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돌파용 기획 발언’ 파문… ‘행정부의 기계적 중립’ 등 해묵은 담론 파괴 의도 엿보여
▣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이해찬 국무총리의 잇단 ‘선명 발언’이 관심사다. 와 한나라당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행보의 배경과 의미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며, 파장도 만만찮은 상태다.
이 총리의 선명 발언은 유럽 순방 중인 10월18일 베를린에서 특파원들과의 호텔 객실 심야 간담회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가 현 정부를 근거 없이 좌파로 몰아붙이는 등의 문제를 지적하며 “조선·동아는 역사의 반역자”라고 말했다. 또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역사가 퇴보한다”라고도 주장했다.
‘사과’ 비슷한 시늉도 없었다
그의 말이 국내에 알려지자 와 한나라당은 ‘총리의 막말’ ‘취중 실언’ 등으로 규정하면서 이 총리를 맹공격했다. 그러나 총리실의 한 관계자는 “언젠가 조선·동아의 문제점을 지적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기회를 보던 차에 특파원 간담회라는 자리를 자연스럽게 빈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언은커녕 미리 정교하게 준비한 ‘정면돌파형 기획 발언’이라는 이야기로 읽혔다.
10월25일 이 총리가 국회 본회의에 출석해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대독하는 자리는 그의 ‘선명 행보’ 2라운드였다. 한나라당은 진작부터 시정연설 대독 기회를 통해 베를린 발언을 사과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남경필 한나라당 수석원내부대표는 같은 날 국회 국무위원 대기실로 이 총리를 두 차례나 찾아 ‘최소한 유감 표명이라도 해줄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 부대표로서는 이 총리가 사과 비슷한 시늉만이라도 해줘야 자신이 당내 강경파들에게 덜 들볶일 처지였다.
그러나 이 총리는 남 부대표의 요청에 가타부타 답을 하지 않다가 ‘사과 비슷한’ 것 없이 대통령의 시정연설문을 죽 읽어내려갔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분노를 표시하며 연설 도중 본회의장을 우르르 빠져나갔다. 다만, 박근혜 대표와 김덕룡 원내대표를 비롯한 19명은 의석에 남음으로써 한나라당 내부에 강온 시각차를 드러냈다.
3라운드는 국회 대정부 질문 첫날인 10월28일에 열렸다. 답변을 위해 국회에 출석하기 전날 이 총리는 참모진들과 함께 예상 질문을 점검했다고 한다. 총리실 관계자는 “베를린 발언에 대한 사과 요구가 당연히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참모들은 좀더 세세한 답변 자료를 마련하겠다고 이야기했으나 이 총리는 “평소 소신대로 하겠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답변석에 서기에 앞서 천정배 원내대표도 이 총리에게 ‘원만한 의사 진행을 위해’ 적절한 수준의 유감 표명을 하는 게 어떠냐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총리는 안택수 한나라당 의원의 질의에 “한나라당은 여러분과 국민들이 다 아시는 것처럼 지하실에서 차떼기를 하고 고속도로에서 수백억원을 들여온 정당 아닌가. 그런 정당이 어떻게 좋은 정당이라고 할 수 있나”라고 정면대응했다. 그는 또 “(조선·동아가 역사의 반역자라고 한 것은) 내가 평소 느끼던 소회이다. 역사에 반하는 행위를 하고도 철회하거나 회복시키지 않는 것은 역사에 대한 반역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총리실 관계자는 10월29일에도 출입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나라당에 사과한다고 해서 나쁜 당이 좋은 당 되는 거냐”라며 애초의 기세를 거듭 밀고 나갔다. 이 관계자의 발언이 총리의 뜻을 대변하는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런 흐름을 종합해볼 때 이 총리가 전통적인 정부와 국회 관계, 전통적인 대언론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꿔보자는 나름의 판단을 내린 것은 분명해 보인다. ‘좋은 게 좋고’ ‘원만한 게 최우선’이며 ‘총리나 장관은 국회에 가면 일단 설설 기고 보는’, 그리고 ‘언론과 싸워서 득 볼 게 없다’는 등의 우리 사회의 익숙한 담론에 이 총리가 선을 긋고 나섰기 때문이다.
언론 문제점, 시장에 호소
첫째로 이 총리는 ‘행정부가 정치적 중립을 기계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담론에 도전할 뜻을 지닌 것 같다.
한나라당은 이 총리의 발언과 관련해 △야당 모독 △총리의 정치적 중립 의무 위반을 주장한다. 한나라당은 중앙선관위에 정치적 중립 의무 위반 혐의에 대한 질의를 내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총리실 관계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대의 민주주의 정치를 하는 유럽과 미국 어디에도 총리의 정치적 중립을 기계적으로 요구하는 나라는 없다. 오히려 유럽 나라들은 의원내각제인 탓도 있지만 총리가 국회에 출석해 야당 당수와 격렬한 정치적 논쟁을 하며 이 과정에서 상호 비난도 숱하게 오간다. 그렇다고 해서 국회 의사 일정을 거부하는 등의 파행은 없다. 말은 말로, 정치적 논쟁은 논쟁으로 끌고 갈 따름이며 그것이 의정 단상의 존재 이유라는 정치 문화가 자연스럽게 정착된 것이다.
미국도 이 점은 비슷하다. 미국의 현직 대통령은 본인의 재선 운동은 물론이려니와, 상·하원 의원을 뽑는 중간선거에도 직접 선거운동을 하러 다닌다. 그 과정에서 야당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즉, 행정부의 정치적 중립을 기계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일반적 원리라기보다는, 과거 군사 권위주의 시절에 뿌리를 둔 우리나라만의 기이한 신화라는 게 총리실 관계자들의 인식이다.
이에 관한 한 노 대통령도 똑같은 인식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윤태영 청와대 부속실장은 10월19일치 에 실은 ‘국정일기’에서 노 대통령은 “총리도 당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고 소개했다. 윤 실장은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승리한 만큼 열린우리당 출신 인물이 국무총리가 되어 당을 중심으로 정책을 주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지난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의 정치적 의사표시의 자유’를 획득하려고 몸부림치다가 탄핵까지 당하지 않았느냐”라며 “총리의 최근 행보도 대통령의 그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물론 내각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와, 내각이 행정 권력을 부당하게 동원해 특정 정당을 편드는 행위(관권 선거나 야당 사찰)는 구분돼야 한다고 이들은 전제한다.
두 번째로, 이 총리가 ‘언론과 싸워서 좋을 게 없다’는 담론에 도전하는 측면도 흥미롭다. 돌아서서 언론을 ‘씹더라도’ 겉으로는 좋은 척하는 ‘면종복배’(面從腹背)의 대언론 관행을 더 이상 따르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총리실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조선·동아한테 잘해준다고 해서 정부 정책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지 않으리라는 점은 그동안의 보도 태도를 볼 때 분명하다”며 “그렇다면 조선·동아가 공정하지 않은 언론매체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독자들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개혁입법 전략, 당지도부와 다른 측면도
이런 전략은 신문법 개정 등을 뼈대로 하는 열린우리당의 언론개혁 전략과도 다소 성격이 다른 것이다. 의 시장점유율 따위를 아무리 제도적으로 규제하려 해도, 독자들이 그 신문을 좋아해서 선택한다면 정부 차원의 규제는 힘을 갖기 어렵다. 또한 등은 “독자들이 좋아해서 많이 팔리는 신문을 정부가 인위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은 나름의 설득력을 갖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 총리는 ‘그렇다면 독자들에게 조선·동아가 과연 공정한 매체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판단하도록 하겠다’며 판단의 계기를 나름대로 제공하려 한 것이다.
이런 접근 방식은 노 대통령이 진작부터 구사했던 것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은 대선 후보가 되기 이전부터 ‘조폭언론과 일전 불사’를 다짐했다. 제도 개선 논의도 좋지만, 지도급 정치인들이 시장에 직접 호소하는 전략의 효율성에 그가 주목한 셈이다. 양정철 청와대 홍보수석실 비서관이 신행정수도 논쟁이 한창이던 무렵 를 겨냥해 “(정부에 대한) 저주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기고문)라고 주장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열린우리당에서 노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것으로 꼽히는 유시민 의원은 최근 “당지도부는 조선·동아와의 인터뷰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 의원은 13대 국회 시절 이 총리의 보좌관을 지낸 적도 있다.
셋째로, 이 총리의 행보는 정기국회에서 4대 ‘개혁입법’을 처리하는 전략을 놓고 여당 지도부와 견해를 달리하는 측면도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총리실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여당쪽에 국회를 운영하는 전략전술이 없는 것 같다”며 “한나라당의 그동안의 태도를 볼 때 그쪽 이야기에 끌려간다고 해서 4대 입법 처리에 협력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4대 입법과 관련해 “입법 추진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또 한나라당은 여당이 4대 입법을 강행할 경우 헌법재판소로 문제를 끌고 갈 뜻도 공공연히 거론하고 있다. 상대 정당의 제안을 비판하되,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며 논쟁하기보다는 ‘원천 봉쇄’ 태세가 강한 상황이다.
여야가 극단적으로 맞서는 것은 4대 입법이 우리 사회의 기득권적 질서 전체를 유지하느냐 무너뜨리느냐라는 문제와 직결된 탓으로 보인다. 열린우리당은 이를 ‘개혁’이라고, 한나라당은 ‘국론 분열 법안’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이 총리는 국회 차원의 절충보다는 일대 사회적 논쟁을 통한 새로운 국민적 합의를 시도한다는 새로운 접근방식을 택한 것으로 읽힌다. 사회세력간에 견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면, 견해 차이가 불거지는 것을 두려워할 게 아니라 문제를 드러내놓고 일종의 ‘끝장 토론’을 해보자는 발상이 깔린 것 아니냐는 이야기다. 열린우리당의 한 개혁파 초선 의원은 “천정배 원내대표가 4대 입법과 관련해 한나라당과의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는 이면에 실제로 절충이 가능할 것으로 보는 인식이 느껴질 때가 있다”며 “그러나 개혁파 의원들이 볼 때 국가보안법 폐지 등은 어차피 절충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과 척척 손발 맞추는 행보
이 총리의 행보가 노 대통령과 척척 손발을 맞추는 듯한 측면도 흥미롭다.
이 총리는 노 대통령과 최소한 매주 한 차례씩 식사를 같이 하면서 국정 현안을 조율한다고 한다. 이 자리에는 “부부간에 별도로 같이 밥 먹을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노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씨도 자리를 함께하는 경우가 잦다고 한다. 고건 전 총리 시절에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대통령과 총리 사이에 인간적인 친밀감과 신뢰감이 깊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윤태영 청와대 부속실장은 10월19일치 ‘국정일기’에서 이런 표현을 한 적도 있다.
“대통령은 국무총리가 현재 수행하고 있는 역할에 대해 만족스러움을 표하고 있다. 정책에 대한 사전 지식은 물론, 이론과 대안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갈등이나 이해관계를 통합·조정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감각이 빠르고 결단이 신속하다고 평한다. 무엇보다 업무 추진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강점으로 뽑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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