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주류와 정면대결 피하지 않는 정치인들… 한나라당 ‘구례대첩’은 누가 이끌었나
|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구례대첩.
한나라당이 전남 구례에서 큰 전투를 치렀다. 앞뒤 사정을 모르고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아마 ‘구례 군수 자리를 놓고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혹은 민주당 후보가 세게 붙었나 보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당내 전투였다. 박근혜 대표를 비롯한 주류와 이재오·김문수·박계동·고진화·배일도 의원 등을 주축으로 한 비주류가 맞붙은 싸움이었다. 8월29일 전남 구례군 농협연수원에서 열린 한나라당 의원 연찬회 이틀째 밤이었다.
연찬회 전부터 전투 분위기
사실 이번 싸움은 연찬회 이전부터 어느 정도 예견됐었다. 본디 연찬회는 9월 정기국회를 앞두고 과거사와 행정수도 등 각종 현안의 조율과 함께 의원들의 단합을 모색하는 성격을 띠는 자리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나라당의 정체성과 개혁 방안, 당명 개정 등 주류와 비주류가 정면으로 맞붙을 소재들이 테이블 위에 여런 건 올라와 있었다. 부산 출신의 한 중진의원은 연찬회 이틀 전인 8월27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번 연찬회는 이슈 파이팅이라기보다는 당내 권력 투쟁 성격이 짙다”며 “정기국회를 앞두고 이런 자리를 굳이 만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예견은 적중했지만 충돌의 강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비주류쪽은 연찬회를 앞두고 따로 워크숍을 열어 일전을 준비했다. 카드는 2가지였다. 과거사와 수도이전. 당내 최대 모임인 국가발전전략연구회(이하 발전연) 소속 의원 19명은 8월27일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 현대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부분에 대한 반성”을 촉구했다. 이 자리에서 김문수 의원은 “박근혜 대표가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을 사퇴해야 한다”고 밝혀, ‘부정적인 과거사’가 박 대표를 정면으로 겨냥한 것임을 드러냈다. 연찬회에서 서명 의원들은 “대응을 잘못하면 박 대표뿐만 아니라 (한나라당) 모두 다 피해자가 된다”(김문수 의원), “이사장 사퇴뿐 아니라 정수장학회를 국가에 헌납하라”(박계동 의원), “정기국회 전에 해결하라. 그렇지 않으면 친일당, 독재옹호당 그런 수식어가 붙을 거다”(고진화 의원) 등의 발언으로 압박 강도를 더했다. 이에 박 대표가 “순수하지 않은 목적으로 대표를 흔들려면 아예 나가라”고 초강수를 빼들었다.
이 대목에서 이재오·김문수·홍준표 의원 등 대표적인 비주류 ‘3선3인방’이 왜 박 대표를 겨냥해 대립각을 세우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재오·김문수 의원의 경우 유신독재와의 악연이 그 배경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이재오 의원은 1973년부터 유신 시절에만 세 차례 투옥됐다. 그 중 한번은 박근혜 대표와도 직접 관련이 있다. 안동에서 강연을 하면서 안동댐에 당시 새마을봉사단 총재였던 박근혜 대표의 ‘방생비’를 비난했다가 “유신 체제와 대통령 따님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서울대 상대 70학번인 김문수 의원도 유신 당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됐고 이후 노동운동 과정에서 고초를 겪었다.
3선3인방 반발은 ‘정치적 미래’ 때문?
물론 이들은 개인적인 악연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의원 등 비주류의 ‘박근혜 인식론’은 한나라당 일반 의원들은 물론, 범주류의 한 축을 형성하는 원희룡 최고위원 등 소장개혁파들과 궤를 달리한다. 일반적으로 한나라당 의원들이 유신 독재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서의 ‘부채’ 정도로 여긴다면, 이들은 박 대표가 영부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들어 유신독재의 한 축을 형성했다고 보고 있다. 등에 짊어진 짐 정도가 아니라 유신 그 자체라는 얘기다. 따라서 사과를 하더라도 어느 정도 해서 되는 것이 아니며, 내심으로는 씻을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에 한나라당의 대표 혹은 차기 대선주자로서 부적절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소장개혁파들이 “박 대표가 과거사 문제를 잘 타고 넘으면 2007년 대선 직전에 불거지는 것에 비하면 부담을 털고 갈 수 있다”고 적극적인 자세를 주문하는 정도인 반면, 비주류 의원들은 차원이 다르다.
이재오 의원은 최근 한 방송에 출연해 “우리 아버지는 독재자였고 딸로서 침묵한 나도 공범자다. 이제 아버지는 세상에 없으니 내가 그 잘못을 안고 가겠다”며 미국으로 망명했던 옛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의 딸을 예로 들기도 했다. 이 의원이 요구하는 ‘진정한 사과’의 척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인식은 ‘박근혜 불가론’으로 이어진다. 이회창 전 총재가 아들들의 병역 기피 의혹이 불거지면서 무너졌듯이, 박근혜 카드로는 한나라당의 집권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표에 대한 불안감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두번의 대선 패배를 지켜본 한나라당 의원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다. 한 핵심 당직자는 “박 대표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라고 말하지만, 이번 문제가 개인의 문제이면서도 당 전체에 부담을 준다는 측면에서 이회창 후보 아들 문제와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했다. 비주류 의원들의 ‘정수장학회 공세’는, 한나라당 의원들의 불안감을 증폭하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 안팎에서는 3선3인방의 행보를 이들의 ‘정치적 미래’와 연결지어 해석하는 기류가 더 강하다. 최근 강도를 높이고 있는 반박근혜 움직임을 잠재적 대선후보군인 이명박 서울시장과 손학규 경기지사를 염두에 둔 움직임으로 보는 것이다. 연찬회에서 이재오 의원 발언 뒤에 연단에 오른 한선교 의원은, 기자들의 해석을 옮기는 형식을 빌어 이 의원의 언행이 서울시장 준비와 관련이 있다고 비난했다. 이명박 서울시장과 가까운 그가 이 시장을 대권 후보로 밀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속셈이라는 얘기다. 박근혜 대표도 비주류 의원들을 향해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얘기하는지…, 순수한 뜻으로 하는 거 아니다”라면서 자신은 대표이지 대선 후보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박근혜 흔들기’의 목적이, 2006년 임기를 마치고 한나라당으로 돌아올 잠재후보군들이 뿌리를 내리기 어려울 정도로 박 대표 체제가 공고화돼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영남 중진들, 소장개혁파와 대립
물론 이를 입증할 명백한 증거는 없다. 이재오 의원이 2002년 서울시장 선거 당시 선거대책위원장, 이후 서울시장 직무인수위원장을 지냈고, 홍준표 의원의 경우 이 시장과 같은 대학 출신으로 친분이 두텁다는 점 등이 ‘정황 증거’로 제시될 뿐이다. 당내에서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가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 의원은 “한나라당이 다음에 집권을 해서 한나라당의 뜻을 국정에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지, 특정인이 대통령 되고 안 되고는 나에게 큰 의미가 없다”며 “‘박근혜=한나라당’이 아닌 만큼 정말 한나라당을 아낀다면 비판해야 하고 대표도 이를 감수해야 하고, 이런 풍토가 한나라당에 조성되는 것이 좋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 의원은 박 대표의 갑작스러운 역공 뒤인 8월30일 “할 소리 다 했으니 침묵할 것”이라고 일단 수그리는 모습을 보였다.
발전연에 똬리를 틀고 있는 3선3인방이 박근혜 대표와 대립각을 세우는 비주류라면, 김용갑·이방호·안택수·이상배 의원 등 극우 보수 성향의 영남 중진들은 주류의 한 축을 형성하는 소장개혁파와 대립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비주류에 속한다. 16대 국회 때 ‘나라의 안보를 걱정하는 국회의원 모임’(대표 김용갑 의원)의 후신인 ‘자유포럼’(대표 이상배 의원)을 주축으로 활동하고 있다. 안보모임은 회원 수가 60명에 이르는 당내 최대 모임이었으나, 자유포럼은 현재 20여명 수준이다.
박근혜 대표 체제가 들어선 뒤 공개적인 발언을 자제했던 이들이 이번 연찬회를 앞두고 목소리를 키웠다. 한나라당이 호남에서 연찬회를 열고 광주 5·18 묘역을 집단 참배하는 일정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결국 김용갑 의원은 연찬회에 아예 참석하지 않았고, 연찬회에 참석했던 이들 중 일부는 광주 땅을 밟지 않았다.
첨예하게 맞부닥친 부분은 5·18 묘역 참배. 김용갑 의원은 “6·25와 월남 참전용사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는데도 5·18 유공자에 비해 턱없이 낮은 보상을 받아 심각할 정도로 소외감을 토로하고 있는 상태에서 집단 참배는 옳지 않다”며 “지역감정 해소는 시간이 좀더 흘러 자연스럽게 해결해야지 이번 이벤트는 너무 정략적·인위적”이라고 비판했다. 또 다른 비주류인 이들은 이번 호남 연찬회 과정에서 자신들의 기반이 지역적으로는 영남, 정치사적으로는 5·6공에 있음을 자연스럽게 노출했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당의 정통 뿌리임을 내세우면서 당의 핵심 요직에 포진하거나 자리를 차지하지 않더라도 당을 뜻한 대로 움직이는 게 가능했지만, 이젠 주도권을 상실하고 변방으로 밀려났다. 이상배 의원은 연찬회에서 “한나라당도 특정 세대, 특정 계파가 코드 운영을 하고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여권과의 정체성 논란을 주도적으로 벌인 박근혜 대표는 믿음직스러운데, 김덕룡 원내대표와 남경필 수석부대표, 원희룡 최고위원, 박형준 여의도연구소 부소장 등이 대표를 에워싸고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일단은 주류가 제압했으나…
어쨌든 한나라당의 주류는, 이번 연찬회를 거치면서 비주류 의원들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 듯이 보인다. 3선3인방으로 시작해 이들이 주도한 과거사 청산 서명(19명), 행정수도 반대 당론 채택 압박 서명(91명)으로 번져가는 불길에 제동을 건 셈이다. 결과적으로 당분간은 박근혜 대표를 중심으로 한 주류쪽의 구심력이 높아질 전망이다. 하지만 부드러운 리더십을 강조했던 박 대표의 변신이 가져올 손익계산은 시간이 좀더 걸릴 것이다. 게다가 이번 충돌이 논란의 종지부가 아니라 당내 투쟁이란 긴 레이스의 출발점이라는 데 한나라당의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속보] 군 경비 뚫은 공수처, 관저 건물 앞 경호처와 3시간째 대치
경호처 직원들, 끝까지 비겁한 윤석열에게 인생 걸 텐가? [1월3일 뉴스뷰리핑]
[단독] 서울서부지법, 윤석열 체포영장 집행 ‘이의신청’ 검토 착수
[영상] 공조본, 윤석열 체포영장 제시…경호처장, 경호법 이유로 수색불허
시민단체, ‘공조본 수색 불허’ 박종준 경호처장 고발…“제 2의 내란”
김흥국 “박정희·전두환보다 윤석열이 더 잘해…오야붕 지키자”
[단독] 윤 대통령, 헌재에 ‘탄핵 절차’ 문제 제기…첫 답변서 제출
[속보] 공수처, 윤석열 체포영장 집행 중지…5시간 만에 철수
“윤석열이 대한민국”…‘내란선전’ 윤상현 제명청원 12만명 넘어
윤석열의 ‘철통’ 액막이…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