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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이 한나라당을 만날 때…

등록 2004-07-29 00:00 수정 2020-05-03 04:23

원내 존재가치 높이기 위해 일부 정책 공조… 일관된 메시지 상실이라는 위험성도 내포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민주노동당이 7월25일 임시 당대회를 통해 이라크 파병 저지에 당력을 집중하기로 했다. 김혜경 대표와 일부 최고위원들은 당 대회 사흘 전부터 추가 파병 철회를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천영세 대표 등 의원들도 마이클 무어의 영화 개봉관 주변을 중심으로 대국민 선전전을 벌이기로 했다. 과거 민주노동당의 익숙한 모습이다.

“원칙에 따라 제 갈 길 가고 있다”

하지만 시점을 조금 앞당겨보면 이런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듯한 그림이 펼쳐진다. 7월21일 김 대표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만나 국회 예결특위 상임위화, 카드대란 국정조사 등에 합의했다. 최근 정부·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연·기금의 주식투자 허용에 대해서도 두 당은 일치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에 앞서 7월14일엔 한나라당·민주당·자민련의 원내대표와 만나 예결특위 상임위화를 매개로 야4당 공조에 합의했다.

한나라당과의 정책 공조와 장외투쟁. 민주노동당이 얼핏 보기에 어울리지 않는 두 길을 가는 데는, 현실 정치의 높은 벽에 부닥친 민주노동당의 속깊은 고민이 묻어 있는 것 같다. 4·15 총선을 거치면서 10석을 가진 제3당으로 당당히 국회에 입성했으나 지지자들의 높은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힘에 부친 가운데 나온 선택이어서 주목을 끈다. 정체성 면에서는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야당이라는 점에서 한나라당과 같은 처지인 민주노동당이 한나라당쪽으로 한 걸음 옮겨간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총선 이전부터 여야를 떠나 정책을 중심으로 어느 당과도 공조할 수 있다고 천명해왔고, 이번에 정책 공조를 한 이슈들이 총선 이전부터 주장해온 민주노동당의 정책이라는 점에서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천영세 의원단 대표는 “민주노동당은 총선 때 예결산을 분리해 2개의 상임위를 만들자는 공약을 내걸었다. 느닷없이 주장한 게 아니다. 카드 부실감사 공조나 기금관리법 개정에 대한 입장도 당론에 따른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원칙에 따라 제 갈 길을 가고 있다”고 밝혔다. 박용진 대변인은 “친일진상규명법, 의문사위법, 국가보안법 등 사회개혁 과제에서는 열린우리당과 함께할 수 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은 여당이 된 뒤 경제적 개혁 과제에서는 기득권층과 보수층에 서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민주노동당을 비난하는 것은, 건너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넌 사람이 자기 옷 젖은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강 건넜다, 옷 젖었다고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이 한나라당과의 정책 공조에 나서면서 정책만을 고려 대상으로 삼지는 않은 것 같다. 당의 한 핵심인사는 “이번 공조는 행정수도 문제처럼 정치화돼버린 큰 사안에서는 개입의 여지가 없고 국가보안법 문제 같은 개혁 과제에서는 열린우리당의 발빠른 움직임에 이슈 선점을 당하는 처지와 무관치 않다”며 “원내에서 입지가 좁아진 상태에서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절박감도 있었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이 주력하고 있는 이라크 파병이나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노동4법 등 각종 법안이나 결의안을 제출해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원내 정치적 협상력을 키우기 위한 전략의 성격도 띠고 있다는 설명이다. 박 대변인도 “국회 운영위에서 한나라당과 일정 사안에 같이 움직일 경우 열린우리당에 두려움이 생길 것”이라며 “민주노동당이 의원 수 면에서 큰 변화를 주지는 못해도 특정 사안에 대해 정당성 확보 여부의 바로미터처럼 되고 있다”고 말했다.

사안에 따라 두 당과 거리 조정

따라서 이번 공조는 소수정당인 민주노동당이 거대 정당인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사이에서 사안에 따라 거리를 조정하면서 독자적인 공간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한번은 이쪽, 한번은 저쪽 손을 들어주면서 캐스팅보트 정도는 아니어도 원내에서 존재가치를 높이겠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정책 공조는, 민주노동당이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민주노동당의 존재를 애써 무시해온 열린우리당에 정치적 부담을 지울 수 있는 부수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이념적 정체성이 극과 극인 두 당의 공조가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바라는 성과를 거둘지 의문이다. 지난 4·15 총선 결과 두 당의 지지층은 일정 부분 겹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직까지 ‘교집합’에 머무는 지지자라면 이번 공조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실제 민주노동당의 인터넷 홈페이지 당원 게시판에는 “한나라당과의 공조를 이해할 수 없다”는 비판의 글도 간혹 오르고 있다. 소수정당의 한계 속에서 민주노동당의 독자 공간 확보를 위한 전략에는, 자칫 일관된 메시지 상실이라는 위험성도 내포돼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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