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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뜨거, 친일진상규명법

등록 2004-07-23 00:00 수정 2020-05-03 04:23

열린우리당 개정안 당론 채택뒤 한나라당 내부 시끌… ‘소신파 6인방’이 개정에 찬성하는 이유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박근혜 대표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본군 장교였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지금 와서 덮고 피한다고 역사적 진실이 사라지지 않는다. 친일행위 진상 규명에 반대하는 게 더 정략적으로 비칠 수 있다.”

열린우리당이 지난 7월13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 개정안’(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을 당론으로 채택한 이후 한나라당 내부가 벌집 쑤신 듯 뒤숭숭하지만, 이재오 의원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소신을 밝혔다.

‘과거사 정리’ 원칙 거부할 명분 없어

열린우리당의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 제출에 대해 “불순한 정략적 의도가 담긴 마녀사냥”이라고 강력히 반발하는 박근혜 대표, 김덕룡 원내대표 등 핵심 당직자들의 판단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회창 총재 시절 한나라당 원내 총무를 맡아 김대중 정권을 향한 대여 강경투쟁을 선도했던 이 의원의 이런 태도는 당 안에서조차 좀 뜻밖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 의원은 단호하다. “열린우리당의 개정안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의 흠집내기라는 일방적 의도만 강조하며 반대하는 것은 옛날 한나라당 방식이다. 수구보수의 논리로 기득권을 지키는 과거와 같은 논리는 더 이상 안 된다. 야당이 먼저 친일 행적을 밝히자고 주창하고, 여당이 덮으려 해야 정상이다.”이 의원이 한나라당 지도부 경선 과정에서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이라고 공격하며 ‘대표 불가론’을 밝혀 논란을 촉발한 것도 이런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 의원뿐이 아니다. 권오을, 원희룡, 정병국, 고진화, 배일도 등 5명의 한나라당 의원들도 7월14일 열린우리당이 당론으로 결정한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 국회 제출에 동참했다. 이들은 의원총회에서 “당당한 접근”을 주문하며 박 대표와 당 지도부를 압박하고 있다. 친일 진상 규명에 대한 ‘한나라당 소신파 6인방’인 셈이다.

소신파 6인방은 무슨 생각으로 당내 분란을 감수하면서까지 지도부의 방침에 반기를 든 것일까.
첫째, 이들은 진상 규명을 통한 과거사 정리라는 대원칙을 거부할 어떤 정치적 명분도 없다고 입을 모았다.
고진화 의원은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고 미래로 전진하기 위해 과거사에 대한 진상 규명 작업은 철저히 끝내는 게 기본”이라며 “박근혜 대표든, 그 누구든 과거사의 잘못과 연관된 게 있다면 인정하고 해법을 제시해야지 정치적 의도를 문제 삼아 진실에 접근하지 않으려는 것은 앞뒤가 바뀐 태도”라고 비판했다.
고 의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너무 오래된 과거사를 끄집어낸다고 불평하는 의원들이 있는데, 중국이 수천년 전 고구려사 문제를 놓고 우리와 해석을 달리하는 동북공정을 시도하는 것을 보면 일제 치하는 그리 먼 과거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우리의 과거에 대해 스스로 철저히 규명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천년이 넘은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의 왜곡 행위에 당당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겠냐”고 덧붙였다.
원희룡 의원도 “중요한 것은 과거에 대한 단죄가 아닌 진상 규명을 통한 미래 설계”라며 “꼭 필요한 작업인 만큼 역사는 역사로 보고 승화하고 극복하는 당당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원 의원은 “조사 대상 범위를 축소하겠다는 것은 속보이는 짓”이라며 “박 대표의 최근 반응은 옳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군인의 친일 행위 조사대상을 ‘중좌’(중령) 이상에서 ‘소위’ 이상으로 확대해 일본군 중위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포함시킨 개정안은 진상 규명보다 차기 대통령 선거전의 유력 주자인 박근혜 대표를 흠집내려는 것이라는 당 지도부의 판단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이재오 의원의 논리처럼 한나라당이 수구보수 정당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벗고 진정한 보수 세력의 대표자로 거듭나기 위해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배일도 의원은 “한나라당 의원들 가운데 친일과 관련된 부채가 있는 의원이 과연 몇명이나 되겠냐”며 “단지 몇몇 의원의 아버지 문제 때문에 한나라당 의원 전체가 친일파 옹호자로 매도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일본군 장교 복무 사실이 낱낱이 드러나는 것에 부담을 느낀 박 대표 등 몇몇 당직자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한나라당 전체가 친일파 옹호당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박정희 행적 ‘짐’ 털고 가자

정병국 의원은 좀더 현실적인 이유를 들이댔다. 그는 “지난 16대 국회에서 한나라당 강인섭 의원이 위원장이고 내가 위원으로 참여했던 과거사진상규명특위에서 만든 법안을 법사위 심의 과정에서 몇 사람이 왜곡한 것을 다시 바로잡는 게 개정안”이라며 “지난 과정이 옳지 못했던 만큼 이번에는 순수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의 개정안은 여야 합의로 구성된 진상규명특위에서 만든 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을 법사위 소속 한나라당 간사인 김용균 의원 등이 누더기로 만든 것을 정상화하는 절차라는 설명이다. 정 의원은 특히 “이미 국회에 제출된 개정안에 서명한 의원이 과반수를 훨씬 넘었고, 한나라당이 반대해도 개정안은 국회를 통과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민과 의원들 다수의 정서를 거슬러 개정안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제시대 행적이 박근혜 대표의 대권 가도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전향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배일도 의원은 “박 전 대통령이 일본군 장교였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고, 박 대표가 대선에 도전할 때 문제가 된다는 것도 자명하다”며 “열린우리당이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더라도 정권을 획득하려는 정당의 대표자라면 이번 기회에 껍질은 벗고, 짐은 덜어야 한다”고 말했다. 원희룡 의원도 “박 대표가 ‘나에게 아버지를 부정하라는 말입니까. 나는 아버지로부터 나라사랑을 배웠고, 식민지 시대도 현대사가 품어야 할 대상이다’는 식으로 타고 넘을 수 있는 소재”라며 발상의 전환을 촉구했다.
넷째, 이들은 개정안이 조사 대상과 범위 등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법안 심의 과정에서 절충하고 조정해야지, 법 개정 논의 자체를 봉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재오, 배일도 의원은 “개정안을 정략적으로 이용해서도 안 되지만, 이것을 방패막이 삼아 법 개정 자체를 거부하는 것도 문제”라며 “조사 대상의 범위 등은 관련 상임위에서 논의해 조정하면 된다”고 말했다. 정병국 의원도 “국민들은 성숙해 있고, 열린우리당이 정략적으로 접근한다면 국민 정서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박 대표와 한나라당이 이 문제에 대해 지금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자체가 국민들 눈에는 더 우스워 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권오을 의원은 “박 전 대통령이 국가 발전을 위해 공헌했다는 국민적 평가가 상당한 공감을 얻고 있는 만큼 너무 두려워하거나 민감하게 반응할 이유가 없다”고 조언했다. 박 전 대통령의 근대화 업적이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것 때문에 폄훼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소신파 6인방의 이런 논리가 앞으로 한나라당 안에서 얼마나 지지세를 확보할 수 있을까. 이들은 물론 “서명에 동참하지 않은 다수 의원들이 친일파 옹호자로 매도되는 데 부담을 느낀다”며 “토론을 통해 공감대가 확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의원 다수가 침묵하고, 여권의 정략적 의도에 대한 경계론과 박 대표의 인간적 고뇌를 이해한다는 옹호론도 적지 않아 그 결과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친일 진상 규명의 필요성에는 100% 공감하지만, 새 법안을 시행도 하기 전에 개정안을 낸 것은 정략이 숨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수도권 3선 의원) “딸이 아버지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국민 감정상 역효과가 날 것이다. 박 대표가 개정안에 반발하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한나라당 한 초선 의원)

애초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에 서명했던 심재철, 김충환 의원이 “법의 기본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특정 기관과 특정인을 겨냥한 것이라는 논란이 있다”며 서명을 철회한 것도 이런 당내 정서를 반영한 것이다.

아버지 부정할 수 없는 박 대표의 고뇌

아무튼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은 박근혜 대표와 한나라당 지도부에게는 아주 ‘뜨거운 감자’다. 여권의 정략적 의도를 비판하지만, 섣불리 ‘반대당론’을 정하기도 어렵다. 서명파 의원들이 “논의를 봉쇄하거나 반대 당론을 확정하면 더 큰 반발에 직면할 것”이라고 공언하는 상황에서 자칫 당내 분란으로 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 대표도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한 측근은 “박 대표도 16대 국회에서 친일진상규명법 제정에 서명했고,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는 원칙에는 공감하고 있다”며 “다만 개정안에 정략이 담겨 있다는 인식을 지울 수 없고, 당내에도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만큼 당론으로 반대할지 여부는 좀더 폭넓은 의견 수렴을 거친 뒤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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