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민주노총의 쌀 개방 대응 선언… 학교 급식도 우리 쌀로, 노·농·학 연대의 새 물결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69개 노동조합 2만5천 노동자를 아우르고 있는 민주노총 대구본부는 지난 10월21일 한편의 선언문을 채택했다. ‘세계무역기구(WTO) 쌀시장 개방 반대 노동자 선언문’. 마침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헌재의 위헌 결정이 내려진 날인데다 노동계에서 늘 주장해오던 것쯤으로 비쳐져 이 선언은 여론의 큰 관심을 끌진 못했지만, 유난히 눈길을 끄는 대목을 품고 있었다.

대구본부는 선언문에서 “대구 지역 민주노총 산하 모든 노동조합은 ‘사내 급식에서 반드시 우리 쌀을 사용하도록 할 것’을 노사간 단체협약으로 체결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쌀시장 개방에 반대한다’는 네거티브(부정적) 구호에서 나아가 포지티브(긍정적) 대응책을 제시함으로써 쌀 개방에 맞선 폭넓은 ‘노-농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전국 차원으로 이어질 움직임
민주노총 대구본부의 김경희 선전부장은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정서적 일체감’을 들어 선언의 현실화를 낙관하고 있다. “이번 선언은 10월 초 대구 지역의 노동자·농민·학생 연합체인 민중연대의 쌀 개방 반대 집회에서 비롯됐는데, 이 지역의 경우 부모는 농민, 자식 세대는 노동자인 경우가 많아 노-농 사이의 정서적인 유대감이 강하다. 호남 지역만 해도 농촌을 떠나면 서울로 가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 지역에선 고향을 떠나더라도 대부분 인근 산업시설에서 근무하게 된다. 새벽 일찍 일어나 과수원에서 일하고 나서 출근하는 조합원들도 있다.”
김경희 부장은 “노동자쪽에서 쌀 수입 개방에 관심을 갖는 건 노-농 연대의 의미도 있지만, 실업 급증이라는 노동자 자신의 문제를 걱정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쌀 개방에 따른 농업 붕괴는 지역 경제의 몰락과 실업 급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 때문에 구호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쌀을 고리로 한 민주노총 대구본부의 이런 노-농 연대 움직임은 해당 지역에서 나아가 전국적 차원으로 이어질 것이란 기대감을 낳고 있다. 민주노총 본부와 민주노동당이 나서 전국의 각급 노동운동 단체들에 대해 사내 급식에서 국산 쌀을 사용하도록 단체협약에 못박는 것을 중점 과제로 삼을 태세이다. 이수봉 민주노총 교육선전실장은 “11월 ‘단체협약 준비팀’을 가동하는 대로 우리 쌀 사내 급식 지침을 만들어 각 단위조합에선 이를 반영한 단체협약을 체결하도록 요청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쪽에서도 우리 쌀 사내 급식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하연호 농민·환경담당 최고위원은 “민주노총과 힘을 합쳐 다른 지역으로도 우리 쌀 사내 급식 운동을 널리 전파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 위원은 “노동자는 곧 ‘쌀 소비자’이기도 한 점을 감안할 때 민주노총 전체 사업장으로 확산되는 것은 노-농 연대를 넘어 전체 국민적 시각에서 쌀을 비롯한 우리 농산물의 소중함을 공유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부 딴지 “WTO 협정에 어긋난다”
대구 지역 노동계의 우리 쌀 급식 운동은 지역 학교로도 이어지고 있다. 전교조 대구지부 정명재 지부장은 “쌀 개방에 대비해 우리 쌀을 지켜나가는 차원에서 우리 쌀로 급식하도록 학교 운영위의 결의를 이끌어내는 운동을 벌이겠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대구본부 선언 때 ‘학교 급식에 우리 쌀을 사용하도록 하는 데도 적극 나설 것’이라는 문구가 포함된 게 그 출발점이라고 정 지부장은 설명했다.
사실, 쌀을 비롯한 학교 급식 재료에 국내산 농산물을 쓰도록 하는 운동은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이미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경기도 의회는 지난 9월10일 학교에서 국내산 농산물을 학교 급식 재료로 사용하도록 하고, 여기에 경비를 지원하는 내용의 ‘경기도 학교급식지원조례’를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바 있다. 도의회 의결에 이어 10월20일 공포 시행된 경기도 조례를 보면, 학교 급식 재료는 ‘국내산’이면서 유전자 변형이 이뤄지지 않은 ‘우수 농·축·수산물’을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경기도에 앞서 전북과 경남, 제주도가 이런 내용의 조례를 이미 제정했으며, 특히 제주도는 지난 7월 제주산 친환경 농산물을 급식 재료로 사용하는 내용의 급식조례를 공포해 이미 시행 중이다.
물론, 우리 쌀 사내·교내 급식의 앞날을 마냥 낙관할 수만은 없다. 노동계의 사내 급식 운동이 아직은 대구 지역에 머물러 있을 뿐이며 그나마 내년을 기약한 선언 차원이다.
더욱이 각 지방자치단체의 우리 쌀 교내 급식은 뜻밖의 걸림돌에 부딪혀 있다. 정부가 지역의 학교 급식 조례에서 ‘우리 농산물’ 사용을 명문화하는 것은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어긋난다며 우리 농산물을 ‘우수 농산물’(수입산을 배제할 수 없는)로 바꾸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우리 쌀 교내 급식에 이처럼 ‘딴지’를 걸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외교통상부는 “급식 재료로 국내산 농산물만을 쓰도록 하는 것은 ‘외국산 제품이 국내 원산의 동종 상품이 받는 대우보다 불리하지 않도록 한다’는 WTO 협정 정신에 어긋난다”고 해석한다. 정부조달 협정에서 중앙 정부기관이 직접 구매하는 양곡과 농수산물은 WTO 협정의 예외를 인정받지만 지방정부인 광역자치단체는 이의 적용도 받을 수 없다고 한다. 전남·경북 도교육청이 해당 지역 도의회 의결을 거친 급식 조례를 WTO 협정 위반이라며 대법원에 제소하고, 행정자치부가 경기도 급식 조례에 대한 제소를 검토 중인 것은 외교부의 이런 해석에서 비롯된다.
관건은 지역 주민의 의지

중앙정부쪽의 압박에 따라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제주도를 빼고는 모두 애초 조례안의 ‘우리 농산물’이란 표기를 ‘우수 농산물’로 바꿨으며, 10월25일 조례안을 제정한 충남은 ‘국내산 포함 우수 농산물’로 표시했다. 이빈파 학교급식네트워크 사무처장은 “우수 농산물이란 표현은 포괄적이어서 법적 실효성을 띠기 어렵다”며 “학교 급식 개선과 ‘우리 농업 살리기’라는 조례 제정의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우리 농산물’이란 표기가 WTO 협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쪽에 점점 무게가 실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빈파 처장은 외교부의 유권 해석에 대해 “WTO 눈치보기인 동시에 ‘정치적인 제스처’”라고 풀이한다. WTO 협정 위배 여부를 판단할 권한은 WTO에만 있을 뿐인데, 실효성을 담보할 수 없는 국내 대법원에 제소했다는 점에서다. 외교부와 달리 농림부쪽은 “우리 농산물이냐, 우수 농산물이냐의 용어보다 우리 농산물을 쓰지 않으면 처벌한다는 구체적 행위를 통해 외국산의 접근을 원천봉쇄할 수 있도록 하느냐가 초점”이라며 “우리 농산물 표기에 큰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외교부와 비슷한 태도를 보이던 재정경제부쪽도 실무진에서는 농림부 주장에 공감을 표시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실의 이호중 보좌관은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학교 급식에서 자국 농산물을 쓰도록 하고 있다”며 “외교부가 협정문을 소극적·관료적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정부쪽에서 실제로 걱정하는 것은 WTO 협정 위반보다 각 자치단체에서 잇따라 조례안을 제정하는 데 따라 늘어날 수 있는 예산 부담이라는 분석도 있다. 주민 발의로 시작돼 도지사, 교육감 등 집행부쪽의 지지라는 배경을 깔고 있는 전남·인천·제주·경기의 조례에 대해선 중앙정부쪽의 ‘딴지’가 별로 없었다는 게 그 방증이라고 이빈파 처장은 풀이한다.
결국 노동계의 우리 쌀 사내 급식뿐 아니라 자치단체의 우리 쌀 학교 급식 운동에서도 관건은 해당 지자체와 지역 주민의 ‘의지’인 셈이다.
우리 농산물 사내·학교 급식은 도시와 농촌 마을의 직거래, 생활협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유기농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동시에, 양·질적으로 한 계단 격상된 농촌살리기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법원에 제소된 경남도 급식조례에 대한 변론을 펴고 있는 송기호 변호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환경친화적 농업의 바탕이 될 것
“도시 지역 아파트와 농촌 마을의 직거래는 유통상인을 배제하는 정도의 의미였다. 뒤이어 이어진 유기농 운동은 이보다 거래 규모를 키우고 유기농업의 형성과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지만, 유기농산물에 대한 폭발적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상당 부분을 외국에서 조달해와야 하는 문제에 부딪히고 있다. 이에 견줘 우리 쌀 사내·교내 급식 운동은 그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그 지역에서 소비하는 새로운 차원의 ‘지역순환적·환경친화적’ 농업의 바탕이 된다.”
송 변호사는 “우리 농산물 단체 급식이 농민들에게는 가까운 지역 안에 대규모의 안정적인 소비처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뜻한다”며 “이는 환경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덧붙였다.
윤원석 중앙대 교수(산업경제학과)는 여기에 “우리 농산물 단체급식에 따라 노동계와 교육계가 국민들에게 좋은 인상으로 다가갈 수 있고, 농민소득 증가와 함께 쌀 소비자쪽에는 안전한 ‘먹을거리’를 제공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국민경제적’ 선순환과 연대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한발한발 닥쳐오는 쌀 개방 시대에 미국 카길을 비롯한 거대 곡물 메이저(농업종합상사)의 파상 공세를 막아낼 힘은 대한민국 정부보다 오히려 소비자들의 손에 쥐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 ||||
농산물에 관한 한 자국산을 쓰도록 강력히 유도하는 조처는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특히 단체급식지원 체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농협중앙회 조사연구소에 따르면, 미국은 국내 농산물의 소비 촉진과 식품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처로 1988년부터 현물 지원 규정에 따라 학교·병원·급식소 등 각종 급식 프로그램에 지원하는 모든 농산물과 가공식품에 대해 미국산만 구매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학교 급식에서는 농무부의 현물 지원뿐 아니라 학교에서 자체 조달하는 농산물을 비롯한 모든 급식 재료를 미국산 농산물과 가공식품으로 제한하고 있다. 이는 1997년 학교 급식에 이용된 수입산 딸기에서 식중독균이 검출된 것을 계기로 1998년 학교급식법(NSLA)을 개정한 데 따른 것이다.
학교 급식에서 수입 농산물이 급식 재료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 실정과 견줘 대조적이다.
일본은 학교급식법 등 각종 법률에 따른 행정 지원 체계를 통해 학교 급식 재료로 국내산을 쓰도록 사실상 의무를 지워 농업자원의 활용과 식량 자급도 제고에 이바지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일본 중앙정부는 또 학교 급식용 쌀로 ‘정부미’만 할인 공급하다가 1989년부터 밥맛 좋은 ‘자주유통미’에 대해서도 일정액을 지원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지역 농산물의 소비 확대와 식량 자급률 향상을 위해 학교 급식 재료의 조달과 재정 지원을 연계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이 단체 급식에 국내산을 쓰도록 적극 유도하는 이유는 국민 전체의 식생활과 농업 구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내란 특검 “김건희, 계엄 선포 뒤 ‘너 때문에 망쳤다’며 윤석열과 싸워”

조은석 특검 “윤석열, 대통령실·관저 용산 이전으로 군과 밀착”

유시민 “민주당 뭐 하는지 모르겠다…굉장히 위험”

특검 “대법 계엄 관여 무혐의…조희대·천대엽 동조 사실 아냐”

전재수 “2018년 9월9일 고향 의령서 벌초”…통일교 행사 참석설 반박

김종인, ‘윤석열 별의 순간’ 발언 사과…“완전히 실패한 사람”
![[단독] 전재수 “통일교 행사날 의령서 벌초했다”더니…부산 식당 결제 드러나 [단독] 전재수 “통일교 행사날 의령서 벌초했다”더니…부산 식당 결제 드러나](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15/53_17657761954787_20251215501954.jpg)
[단독] 전재수 “통일교 행사날 의령서 벌초했다”더니…부산 식당 결제 드러나

조은석 특검 “윤석열, 싹 쓸어버리겠다며 반대세력에 적대감”

6개월 만에 등장한 조은석 특검 “윤석열, 사유 없는데도 계엄 선포”

총격범에 몸 날린 시민…시드니 해변 추가 참사 막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