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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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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딸의 미래다

등록 2004-08-12 00:00 수정 2020-05-03 04:23

딸 키우는 부모들의 늘어가는 고민… 여성성 부정 말고 행복한 어머니의 ‘자아존중감’을 먼저 보여줘라


강하게 키워야 하나, 곱게 키워야 하나. 딸 키우는 부모들의 고민이 늘어간다. 초보 부모들의 무모한 ‘중성화 전략’은 해답이 될 수 없다고 하는데….


▣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한때 아들과 딸을 귀남이와 후남이로 구별하던 시대가 있었다. 딸은 다만 ‘실수’였고, 딸의 이름은 다음에 아들을 바라는 ‘주술적 상징’이었다. 대놓고 구박하지는 않더라도 예쁘게 키워 좋은 자리에 시집보내는 것은 세대를 뛰어넘은 부모들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하지만 요즘 젊은 부모들은 자녀에게 같은 인생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한다. 자녀의 이름은 가능한 한 중성적으로 짓고, ‘여자는 살림·남자는 바깥 활동’이라는 태고적 공식에서 벗어나라고 주문한다.

초보 부모들의 위험한 ‘중성화 전략’

자녀 걱정에 아들과 딸이 다르겠냐마는, 여기에 딸 가진 부모들의 고민은 조금 더 특별하다. 세상은 정신 못 차리게 빨리 변해가고, ‘21세기 무한경쟁 시대’는 더 이상 다소곳하고 수동적인 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공고한 남성 중심 사회에서 딸이 살아남을 수 있을는지도 걱정이다. 아들은 그 사회에 자연스레 편입되지만, 딸은 의도하지 않으면 ‘그 세계’에 발 들여놓기 어렵다. 강하게 키우고 싶지만 억세질까봐 걱정이고, 곱게 키우자니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이 걱정이다. 딸 가진 부모들의 고민은 갈수록 깊어진다. 오, 대체 어쩌란 말인가.

초보 부모들이 가장 먼저 선택하는 방법은 ‘중성화 전략’이다. 딸에게 레이스 달린 분홍치마를 입히고, 인형과 소꿉놀이 세트를 사주는 것은 딸 가진 부모의 경계대상 1호다. 회사원 박진우씨는 4살 난 딸 새은이를 두고 “우리 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 새은이” “우리 자식” 등 가능한 한 중성적인 표현을 하려 애쓴다. 딸이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무의식중에 성별 고정관념이 자리하지 않을까 경계하는 탓이다. 가끔 인형을 찾는 새은이를 보면 마음이 약해지긴 하지만, 퍼즐게임같이 구별이 뚜렷하지 않은 장난감을 손에 쥐어주며 마음을 다잡는다. 여성·딸이라는 고정된 성이미지를 갖기보다, 한명의 인간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아직 만나는 대상이 가족 구성원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지만, 가장 작은 사회인 어린이집에 진출했을 때 다른 환경과 가치관을 접하게 될 일이 걱정이다.

5살 난 딸을 둔 김수영씨는 이런 박씨의 걱정이 현실화된 사례다. 어릴 때부터 “여자답게”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자란 탓에,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에게는 그릇된 고정관념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되도록이면 씩씩하게 키우고 싶어 딸 우진이 곁에는 여성적인 물건은 절대 가까이 두지 않았다. 어린이집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퇴근해 집에 돌아온 김씨에게 우진이가 한마디 했다. “엄마는 여자니까 밥해야 돼. 빨리 밥해줘.” 충격을 받은 김씨는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남편에게 저녁식사를 준비하게 했다. 다음날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항의했지만, 속상한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가뜩이나 골치 아픈 이들 부부에게 최근 더 고민스러운 일이 생겼다. 우진이가 “남자가 되고 싶다”며 부쩍 떼를 쓰기 때문이다. 치마 입는 것을 싫어하고, 로봇과 자동차를 손에서 놓지 않는 우진이를 보며, 김씨 부부는 은근히 뿌듯해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여자는 힘이 약해” “여자는 설거지를 해야 해”라며, 남자가 되고 싶다고 투정 부리는 아이 앞에서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해 난처해지고 만다.

전문가들은 이런 ‘중성화 전략’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남녀간의 차이를 줄이려다 보면 자칫 남성숭배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설명이다. 딸을 아들처럼 기르다 보면, 남자아이들이 하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을 갖게 되고, 딸들에게 남자처럼 되라고 가르치는 부모는 결국 자기 경멸을 가르치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좀더 ‘적극적’인 방법을 주문한다. 딸은 부모, 특히 같은 성별인 어머니를 동일시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회사원 권혁빈(서울 성산동)씨가 6살배기 딸 영인이 교육에서 가장 신경쓰는 것은 ‘성역할 넘어서기’다. 권씨 역시 결혼 초반에는 여느 집 남편들처럼 손에 물 묻히기 싫어했지만, 영인이가 태어난 뒤에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집안일을 함께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부부동반 모임에서 엄마들은 부엌에서 모이고 아빠들은 거실에서 모이는 일반적인 행태를 “온몸으로 거부”했다. 모임이 있으면 권씨가 부엌으로 들어가고 부인이 거실에서 남편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영인이에게 보여주는 식이다.

하지만 딸들이 학교에 들어가면, 아이가 보이는 변화만큼 부모의 고민은 다양해진다. 딸아이가 부쩍 외모에 신경쓰고 유의 책을 빌려오는 것을 보며 부모는 더욱 심란해진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딸의 진로가 걱정되고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부쩍 커버린 딸은 부모와의 소통에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기 일쑤다. 게다가 외모, 이성간의 애정을 강조하는 대중매체와 공부만 강조하는 부모, 남녀 수직관계의 현실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 보면 딸과 부모의 거리는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있다.

입학 뒤 변한 아이, 고민은 늘어가고…

여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의 신경아 교육운영팀장은 주위에서 “딸 잘 키웠다”는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다. 중3인 딸 서연이는 정신분석을 공부하고 싶다며 이미 자기 진로를 정했다. 신씨는 어릴 때부터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널 지지한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심어줬다고 귀띔했다. 긍정적인 자아정체감이 생기니 서연이에게는 모든 것이 즐겁다. 자존감이 강하기 때문에 공부를 잘할 수밖에 없고,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생활이 안정적이다. 같은 반의 왕따 친구가 괴롭힘을 당하자, 한달 동안 이 친구와 함께 점심을 먹어 다른 친구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지만 본인은 꿋꿋하다. 딸이 알게 모르게 접할 성역할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신씨와 남편은 부단히 발품을 팔았다. 가사노동 분담은 기본이고, “여자는 간호사, 남자는 의사”라고 말하는 유치원생 서연이를 데리고 일부러 여의사가 있는 소아과와 치과를 찾아갔다.

내일여성센터의 김영란 소장은 2대 독자와 결혼해 딸 둘을 낳았다. 소담이와 해담이는 한창 예민한 고2, 중3이지만 엄마와 친구처럼 지낸다. 김 소장의 교육철학은 간단하다. “딸은 엄마를 보고 자란다”는 생각이다. 바쁜 탓에 하루 종일 같이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지만, 항상 즐겁고 자신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또 삶의 중심은 남편도 자식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김씨의 확고한 모습은 딸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얼마 전 딸들한테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니’라고 물었더니, 곧바로 ‘나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섭섭했냐고요? 아니오. 기분 좋던데요.”

김 소장은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여학생들이 이상하게 할 말을 제대로 못하거나 남자 앞에서 수동적으로 되는 경우가 많다”며 “부모의 권력 관계가 그대로 딸에게 투영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처럼 살지 말라” 입버릇보다 중요한 건…

전문가들은 행복한 딸이 있으려면 행복한 어머니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무리 이름을 중성적으로 짓고 당당하라고 말해도, 딸이 동일시하는 어머니가 이를 직접 보여주지 못하면 효과가 없다는 설명이다. 조한혜정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어머니가 우선 자아존중감을 갖고 독립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또 부모 모두 여성성을 부정하는 모습은 삼가야 한다“고 충고한다.

“나처럼 살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보다, 행복하고 주체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백배 낫다. 엄마는 딸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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