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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유영철, 막을 수 있을까

등록 2004-07-23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color="darkblue">경찰 수사관들, 지금 시스템으론 지능범에 속수무책… 올 1월 절도 혐의로 붙잡았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어줘 </font>

▣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제2, 제3의 유영철’은 막을 수 있을까. 부유층 노인 및 출장마사지사 연쇄 살인사건을 접한 시민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렇게 묻고 있다. 하지만 일선 경찰 수사관들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현재의 수사 능력으로는 유영철과 같은 ‘지능범’을 잡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솔직한 고백도 나온다.

범죄수사 과학화에 과감한 투자를

유씨가 범행 단서를 남기지 않기 위해 취한 행동은 그야말로 용의주도했다. 유씨는 20명을 살해하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지문을 남기지 않았다. 출장마사지사들을 자신의 원룸 자취방으로 불러들여 죽인 뒤 증거를 없애기 위해 주검을 여러 부분으로 토막내고 양 손가락의 지문을 칼로 도려냈다. 또 체모나 정액을 남기지 않기 위해 출장마사지 종업원들과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 정액과 체모 등을 남길 경우 유전자(DNA) 검사로 꼬리가 잡힐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유씨는 범행 때 사용한 신발의 발자국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자 신발을 여러 조각으로 잘라내 버리기도 했다. 이처럼 완벽한 ‘방어’ 탓에 유씨는 엽기적인 살인 행각을 10개월 동안 지속할 수 있었다.

경찰은 유씨의 검거를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처지다. 경찰청 관계자는 “제보가 없었다면 유씨 검거는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경찰이 잡았다고 말하기가 쑥스러울 정도로 경찰이 한 일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경찰서 형사과장은 “현재의 수사 능력으로는 유씨처럼 뒤처리를 완벽하게 할 경우 범인을 잡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털어놨다. 피해자의 신원을 파악한 뒤 그 주변의 인간관계를 추적하면서 범인을 좇아가는 게 일반적인 수사 기법인데, 유씨처럼 피해자의 신원을 파악할 수 없도록 ‘뒤처리’를 하면 수사의 첫 단추를 제대로 낄 수가 없다.

일선 수사관들은 이번 기회에 범죄 수사의 과학화를 위해 과감한 투자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서울의 한 강력계 형사는 “경찰 인력들이 수사 분야에서 일하기를 꺼려 하는 게 국내 경찰의 현실”이라며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사생활이 좀처럼 보장되지 않지만 인센티브는 전혀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일선 경찰서의 한 수사과장은 “3명 이상 살해된 주요 강력 사건이나 이번처럼 일정한 형태를 보이는 사건은 상급기관의 전담부서가 직접 맡아 수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미국의 FBI처럼 수사 인력과 장비의 고급화를 위해 과감한 재정적인 투자가 있어야 한다”며 “경찰의 수사 능력을 탓하지만 말고 이번 기회에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유씨는 지난 1월 절도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부실 수사’ 논란이 일고 있다. 서울 서대문경찰서에 따르면 유씨는 지난 1월21일 서울 신수동 ㅂ목욕탕에서 10만원 상당의 현금과 상품권을 훔친 혐의로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유씨는 다른 손님의 옷장 열쇠를 훔쳐 옷장을 열고 지갑 속의 현금과 상품권을 훔쳐 달아나려다 목욕탕 종업원에게 발각돼 경찰에 넘겨졌다. 유씨는 체포 당시 여자친구와 함께 있었고,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았다. 서대문경찰서는 이날 유씨에 대해 절도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서대문서에서 풀려난 뒤 살인 계속

그러나 유씨의 영장은 법원에 청구되지 못했다. 이 사건을 지휘한 서울 서부지방검찰청이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며 영장을 경찰로 되돌려 보냈기 때문이다. 검찰은 유씨한테서 상품권이 발견되지 않았고, 유씨가 훔쳤다는 옷장 열쇠에서도 유씨의 지문이 검출되지 않은 것을 지적하며 “증거를 더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경찰은 유씨 여자친구의 소지품도 조사했으나 ‘장물’을 찾지 못했다. 서대문경찰서 관계자는 “절도범은 현장에서 체포될 경우 훔친 물건을 몰래 버리고는 범행을 딱 잡아뗀다”며 “유씨가 전과가 많아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영장을 청구했는데 검찰의 재수사 지시로 구속시키지 못했다”고 밝혔다.

유씨는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 발작 증세를 일으켜 수사팀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경찰은 유씨의 영장을 재청구하기 위해 유씨의 어머니 집을 수색하기도 했으나, 별다른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경찰 관계자는 “유씨 어머니한테서 유씨가 집을 나간 지 오래됐고, 어디에 사는지 전혀 모른다는 진술을 들었다”며 “현장에서도 특별한 단서를 발견하지 못해 유씨에 대한 수사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고 밝혔다. 경찰은 유씨를 불구속 기소하기로 하고 검찰에 이 사건을 송치했다.

하지만 서대문경찰서가 이 사건을 처리한 과정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아쉬움이 남는다. 유씨가 이때 구속됐더라면 20여명의 희생자 중 12명은 살릴 수 있었다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씨는 서대문경찰서에서 풀려나고 두 달 뒤인 지난 3월 중순 전화방 도우미 권아무개씨를 시작으로 노점상 안아무개씨와 출장마사지사 김아무개씨 등 12명을 살해했다. 만약 서대문경찰서가 유씨를 구속한 뒤 보강 수사를 했다면, 유씨가 지난해 9∼11월에 저지른 살인 행각을 밝혀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설사 살인죄를 밝혀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최소한 나머지 12명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서대문경찰서는 이런 지적에 동의하지 않는다. 강력반 관계자는 “당시 유씨한테서 연쇄 살인범을 입증할 수 있는 단서는 터럭만큼도 발견하지 못했다”며 “유씨가 절도 혐의로 구속됐더라도 혐의가 가벼워 곧 풀려날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죄’를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당시 경찰이 확보하고 있는 유씨에 대한 단서는 지난해 11월 혜화동에서 범행을 저질렀을 때 폐쇄회로 TV에 찍힌 유씨의 뒷모습 사진이 전부다.

정밀 수색 했더라면…

경찰은 유씨가 8명을 죽이며 돌아다닐 때까지 유씨의 신원 파악은 물론 몽타주 한장 확보하지 못했다. 서대문서 관계자는 “폐쇄회로 TV에 찍힌 사진은 뒷모습인데다 워낙 흐리게 나와서 누구인지 확인조차 힘들다”며 “검거 당시 유씨의 모습과 사진을 비교해봤지만 닮은 점은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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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서대문서의 이런 해명에도 불구하고 ‘부실 수사’라는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특히 서대문서는 강남서, 동대문서와 함께 이번 연쇄 살인사건의 수사 주체였다는 점에서 유씨를 검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서대문서는 지난해 10월9일 관할지역인 구기동에서 고아무개씨 일가족 3명이 살해된 직후 전담반을 꾸려 최근까지 수사를 진행해왔다. 경찰청 관계자는 “당시 서대문서에서 유씨를 계속 추적했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씨가 머물고 있던 오피스텔을 정밀 수색했다면 범행에 사용한 흉기나 피해자 혈흔이 묻은 옷가지, 장물 등을 확보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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