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사위 · 송두율 석방 · 서해교신 군 조사 등에 ‘국가 정체성’ 운운하며 이념전쟁 확산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내전이 발발했다.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 만이다. 다행히 ‘총성 없는’ 이념 전쟁이다. 누가 선제공격을 했는지는 역시 불분명하다. 한쪽에서는 ‘적색 쿠데타’가 터졌다고 우긴다. 다른 쪽에서는 ‘백색 테러’가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선제공격자는 역사 연구자의 몫으로 남겨두자. 다만 전쟁을 ‘선포’한 쪽은 분명하다.
예비역이 국군에 항명 선동?
“정부가 국가 정체성을 흔드는 상황이 계속되면 야당이 전면전을 선포해야 할 날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2004년 7월 어느 야심한 밤에 터져나온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전면전 선언’이다. 박 대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나라를 부정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면전 선포의 근거인 “국가 정체성을 흔드는 상황”이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민주화운동 인정 결정, 송두율 석방, 북방한계선 침범사건의 진상조사 등이다. 때아닌 이념 전쟁이 열대야를 ‘후끈’ 달구고 있다.
“간첩이 나타났다!”
7월1일 잠자는 ‘유신 공주’의 안보의식을 깨운 것은 ‘조중동’의 외마디 비명이었다. 의문사위가 이날 강제전향 공작에 맞서다 숨진 비전향 장기수의 민주화 관련성을 인정하자 조중동이 역공을 시작했다. 조중동은 비전향 장기수의 전직이 빨치산과 남파 간첩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간첩이 민주인사라니!’ 조중동의 슬로건이었다. 모처럼 간첩이라는 ‘사어’가 되살아났다. 반공의식으로 무장한 일부 국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반공 국민들은 조중동의 슬로건을 업그레이드했다. ‘빨갱이가 민주인사라면, 우리 국군과 경찰은 역적이란 말인가!’
행동하는 보수가 행동에 나섰다. 전직 북파공작원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HID 특수임무 청년동지회’ 등은 “의문사 위원은 전원 할복자살하라”고 협박했다. 의문사위에는 “밤길 조심하라” “폭파시켜버리겠다” 등 ‘테러 협박’이 끊이지 않았다. 민주노동당도 ‘유탄’을 맞았다. 대한민국상이군경회는 민주노동당 당사를 점거하고 소화기 분말을 난사했다. 경찰에는 의문사위 한상범 위원장의 체포조가 결성됐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마치 전대협의 미 문화원 점거 농성과 한총련의 전두환, 이순자 체포조 결성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었다.
퇴역한 군인은 현역 후배에게 항명을 선동했다. 예비역대령연합회 등이 결성한 ‘국민행동본부’는 13일 에 광고를 내어 “국군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되 헌법과 국가를 배신하는 정권의 그 어떤 명령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광고는 며칠 뒤 전국민주화운동상이자연합에 의해 ‘내란선동 혐의’로 고소당했다. 열혈 애국지사 조갑제 편집장의 ‘시일야 방성대곡’도 빠지지 않았다. 조갑제 옹은 “친북정권이 적과 내통하여 헌법을 마비시키고, 국익을 팔면서 국군을 무력화시켜나갈 때 국군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울분을 토했다.
느닷없는 간첩 선동
수구의 선제공격을 당한 개혁·진보 진영은 자중지란에 빠졌다. 대한민국 국가 체제를 인정하지 않는 비전향 장기수의 민주화 관련성을 놓고 내분이 일어났다. 민주화운동심의위원회는 비전향 장기수의 민주화 관련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열린우리당은 의문사위 결정을 놓고 해명과 비판을 오락가락했다. “공산주의자도 인간이다.” “법치주의는 전력을 차별하지 않는다.” 내분 속에서 의문사위의 항변은 수구세력의 아우성에 묻혀버렸다.
7월15일 간첩 시리즈의 2탄이 터졌다. 가 이날치 신문에서 남들도 알고 있지만, 보도 가치가 없어 보도하지 않는 사실을 ‘단독’으로 포장해 터뜨렸다. 의 15일 머리기사 제목은 “간첩·사노맹 출신이 의문사위 조사관이라니…”였다. 조사관의 전력은 이미 알려진 상태였지만, 수구세력은 마치 몰랐다는 듯 새삼스레 발끈했다. 박근혜 대표는 “간첩이 군 장성을 조사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통탄했다. 보수언론은 일제히 ‘의문투성이의 의문사위원회’를 제목으로 내보냈다. 일부 언론이 ‘의문사위를 의문사시키려는가’ ‘의문사위를 마녀사냥하려는가’라고 맞섰다. 하지만 마녀사냥은 21세기에도 통하는 고전적인 수법임이 증명됐다. 간첩 사건은 조작이었고, 관련자들은 복권됐다는 항변은 ‘간첩’이라는 선동에 묻혀버렸다. ‘공안사건 관련자!’를 두번 죽이는 일이었다. 결국 제3기 의문사위의 출범조차 불투명한 상황이다. 더구나 여야 합의로 의문사위를 대통령 직속 기구에서 국회 산하로 옮기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역류를 타고 폐기 직전에 있던 마녀사냥의 도구도 되살아났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국가보안법 폐지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7월 하순, 일부 군인들은 노무현 정권의 헤게모니에 맞서 국가 기관 안에서 ‘진지전’을 벌이고 있음이 드러났다. 군의 보고 체계를 고의로 무시하고, 북한군의 송신 보고를 누락한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이들은 좌파 혁명가 그람시의 ‘진지전’ 전략을 한국군 안에서 실천하고 있었던 셈이다. 더구나 이들 정보과 군인은 정보전으로 청와대에 맞섰다. 청와대가 보고 누락을 문제 삼자 당시 상황에 대한 기밀정보를 에 유출한 것이다. 보수세력은 기다렸다는 듯 해군의 작전수행이 적절했다고 옹호했다. 한나라당 등 보수세력은 보고 누락 조사를 ‘북한 눈치보기’로 몰아붙이며 오히려 국군의 사기 저하를 우려했다.
7월21일 송두율 교수가 석방되자 개혁·진보 세력의 환영과 보수세력의 반발이 이어졌다. 서울고등법원 형사6부(재판장 김용균 판사)는 이날 송 교수가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공소 사실에 대해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북한 밀입북 사실 등은 인정했지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해 석방했다. 시민사회단체는 시대의 흐름에 걸맞은 판결이라고 환영했다. 하지만 한나라당 등은 예의 그 ‘국가 정체성’을 들고 나왔다. 한나라당은 대변인 논평을 통해 “송씨 문제는 이념 대결이나 색깔론, 수구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송씨 판결은 국가의 정체성 문제이며 국가의 근간과 관련 있는 중차대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보수단체는 22일 서울 서초동의 서울고법 앞에서 집회를 열어 송 교수 석방을 규탄했다. 23일 반핵반김국권수호협의회는 서울 광화문에 태극기를 들고 나섰다. 집회 명칭은 ‘국군격려 국민대회’, 참가자는 1천여명이었다. 이들은 “적색 쿠데타, 국군은 분쇄하라”고 외쳤다. 신혜식 인터넷 대표는 발언을 통해 “(청와대를 가리키는 듯) 저 파란 지붕이 빨간 지붕이 되지 않게 막아야 합니다”고 ‘색깔론’을 주장했다.
마지막 라운드는 '다카키 마사오' 논쟁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송두율 교수에 대한 집행유예 석방은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앞서 나온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에 대한 무죄 판결도 마찬가지다. 법원의 판결문은 각각 병역 거부자에게 대체복무제를 허용하는 일과 송 교수의 이적행위에 대한 엄격한 판단이 ‘자유민주주의’를 정상화하는 일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보수세력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반인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모순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
7월 전면전의 마지막 라운드는 ‘다카키 마사오’ 논쟁으로 매듭될 전망이다. 다카키 마사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다른 이름이다. 박근혜 대표는 25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조사 대상에 포함한 열린우리당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특별법 개정안에 대해 “조사할 테면 조사하라. 자신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부친의 직업이 군인이었을 뿐 문제될 만한 친일 행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열린우리당은 “친일 조사에 자신이 있다니 다행”이라며 “박 대표도 친일진상규명법에 찬성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세우는 일에 동참해주시기 바란다”고 맞받아쳤다.
2004년의 이념 전쟁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둘러싼 싸움으로 진행되고 있다. 역사를 다시 세우려는 개혁·진보 세력의 움직임과 국가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세력의 열전이 여름을 달구고 있는 것이다. 이 전쟁은 지난 대선에서 드러났듯이 보수와 개혁(진보)가 50 대 50으로 나뉜 여론 지형도와 무관하지 않다. 2004년 여름,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배회하고 있다. ‘국가 정체성’이라는 유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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