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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도 패는 쩨쩨한 나라?

등록 2004-07-29 00:00 수정 2020-05-03 04:23

선거법 위반으로 패러디 작가 벌금 선고… 표현의 자유와 형평성 논란 뜨거워

▣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패러디 전성시대인가, 수난시대인가.

최근 정치 패러디가 한창 주가를 올리는 가운데, 패러디물에 대해 처음으로 유죄가 인정됐다. 지난 7월2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는 정치인의 얼굴을 합성한 포스터 등 패러디물 20여점을 만든 혐의로 지난 6월 불구속 기소된 대학생 신상민(26)씨에게 벌금 150만원을 선고했다.

신문 만평도 위법 아닌가

신씨의 혐의는 선거법 위반이다. 선거법 255조는 선거일 180일 전부터 선거일까지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의사표현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탈법적 선거운동을 막기 위해 정당 또는 후보자를 반대하는 내용이나 정당의 명칭을 나타내는 인쇄물 등을 배부할 수 없도록 한 규정이다.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불법으로 정한 조항인 만큼, 이번 재판에서 다툼이 된 부분은 신씨가 선거에 영향을 미칠 의도가 있었는지 여부에 집중됐다. 신상민씨는 “개인의 정치적 견해나 의사를 비판이나 풍자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일 뿐 선거에 영향을 미칠 의도나 목적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한나라당을 주된 소재로 하고 있고, ‘투표해서 떨어뜨리자’는 등의 꼬리말을 다는 등 작품 제작 의도가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또 “글보다 이미지 전달 효과가 큰데다, 불특정 다수가 열람하는 인터넷 공간에 올려져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번 판결로, 선거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선거법 위헌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선거일 180일 전부터는 정치에 대한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선거법 조항이 “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는 위헌 조항”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이다. 신씨쪽은 항소심에서 선거법이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며 헌법 소원을 함께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형평성 논란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신씨의 선고가 있기 한달 전인 지난 6월22일, 법원은 인터넷을 통한 사전 선거운동 혐의로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된 유시민 열린우리당 의원에 대해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선거법은 탈법과 금권 등 부정과 타락 을 막는 게 목적이며, 정견과 토론까지 막으면 위헌 요소가 발생한다”며 “홈페이지를 통한 선거운동은 자발적 접속자에게만 정보를 제공하고 막대한 금원이 들지 않으며, 인터넷 이용 빈도가 급증하는 추세에서 명확한 법원의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판시한 바 있다. 똑같이 인터넷에서 정치적 의사표현을 했지만 한쪽은 유죄, 한쪽은 무죄가 된 셈이다.

게다가 같은 논리라면, 선거기간 동안 정치인을 빗댄 신문만평이 더욱 선거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은데도 유독 아마추어 작가에게만 엄격한 것은 형평에도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앞으로도 줄줄이 재판 기다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이진우 변호사는 “기존의 유명한 영화포스터를 변형한 것이 대부분인 패러디물을 ‘객관적인 사실’로 여기는 네티즌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게다가 이들이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와 직·간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아마추어 작가들인데도 이를 ‘선거운동’으로 보는 것은 과도한 법 적용”이라고 밝혔다.

지금도 총선을 앞두고 정치인들의 패러디물을 인터넷에 올린 아마추어 패러디 작가들이 줄줄이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비록 모두 한시적으로 적용되는 선거법 위반 사안이긴 하지만, ‘하얀 쪽배’ 사건은 적어도 패러디물이 현행법으로 처벌이 가능하다는 전례로 남게 됐다. 패러디도 이해 못하는 쩨쩨한 나라로 남을 것인가. 법원에 눈과 귀가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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