 솥이었다. 솥은 곧 ‘왕권’이었던 것이다.

월 5천곳 폐점…“재난업종 선포하라"

국가와 왕의 권위 그 자체였던 솥단지가 2004년 가을 대한민국에선 ‘쪽박’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11월2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강둔치에는 큰 가마솥에서 작은 냄비 크기까지 갖가지 솥단지 400여개가 함부로 내동댕이쳐져 나뒹굴었다. “음식업을 긴급 재난업종으로 선포하라!” 전국에서 몰려든 3만여 음식업주들의 절망스런 목소리가 울려퍼진 허공에는 때마침 을씨년스런 늦가을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먹는 장사 하면, 굶어죽지는 않는다’고 했던 불문율은 이제 옛말일 뿐임은 통계치로도 뚜렷하게 증명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 1분기(1~3월) 음식점업의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5.5% 줄어 자영업 가운데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이런 하락률은 외환위기 뒤 처음으로 전분기에 견준 매출이 감소율로 돌아선 지난해 2분기(4~6월)의 -0.2% 이후 가장 큰 하락률이다. 음식점업은 올 2분기(-3.5%), 3분기(-1.5%)에도 계속 뒷걸음질쳤다. 한국음식업중앙회는 44만 회원 업소 가운데 하루 190개, 한달이면 5천개씩 문을 닫고 있다고 밝혔다.

음식업의 추락은 지난해부터 생긴 광우병, 조류독감, 불량 만두소 등 갖가지 음식물 관련 파동에서 비롯된 바 컸다. 업주들이 “음식업을 재해업종으로 선포해 지원을 해달라”는 주장을 펴는 게 바로 이 때문이다.

서울 영등포역 근방에서 와인삼겹살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이충호(44)씨는 “장사가 안 되기 시작한 게 지난해 5월부터였고 올해 들어서는 완전히 바닥을 기고 있다”며 “지난해에 비해 매출이 30~40%씩 줄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기 침체에 따른 소비 위축으로 외식을 줄이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음식업에 드리운 불황의 골은 점점 깊어지고 있다.

공급과잉 문제도 심각하다. 외환위기 이후 너도나도 식당을 차리는 바람에 음식업은 포화상태에 이른 실정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청 통계를 보면, 일반음식점을 포함한 전국의 식품접객업소는 1999년 64만8천, 2000년 65만7천, 2001년 68만7천, 2002년 70만9천개로 늘어났으며 지난해 말 현재 72만8천개에 이르고 있다. “점심은 형님 식당에서, 저녁은 아우 식당에서 서로 사먹어주며 도와야 할 판”이라는 우스개가 나도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전병유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외환위기 때 경제 사정이 나빠져 실업자가 많아지면서 음식업을 비롯한 자영업으로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며 “정부도 실업 구제 차원에서 소상공인 지원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는 바람에 자영업의 비중이 크게 늘었다”고 진단했다. 실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 따르면 2001년 기준 우리나라의 자영업자(가족 종사자 포함) 비중은 36.6%로, 미국(7.4%)·일본(16.0%) 등에 견줘 대단히 높은 실정이다.

음식업중앙회 관계자는 “지난번 솥단지 시위는 정부 지원에 대한 기대감 이상으로 절박함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자영업하는 이들은 회사원처럼 동원할 수가 없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방에서 관광버스까지 대절해 대거 참석했다. 그만큼 생존의 절박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100만원 감면효과로 어려움 치유될까

음식업주들의 요구사항은 의제 매입세액 공제율과 신용카드 매출세액 공제율을 높여달라는 것으로 정리된다. 의제 매입세액 공제율은 부가가치세 면제 대상인 농수산물을 가공한 매출에 부가세의 일정 비율을 매입세액으로 여겨(의제) 면제해주는 비율로, 지금은 재료비의 2.9%(103분의 3)이다. 지난 1999년 110분의 10에서 105분의 5로 조정된 뒤, 2002년 지금의 수준으로 다시 낮춘 것이다. 업계쪽은 5년 전 수준인 110분의 10으로 높여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면 업소당 한해 100만원 정도 세금 감면 효과를 본다고 한다. 신용카드 매출세액 공제율은 현재 1%인데 이를 지난해처럼 2%로 높여 적용해달라는 게 업계쪽 요청이다. 예컨대 신용카드 매출이 1천만원일 경우 10만원까지 부가세 환급을 해주던 것을 20만원으로 올려달라는 것이다.

업계쪽의 요청에 재정경제부는 난색을 표명하고 있지만, 일부라도 수용하는 수준의 지원책이 나올 것이란 기대가 높은 편이다. 음식업 종사자들의 수가 워낙 많아 정부여당은 정치적 압박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뒤 소상공인 지원책을 펴는 바람에 공급 과잉을 초래했다는 책임론을 제쳐두고라도 당장 급증하는 실업 문제를 외면하기도 어렵다. 더욱이 천정배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가 지난 10월26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음식업계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음식 재료비에 대한 부가세 공제방법을 개선하겠다”고 밝힌 바도 있다.

물론 이런 지원책이 음식업을 근본적으로 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단지 급격한 충격을 피해가자는 정도일 뿐이다. 전병유 연구위원은 “음식업의 어려움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충격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내느냐가 문제”라고 말했다. 전 위원은 “구조조정을 하되 경기 속도에 맞춰 단계적으로 진행해야 하며, 공공서비스쪽에서 고용창출 프로그램을 같이 세워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당시 전·현직 대통령을 빗댄 솥단지 우화가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이승만이 준비한 솥을 넘겨받은 박정희가 밥을 짓다가 횡액을 당하는 바람에 최규하가 밥을 먹으려는 찰나 전두환이 뺏어먹었다는 얘기였다. 노태우는 누룽지까지 긁어먹고 김영삼은 남은 누룽지를 먹으려고 더 박박 긁다가 솥단지에 구멍을 내고 잃어버렸으며, 김대중은 솥단지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는 비극으로 우화는 끝이 난다. 노무현 대통령이 잃어버린 솥단지를 찾고 구멍도 때우는 ‘해피엔딩’ 우화는 기대 난망인가.



‘솥단지 퍼포먼스’가 나오기까지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음식업주들의 집단 시위 계획은 지난 8월 싹트기 시작했다. 한국음식업중앙회장으로, 서울에서 한식점을 운영하고 있는 남상만씨가 당선된 때였다.
비리 구설수로 중도 하차한 전임 회장으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은 남 회장은 당선 직후 회원 업소의 실태를 밀착 점검하는 일에 나섰다. 남 회장 스스로도 불황을 느껴온 터였지만, 경북 고령, 경남 의령, 전북 부안 등 군단위 지부의 절박함을 새삼 실감하게 됐다고 중앙회 관계자는 전했다. 중앙회는 남 회장의 현장 점검을 통해 취합한 의견을 반영해 단합된 목소리로 정부에 호소하는 시위를 벌이는 준비 작업에 돌입했다. 중앙회에서 시위 날짜를 정한 뒤 전국 40개 지회와 217개 시·군·구 지부를 통해 방침을 내려보냈다.
세부적인 행사 진행을 맡아야 하는 중앙회로서는 시위 효과의 극대화를 위한 고민 끝에 ‘솥단지 퍼포먼스’를 생각해내기에 이르렀다. 음식점의 불황을 극적으로 보여줄 장면으로는 솥단지를 팽개치는 것이 제격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는 지난 6월부터 중앙회에서 일하고 있는 한 신문사 논설위원(부국장급) 출신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고 중앙회 관계자는 귀띔했다. 시위 계획을 알리자 서울 영등포지회 소속을 중심으로 음식업주들이 너도나도 쓰던 솥을 들고 길거리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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