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 과학과 도시]
<font color="darkblue">참혹한 기억에 대한 교훈을 구체적 실험을 통해 알려주는
고베의 지진기념공원 </font>
▣ 고베=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섬나라 일본에서 가장 큰 섬, 혼슈. 그리고 그 혼슈의 서쪽 중심 간사이. 간사이 지방 사람들에겐 가장 이상적인 생활의 모델이 있다고 한다. 교토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고 오사카에서 첫 직장을 잡은 뒤 고베에 정착해 제 집을 갖고 아이들을 기르며 사는 것이다. 그만큼 일본인의 머릿속에서 고베란 곳은 사람이 살기 좋은 괜찮은 도시라는 인상이 깊다.
액상화 현상을 아십니까
그런데 이 살기 좋은 땅이 순식간에 재앙의 도시로 변한 일이 있었다. 아직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한 한신아와이대지진(고베대지진)이다. 1995년 1월17일 대부분 새벽잠에 깊게 잠들어 있던 때 리히터 규모 7.3의 강진이 시가지를 덮쳤다. 엿가락처럼 휘어진 고가도로, 종이로 만든 집처럼 형편없이 구겨진 주택, 끊긴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버스…. 당시 6432명이 목숨을 잃었고 4만여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30여만명이 집을 잃었다. 고베시의 1년 총생산량과 맞먹는 9조엔의 재산 피해가 났다.
이 뼈아픈 흔적은 지진이 일어난 지 9년이 흐른 지금도 고베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아직 아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영원히 아물 수 없을 깊은 상처처럼 말이다. 시내 번화가에 자리잡은 히가시유엔치 공원(동유공원)에는 멈춰버린 시계탑이 있다. 5시46분. 지진이 났을 때 시계탑이 쓰러지며 기록한 시각이다. 누군가에겐 영원히 멈춰버린 시간이 되었을 그 순간을 생각하며 오늘도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다.
여객선 항구와 해양박물관, 포트타워가 있어 시민들이 자주 찾는 부두, 메리켄파크지구엔 지진기념공원이 있다. 1997년에 개장한 이 기념공원엔 지진으로 부두가 부숴진 장면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가로등은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고, 이리저리 깨진 콘크리트 조각이 찌를 듯 아프다. 이곳은 그나마 훼손이 덜해 지진 직후 일본 전역에서 실어온 구호물자를 부리는 임시 선착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시 동남쪽 하트(HAT) 지구에 바다를 마주하고 서 있는 지진기념관은 이 참혹한 기억을 교훈으로 되새기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지진기념관 옆엔 고베시지진방재청, 기상대 등을 비롯해 방재 관련 건물들이 몰려 있다. 이 가운데 3년 전 문을 연 지진기념관은 평균 하루 2천여명이 찾는 곳이다. 500엔의 관람료를 내고 들어간 지진기념관은 처음부터 겁을 주었다. 관람의 첫 코스인 ‘1·17극장’에는 ‘지진 당시 실제 상황을 촬영한 것이니 컨디션이 좋지 않으신 분은 시청하지 말라’는 주의문이 붙어 있었다. 시내 곳곳에서 파괴가 시작되는 모습을 보며 7분간 숨을 죽이다 겨우 관람을 마쳤다.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된 시가지를 재현한 복도를 지나 또 다른 극장으로 향했다. 지진에서 살아남은 한 소녀가 어떻게 다시 ‘삶’을 찾게 되었는지를 13분 동안 다큐 형식으로 보여줬다. 극장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고 나 역시 흐르는 눈물을 연방 훔쳐야 했다.
그러나 지진기념관은 이처럼 기억을 정서적으로 환기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지진의 원리가 어떤 것인지, 어떤 피해를 입게 되는지, 평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등을 과학적 실험을 통해 가르쳐주는 것이다. 고베지진의 경우 육지에선 도로와 건물이 붕괴되고 지반이 갈라지는 일이 벌어졌고 포트아일랜드 등 인공섬에선 액상화 현상이 일어났다. 액상화 현상이란 지반이 흔들리며 지하수가 솟구쳐올라 물바다가 되는 현상이다. 액상화가 일어나면 도로가 유실될뿐더러 콘크리트 파일로 암반에 단단히 고정하지 않은 건물들은 쓰러지기도 한다. 기념관에선 이 액상화 현상을 간단한 실험을 통해 증명하고 있었다. 젖은 모래가 담긴 플라스틱 바구니 위에 모형 집을 올려놓는다. 플라스틱 바구니를 흔들면 물이 서서히 차올라 모래 표면을 흥건하게 적신다. 기반공사를 철저히 하지 않은 모형 집은 기우뚱 넘어지고야 만다.
침대 주변 물건은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가
안내를 맡은 자원봉사자는 건물의 내진설계에 대한 설명도 간단한 실험도구로 명쾌하게 들려줬다. 건물 밑에 충격을 흡수하는 면진장치(베이스 아이솔레이터·base isolator)를 시공했을 때 그렇지 않은 경우와 어떻게 다른지, 또 건물을 V자 빔으로 엮은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충격을 주었을 때 흔들림의 차이가 어떠한지를 한눈에 보여줬다. 고대 일본인들은 전통적으로 지진을 바닷속 메기의 움직임 때문이라고 믿어왔다. 기념관의 한 실험도구는 메기 모양의 진동장치가 지표와 가까운 곳에서 움직일 때와 지표 깊숙한 곳에서 흔들릴 때 그 충격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보여준다. 1995년 당시 피해 사례를 종합해보면 집 안에서 가구에 깔려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다. 기념관에선 실내 가구 모형을 만들어놓고 여기에 충격을 주었을 때 피아노가 어떻게 넘어지고 냉장고가 어떻게 쓰러지는지 등을 보여주며 침대 주변에 물건들을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일러준다.
지진기념관에서 만난 한국 태생의 중국인 자원봉사자 왕희주씨는 “95년 이후 고베의 대부분 가정에선 피난용 배낭을 문 옆에 항상 준비해둔다”고 말했다. “5년 동안 보관이 가능한 생수, 캔으로 포장해놓은 빵 같은 비상식량을 비롯해 혼자 고립됐을 때 구조원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릴 수 있는 호루라기, 손전등,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질 때 필요한 알루미늄 소재의 담요 같은 것을 항상 가방에 챙겨두지요. 사람들은 지진과 함께 살아가고 있어요.”
지진기념관 앞에 놓인 위령탑은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졌다. 역시 5시46분을 형상화한 이 탑 안에는 6432명 희생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 희생자의 이름이 들어 있는 푸른 돌을 가만히 지켜보려니 슬픔이 방울방울 돋아난다.
왕희주씨는 기념관 밖에까지 따라나와 전송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기 철쭉들 좀 보세요. 염분이 섞인 바다바람 때문에 잎이 온통 갈색으로 변했어요. 그런데 참 이상하죠? 철쭉도 나무도 매일 염해에 시달리는데 신기하게도 봄이 되면 새살이 돋아나요.”
식물만이 아니었다. 사람들도 자연이 주는 시련를 힘으로, 슬기로 키워가고 있었다.
<table width="480" cellspacing="0" cellpadding="0" border="0"><tr><td colspan="5"></td></tr><tr><td width="2" background="http://img.hani.co.kr/section-image/02/bg_dotline_h.gif"></td><td width="10" bgcolor="F6f6f6"></td><td bgcolor="F6f6f6" width="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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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전기·가스관을 섬세하게 설계하자”</font>
모리야마 마사카즈 고베대 공학부 교수는 “일본의 경우 건물의 내진설계에 대해선 이미 1978년께 법적인 제한을 마련했으며, 이후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을 지을 때마다 이 법을 엄격히 적용해왔으므로 개별 건물의 내진설계는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상수도·전기·가스관 등의 시설들이 지진에 대비하여 섬세하게 설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1995년 대지진 때는 가스관 파열로 인한 화재 피해가 엄청났다. 가스관을 신축성 있는 폴리에스테르 소재로 만들었더라면 지진이 났을 때 쉽게 파열되지 않았을 것이다.” 중학교에 입학하는 소년이 키가 자랄 것을 대비해 품과 길이가 넉넉한 교복을 맞춰 입는 것처럼 도시의 모든 시설들은 만일의 진동·충격에 대비해 신축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설계돼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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