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제기간 8년 설정한 가혹한 개인회생제도… 신용불량자 마지막 구제카드도 채무자들 호응없는 휴짓 조각 되려나
▣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신용불량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마지막 제도로 기대를 모았던 개인회생제도가 제구실을 못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3월 국회에서 ‘개인채무자회생법’이 통과돼 오는 9월23일부터 시행되는 개인회생제도는 소득이 있는 채무자가 일정 기간 동안 자신의 소득에서 최저생계비를 뺀 나머지로 빚을 성실하게 갚아나가면, 나머지 빚은 면제해주는 제도다. 그러나 법이 변제기간을 최장 8년으로 정한데다, 법원도 그 이하로 변제기간을 단축해서 운영할 수는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 채무자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8년간 최저생계비로 살아야 한다면, 채무자들이 빚을 갚을 의욕을 잃고 아예 이 제도를 이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8년간 최저생계비로” 때문에 외면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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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그동안 여러 제도를 통해 신용불량자 구제에 나섰지만, 신용불량자 수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은행연합회 집계를 보면, 지난 7월 말 현재 개인 신용불량자는 370만여명에 이른다. 신용불량자 수는 6월 중 4만여명이 줄었다가 7월 들어 다시 6693명 늘어났다. 신용불량자 구제제도가 작동되고 있는데도, 신용불량자에서 벗어나는 사람보다 새로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이 더 많았다는 얘기다.
물론 신용불량자는 30만원 이상 연체가 3개월을 초과한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신용불량자가 자력으로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거액의 채무가 쌓여 빚을 갚을 길이 없거나, 빚을 갚을 의욕을 아예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지난해 8월25일 정부가 신용불량자 대책을 발표했을 때, 여러 금융기관에 3천만원 이상의 빚을 연체한 신용불량자는 80만명이었다. 현재는 12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바로 이들이 가장 큰 문제다.
그동안 시행된 여러 신용불량자 구제제도는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다. 가장 먼저 시행된 제도는 신용회복지원제도였다. 2002년 11월부터 시행된 신용회복지원제도는 흔히 ‘개인 워크아웃’ 제도라고 불린다. 2개 이상의 금융기관에 3억원 미만의 대출을 받은 신용불량자 중에서 빚을 갚을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빚 갚는 기간을 최장 8년까지 연장해주고, 이자도 낮춰주는 제도다. 금융기관이 서로 먼저 돈을 받겠다고 할 경우 채무자가 의욕을 잃게 되고, 또 개인으로서는 빚을 갚기 보다는 파산을 선택하게 되기 때문에 서로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자는 게 이 제도의 취지다. 그러나 이 제도를 적용받을 경우, 최장 8년까지 모든 빚을 나눠 갚아야 한다. 연체이자에 대해서는 일부 탕감해주지만 원금은 탕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 제도는 부도나 휴업, 실직 등으로 일시적으로 돈이 부족해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지난 7월 말까지 신용회복지원 신청자는 21만8514명이다. 그동안 상담자가 61만여명에 이르는 것에 비하면 저조한 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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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채 포함한 원금 탕감… 파산선고 없어
신용회복지원제도를 통해서도 신용불량자가 의미 있게 줄어들지 않자, 지난 5월 정부가 새로 도입한 제도가 이른바 ‘배드뱅크’다. 600여개 금융기관이 공동출자하여 한마음금융이란 회사를 설립한 뒤, 금융기관들이 갖고 있던 신용불량자에 대한 채권을 이 회사로 넘겼다. 한마음금융은 신용불량자가 빚의 3%만 우선 상환하면 장기저리로 기존 금융기관에 빚을 갚을 수 있도록 돈을 빌려줘 신용불량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신용불량자는 빚을 최장 8년간 배드뱅크에 분할상환하면 된다. 배드뱅크는 일정 기간 성실하게 빚을 갚아나가면 추가로 빚을 탕감해주고, 상환기간도 연장해준다. 배드뱅크 제도는 애초 8월20일까지 3개월간만 한시적으로 운영하기로 했으나 신청자가 많지 않아 추가로 3개월 더 연장하기로 했다. 3개월간 이 제도를 통해 신용불량자에서 벗어난 사람은 10만7875명에 그쳤다.

두 제도를 통해 신용불량자에서 벗어난 사람은 30만여명으로 전체 신용불량자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이는 이 제도들이 신용불량자들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용불량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미 정상적으로 빚을 갚을 능력을 잃었다. 신용불량자들도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데, 소득에서 생계비를 빼고 남은 돈으로 8년 안에 빚을 나눠 갚기 어려운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실제로 배드뱅크에서 대부 승인을 받고도 3%에 불과한 선납금을 마련하지 못해 승인이 취소된 사례가 1만2956건이나 됐다. 10명 중 1명이 넘는다. 그동안의 신용불량자 구제제도는 거액의 채무를 지고 있으나 소득이 적은 사람은 아예 이용할 엄두를 내기도 어려웠다. 원금 탕감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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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액의 빚을 진 사람들이 선택하는 또 하나의 출구는 ‘개인파산’이다. 이는 자신의 재산과 수입으로 도저히 빚을 감당하기 어렵게 된 개인이 법원으로부터 ‘파산’을 선고받는 제도다. 물론 파산 선고를 받는다고 해서 빚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파산 선고 이후 별도로 신청하는 ‘면책’ 신청이 받아들여질 경우 빚이 모두 탕감된다. 그런 점에서 개인파산은 신용불량자들의 마지막 탈출구다.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개인파산을 신청한 사람은 3856명으로 2002년의 1335명, 2001년의 672명보다 크게 늘었다. 올해 상반기에도 3759명이 신청해, 지난해 한해 동안의 신청자 수에 육박했다. 법원은 개인파산자에게 적극적으로 면책을 허가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 파산 선고를 받은 사람 중 일부 또는 전부 면책을 받은 비율은 95%에 이른다. 이는 법원이 신용불량자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채무자의 처지를 적극적으로 고려해 판결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파산은 현재의 직장과 사업을 유지하면서 신청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문제다.
개인회생제도는 그동안의 신용불량자 구제제도와 개인파산제도를 대신해 신용불량자들을 구제할 마지막 제도로 기대돼왔다. 이 제도는 채무자들이 앞으로 발생할 수입으로 빚을 일정 기간 나눠 갚고 그 기간 동안 빚을 갚으면 나머지 빚은 면제받는 것을 뼈대로 한 제도다. 사실상 원금 탕감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워크아웃이나 배드뱅크와 다르고, 파산 선고가 내려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인파산제도와도 다르다. 개인회생제도는 금융기관 채무만이 아니라, 사채를 포함한 모든 채무(무담보채권 5억원, 담보채권 10억원 한도)를 대상으로 한다. 이들 채무를 어떻게 갚을 것인지 채무자가 작성한 변제계획을 채권자의 뜻과 무관하게 법원이 승인하면 그대로 시행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즉, 채무자가 자신의 수입을 바탕으로 일정 기간의 변제계획을 세워 법원이 이를 승인하면 그 계획대로만 빚을 갚으면 나머지 빚은 탕감되는 것이다.

개인회생제도는 오랫동안 정부 주도로 입법이 추진돼왔으나, 지난 3월에야 국회에서 법이 통과돼 9월23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그러나 국회 통과 과정에서 법 조항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최장 5년’으로 추진되던 변제기간이 재정경제부의 요청에 따라 ‘최장 8년’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즉, 채무자는 자신의 소득에서 최저생계비를 뺀 돈으로 5년간 성실하게 빚을 갚으면 되던 것이 최장 8년간 갚도록 바뀌게 됐다. 재경부는 신용회복지원제도나 배드뱅크가 채무변제 기간을 8년으로 하고 있는데, 개인회생제도가 5년간 빚을 갚는 것으로 모든 빚을 정리해준다면 채무자들을 도덕적 해이에 빠뜨리게 된다며 수정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외국과 비교할 때 우리나라의 8년은 매우 변제기간이 길어 채무자에게 가혹한 것이다. 일본의 민사재생법은 재생계획 인가결정 확정일로부터 3년간 빚을 갚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5년간으로 연장시켜 재생계획을 짤 수 있게 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도 변제기간을 3년을 초과해 작성할 수 없도록 하고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만 법원이 2년의 범위 안에서 기간 연장을 허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기간 연장은 채권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채무자를 위한 것이다. 법원쪽도 ‘8년’으로 돼 있는 우리나라의 변제기간이 외국에 비해 길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법원행정처 서경환 송무심의관은 “변제기간을 8년으로 할 경우 채무자에게 가혹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 · 미국 모두 최소 3년부터
물론 법 조항 자체는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개인회생법 제71조 5항은 “변제계획에서 정하는 변제기간은 변제 개시일부터 8년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법 조항으로만 보면 법원이 재량권을 발휘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1997년 민사회생제도가 도입되기 전에 법원에서 일부 변제 뒤 면책제도를 운영할 때 도박으로 빚을 진 경우 2~3년, 신용카드 이용으로 인한 낭비의 경우 6개월~1년 정도 빚을 갚으면 면책을 해준 예가 있다. 그동안 개인회생법이 기대를 모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법원이 개인파산 신청 사건에 대해 채무자의 처지를 적극적으로 고려했던 것처럼, 개인회생제도의 운용에서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법원은 최장 8년으로 돼 있는 변제기간을 단축해 운영하는 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 채무자가 8년 동안 나눠 갚아도 빚을 다 갚지 못하면서도, 5년 동안만 빚을 갚겠다는 변제계획을 낼 경우 승인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법원쪽은 그렇게 제도를 운영하면, 입법부의 권한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보는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개인회생제도를 택하려면 빚 규모에 따라 길게는 8년까지 최저생계비만으로 살 각오를 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이에 대해 김남근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변호사)은 “8년씩이나 최저생계비 이하의 가혹한 생활을 견뎌내야 면책을 받을 수 있다면, 매우 큰 규모의 빚을 지고 있는 채무자들 외에는 개인회생제도 이용을 회피할 것”이라며 “개인파산제도 시행 초기처럼 제도가 사문화하는 부작용이 발생할 것으로 우려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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