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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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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속에서 빛나는 ‘행복의 찰나’

등록 2004-09-09 00:00 수정 2020-05-03 04:23

베트남 사진작가 도안 득 민의 렌즈에 잡힌 고엽제 환자들, 그 희망과 낙관의 표정들

▣ 호치민= 사진 · 글 도안 득 민(Doan Duc Minh)/ 사진작가
▣ 번역= 구수정 전문위원


은 고엽제 환자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삶을 포착해온 도안 득 민의 사진을 입수해 공개한다. 이 사진은 호치민 전쟁박물관 사진전에 초청된 작품으로, 극한의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희망과 낙관의 표정들을 보여준다. - <i>편집자</i>


쿠앙치 성에 도착해서 득씨의 집을 물었을 때, 누구나 그의 집을 알고 있었다. 아, 그 머리 두개 달린 아이의 집 말이지요? 저기요, 저기! 도안 득 유엔(8)의 아버지 도 득은 고엽제가 가장 심하게 뿌려졌다는 자라이 콘툼 지역에서 4년간(1987~91) 군대 생활을 했다. 그는 세 자녀를 두었지만 둘만이 살아남았다. 하나는 좀 모자라고, 또 다른 하나는 머리에 큰 혹을 달고 있었다.

유엔은 날 때부터 눈도 없었고, 코도 입도 없었다. 단지 한곳에 누워서 가느다란 신음소리만 토해냈다. 대만 자선협회의 도움으로 수술을 받은 뒤에야 그는 그나마 조금은 사람에 가까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아니,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이제 유엔이 어머니와 함께 환한 웃음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처럼, 운명의 극한점에 섰던 유엔은 생존의 본능으로 그 모든 고통을 이겨냈다. 나는 그저 유엔이 어느 날엔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져 있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여자의 이름은 린?. 껀터 사람이다. 그는 항미전쟁 기간 내내 우민, 동탑, 껀터 등의 전선을 돌며 가무단원으로 활약했다. 어쩌면 젊은 시절 그 낙관의 힘으로 그가 이제껏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의 남편은 릉 후에 꾸언. 1939년에 태어났고, 1958년에 전쟁에 참가했으며, 1997년에 죽었다. 그리고 그는 세 아이도 차례로 잃었다. 1978년에 떤쭝이 죽었고, 79년에 탕쭝이 죽었고, 1982년에 피쭝이 죽었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잘 놀고, 잘 컸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시력이 희미해지더니 한달 뒤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 뒤에 고열이 치솟았고, 그리고 뇌부종으로 부모의 팔에 안겨 죽었다. 세 아이 모두 똑같은 증상으로 죽어갔다. 세 아이를 차례로 떠나보내던 당시에 그는 고엽제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이제 자신도 고엽제 환자가 되어 병상에 누워 있는 그는, 아니 사진 속의 그토록 아름답고 순한 여인은 내게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하염없이 울었다….

응웬 빈(38)은 두살 때 병이 찾아왔다. 팔다리부터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 응웬 삿은 호이안 지역 캄호아에 주둔하던 남베트남군 병사였다. 어머니 응웬 티 쫍(62)은 매일 집 앞에서 케나무 열매를 팔아 생계를 이어간다. 빈이 40년 가까이 누워서 지내온 침대를 떠날 수 있는 시간은, 3일에 한번 ‘들려서’ 목욕을 하러 갈 때이다.

그의 눈빛은 누구를 만나든 불안하게 흔들린다. 그래도 빈은 눈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에게 언제쯤 결혼할 거냐고 물었다. 빈이 곱은 손으로 자신의 배를 가리킨다. 어머니가 그의 말을 대신한다. “자기랑 결혼하면 뭐 먹고 살거냐고요.”

즈응 민 띤 가족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이 지상의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떤은 1963년에 항전에 참가하여 제9군구의 주력부대로 활약했다. 그의 전장은 주로 서남부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그의 다섯 아이가 모두 기형아로 태어났다.

즈응 낌 니(27), 신장 1m, 몸무게 14kg. 즈응 투이 끼에우(25), 키도 몸무게도 그의 언니와 같다. 그리고 이제 멀쩡하게 태어나 그의 마지막 희망으로 자라던 여섯째 아이 즈응 탄 타이의 근육도 비쩍 말라가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는 고엽제 환자를 자식으로 둔 록 할아버지의 고단한 삶에 대해서 듣고 있었다. 그때 뚱의 두 팔이 허공을 휘저었다. 순간 나는 그가 무언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알아챘다. 어쩌면 그도 아버지와 함께 무언가 해명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는 무엇을 호소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어떤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은 걸까? 나는 그 몸짓 속에서 단지 탄식만이 아닌, 살고 싶다는, 아니 살아야만 한다는 의지를 읽었다.

쯩 티 냔이 그의 아들과 함께 어머니 쯩 티 후에의 영정 사진을 들고 있다. 어머니는 베트콩이었다. 쿠러이, 빈롱 지역에서 혁명에 가담했고, 그 뒤 후방에서 활약했다. 어머니는 고엽제라는 지루하게 긴 병마와 씨름하다 5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지루한 병이 다행히 그녀를 비껴가는 듯했는데, 결국엔 질기게도 살아남아 그의 아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나는 멘의 얘기를 듣자마자 곧장 타이빈 성, 부트 마을로 달려갔다. 21살의 여성. 평생을 우리에 갇혀 살아야 하는 비운의 고엽제 환자.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야위어가는 그를 보며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아주 드물지만 그가 입을 열어 웃을 때 드러나는, 하루 종일 손에 잡히는 거라면 무엇이든 게걸스럽게 씹어 삼킨다는, 그 이상하리만치 크고 튼튼한 치열을 볼 수 있었다. 여러 번,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 내려놓았다. 그토록 끔찍한 운명과 함께 살아야 하는 이 사람의 형상을 묘사할 어떠한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 멘이 자신의 아버지를 알아보고 손을 내밀던, 그가 사람으로 일어서던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셔터를 누를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정신질환자들과 가까이 생활하다 보면, 그 어떤 무의식적인 몸짓보다도 그들의 두 눈을 통해서 그들의 행동과 의식을 더 쉽게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고엽제 환자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그 사실을 알았다. 구치 지역의 쭝럽 마을, 또 반 모 할머니의 집을 찾아가서야 나는 그 찰나의 눈빛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티 후에(27)의 그 눈은 그때부터 착 달라붙어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다. 그곳에는 초라한 이엉집에 삶에 찌든 지친 노모와 한 정신질환자가 단 둘이 고독하게 살고 있었다.



“다만 ‘예쁘게’ 찍고 싶었다”

죽음의 벽을 뚫고 나가는 고엽제 환자들의 생명력을 포착한 사진작가 도안 득 민 이야기
▣ 호치민= 구수정 전문위원 chaovietnam@hotmail.com

호치민시 전쟁박물관은 한두 시간 남짓이면 꼼꼼히 돌아볼 수 있는 작은 박물관이다. 그런데도 이곳에서는 늘 빠른 걸음으로 걷게 된다. 포르말린 용액에 담긴 투명한 유리병 속의 기형아, 네이팜탄에 거멓게 구워지고 집속탄의 파편이 소름처럼 박힌 몸뚱어리들, 누런 뇌수가 쏟아져나온 이마, 목이 달아난 주검을 앞에 두고 자랑스럽게 잘린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미군 병사들. 아, 그리고 겹겹이 포개어진 주검더미 사이로 드러난 젖먹이의 발가벗겨진 아랫도리…. 이 처참한 광경들을 물끄러미 응시할 수 있는 서늘한 심장은 없다. 한줌의 사색도 허락치 않는 이곳이야말로 전세계 어느 박물관보다 가장 ‘전쟁박물관’다운 곳이 아닌가.
이 빌어먹을 박물관에는 작열하는 열대의 태양을 피할 변변한 나무 그늘조차 없다. 저 환장할 놈의 햇빛만 아니었다면, 작가는 바뀌지만 늘 동일한 주제로 고엽제가 전시되는 그 방 안으로 불쑥 발을 디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엽제란 또 얼마나 진부한 주제란 말인가!

내가 멀쩡하게 살아서 아직도 이 난장의 한복판을 별 탈 없이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데 얼마간 안도감이 들다가, 이내 가슴 한켠이 불편해지고 울컥 짜증이 돋던 그 순간에 나는 도안 득 민의 사진과 마주쳤다. 그의 작품 하나하나 앞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고, 그의 사진들 사이를 산책하듯 걸었다.
내가 주문한 대로, 도안 득 민은 한 움큼의 사진을 들고 나타났다. 사진들은 하품이 터져나올 정도로 더디게 한장한장씩 내 손에 건네졌다. 그는 한때 그의 피사체가 되었던 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나이, 가족관계, 병증뿐만 아니라 그 집안의 속사정, 저마다 가슴 깊이 묻어온 사연, 심지어 몇년에 누가 태어나고, 군대에 가고, 또 병이 들고, 세상을 뜨고 하는 것까지 죄다 꿰차고 있었다. 장황하다 싶을 만큼 자상하게 사진 속 사연들을 풀어내면서도 그는 적이 불안한 시선으로 내 취재수첩을 흘깃거렸다. 인터뷰 내내 나는 마치 받아쓰기 시험을 보는 아이처럼 괜스레 마음을 졸이며 철자 하나하나에까지 잔신경을 써야 했다.
“2001년부터 고엽제 환자들을 찍어왔어요. 내가 찍은 사진들인데도 너무 참담하고 끔찍해서 차분히 들여다볼 수가 없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내 사진 속에 아주 중요한 무엇인가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챘어요.” 그래서 그는 다시 길을 떠났다. 짧게는 하루이틀, 길게는 사나흘씩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그들의 억울한 얘기를 다 들어주고 난 뒤에야 카메라를 들었다. 그렇게 오래오래 기다려서 그가 앵글 속에 담아낸 것은 ‘고단함 속에서도 피어나는 행복의 찰나’였다. 리얼리즘이라는 게 전광석화처럼 빠른 이해를 돕는 데 아주 유용한 것은 틀림없지만, 때론 극명하게 사실적인 것들이 외려 비현실감을 낳기도 한다.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잔인한 광경들 앞에서 내가 자꾸만 불편한 거리두기를 시도했던 것처럼.
도안 득 민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카메라의 초점이 ‘상처’에 맞춰져 있지 않다. 셔터가 눌러지는 것은 한순간이었겠지만, 그의 사진 하나하나가 한편의 이야기다. “뭐, 사진 찍기가 얼마나 대단한 작업이라고, 그들의 상처를 다시 발기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다만 ‘예쁘게’ 찍고 싶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토록 힘겹게 절망보다는 희망을, 비관보다는 낙관을,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의 벽을 뚫고 나가는 생명력을 포착하려고 애썼던 것은, 사람의 형상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몰골로라도 이 지상에 그들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기억이 나는데, 그의 사진전 제목은 ‘살아야만 한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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