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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정 대타협, 시동 걸리나

등록 2004-09-03 00:00 수정 2020-05-03 04:23

“경제 챙겨라” 여론 의식한 열린우리당 나서… 노동계는 정부쪽에 집중, 재계는 ‘무시’

▣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열린우리당이 노·사·정 대타협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정치권이 입법부에서의 법안·예산 심의라는 고유 영역을 벗어나 사회적 현안을 직접 짊어지겠다고 나서는 것은 드문 일이다. 이와 관련해선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시절에 한광옥·조성준 전 의원 등이 나서 노사정위원회를 구성해 정리해고제 도입 등을 뼈대로 하는 대타협을 이뤄낸 일이 있다. 열린우리당의 최근 움직임은 그때 이어 두 번째 일로, 귀추가 주목된다.

한나라당의 ‘네덜란드 모델’에 자극 받아

열린우리당은 8월30일 상임중앙위원회를 열어 노사정대타협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임채정 의원, 간사에 이목희·이계안 의원, 그 밖에 강봉균·우원식·조정식·김영주 의원, 김호진·김영대씨 등을 위원으로 선임했다. 이목희 의원은 노동계 출신으로 당 5정책조정위원장이며, 김대환 노동부 장관, 김금수 노사정위원장, 이원덕 청와대 사회정책수석과 ‘여권 노동정책 조정 4자 테이블’을 운영하고 있다. 이계안 의원은 현대자동차 회장 출신으로 당 제2정책조정위원장을 맡고 있다.

이목희 의원은 “앞으로 두달 정도 목표 시점을 정하고 노사 단체들을 집중적으로 접촉해 일자리 창출과 경제회복을 위한 대타협 선언을 이끌어낼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각의 오해와 달리 노·사·정 국민협약 따위를 만들자는 것은 아니다”며 “그와 별개의 포괄적 타협 선언을 만드는 게 목표이며 협약이건 아니건 최종적인 결실은 노사정위원회에서 이뤄지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노·사·정 대타협을 새로운 과제로 잡은 데는 몇 가지 배경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첫째로는 여권이 과거사 진상 규명을 우선적 어젠다로 설정하면서 갖게 된 부담을 의식했다고 한다. 열린우리당 관계자는 “과거사뿐만 아니라 경제와 민생을 챙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큰 것 아니냐”며 “노·사·정 대타협을 끌어낸다면 경제와 민생 회복을 위한 사회심리적 처방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에선 이부영 의장이 진작부터 이런 주장을 하던 터에 마침 그가 의장직을 승계하면서 추진기구 구성 등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두 번째로는 이한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이 네덜란드 모델로의 대타협을 언급한 데서 자극받은 측면도 있다. 이 의장은 “노조의 경영참여는 안 된다”면서도 네덜란드 모델(노조는 임금동결과 해고절차 간소화 동의, 사용자는 노조의 경영참여 허용과 고용확대)을 참고할 필요성을 선도적으로 제기했다. 이에 열린우리당은 8월24일 중진들의 모임인 기획자문회의(위원장 임채정)에서 ‘노·사·정 대타협 추진 착수’ 원칙을 결정했다고 한다.

노·사·정이 대타협을 하려면 각 경제주체가 자신들이 양보할 꾸러미를 내놓고 상대방이 내놓는 것을 챙겨가는 거래가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 노사정대타협추진위는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우선 사용자쪽에선 일반적 경영방침은 건드리지 않되 고용 조정, 즉 노동자를 자를 때 노조와 사전 협의를 거치도록 하는 수준에서 제한적 경영참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이를 ‘한국적 경영참여’라고 부른다. 또 사용자쪽은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위한 전향적 조처를 해야 한다. 열린우리당의 고위 관계자는 “동일노동 동일임금까진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임금과 신분, 기능훈련에서의 차별을 꽤 줄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 “노동계 백기 들 마당에…”

정부쪽에선 노동쟁의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을 사용자가 남용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대책을 내놓도록 할 것이라고 열린우리당은 설명하고 있다. 법무부는 이와 관련해 민법 개정안을 준비했는데, 여기에는 △손배소 가액이 임금채권의 2분의 1을 넘지 않도록 △최저임금은 보장 △조합비에는 적용 금지 등이 포함돼 있다. 다만, 법무부가 이미 국회 제출까지 마친 상태여서, 노동계가 ‘추가 선물’로 받아들여줄지는 의문스러운 면도 있다. 열린우리당은 이 밖에 퇴직연금제 등도 절충의 여지가 있다고 설명한다.

노조쪽은 △과도한 임금인상 자제 △일부 대기업에서의 노동 유연화 확대 △노동연대기금 조성 등의 형태로 비정규직 배려 등을 부담해야 한다는 게 열린우리당의 생각이다. 이목희 의원은 “우리나라에서 노동 유연화는 이미 충분히 돼 있다”며 “다만 일부 대기업에서 사내 부서 배치 전환까지 노조 협의를 거쳐야 하는 문제 정도는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에 대해 노동계는 일단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민주노총은 8월26일 논평을 내어 “지금 노·사·정간의 조심스러운 대화가 진행되고 있다”며 “정치권은 정치나 똑바로 하라”고 주장했다. 이상학 민주노총 정책실장은 “노·사·정간 대화를 정치권이 도와줄 순 있겠지만 나설 일은 아니다. 정당이 끼는 것을 반대한다”고 말했다.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도 8월26일 기자간담회에서 “노·사·정 대타협은 정치권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노동계의 반응은 정치권에 대한 깊은 불신 탓으로 해석된다. 정치권이 경제난을 들이대며 또다시 여론몰이를 해서 노동계를 압박하려는 의도가 아니냐고 의심하는 셈이다.

노동계는 대신에 정치권이 아닌 정부를 상대로 문제를 푸는 방안에 무게를 싣고 있다. 민주노총이 8월25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를 만드는 방안’ 추진을 결정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즉, 공무원노조, 비정규직, 퇴직연금 등 산적한 제도개선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노·사·정 차원의 중앙교섭 필요성에 예전에 없이 적극적 관심을 갖되 “정치권이 끼는 것은 좀 그렇다”는 입장인 셈이다.

반면에 재계는 열린우리당의 움직임에 성명, 논평도 내지 않는 등 ‘무시’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올해 노동쟁의가 상대적으로 낮은 강도에서 마무리되자 전투적 노동운동 자체가 한계에 부닥친 것으로 보는 게 재계의 요즘 기류”라며 “노동계가 스스로 백기를 들고 나올 마당에 구태여 노·사·정 대타협이 왜 필요하냐고 보는 견해가 많은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즉, 정치권이 끼건, 정부가 나서건 형식에 관계없이 노·사·정 대화 자체를 썩 반기지 않는 게 요즘 재계 분위기라는 것이다.

“앞으로 재계 설득에 무게 둘 것”

이런 가운데 노사관계 전문가인 이정식 서울디지털대 교수(전 한국노총 정책본부장)는 “노동계가 정치권에 불신을 품는 것은 그동안의 내력으로 볼 때 이유는 있다”며 “그러나 정치권이 기왕에 나선다면 노동계가 마음을 열고 정치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참여정부 첫해와 달리 올해는 노동계와 정부 사이에 그런대로 대화 필요성에 대한 의견 접근이 이뤄진 반면에 재계가 비타협적이라는 구도 변화가 생겼다”며 “정치권이 재계를 설득하고 압박하는 역할을 해주는 게 대타협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목희 의원은 “노·사·정 대타협이란 게 노동계에 손해를 입히려는 게 아니다”며 “앞으로의 활동도 대화에 소극적인 재계를 설득하는 쪽에 좀더 무게를 둘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재계를 설득하는 데 정부보다는 정치권이 좀더 자유로운 처지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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