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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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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치료제가 우릴 죽인다”

등록 2004-07-23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color="darkblue">세계에이즈회의에서 시위 나선 활동가들… 미국 · 초국적 제약회사가 100배 인상하면 어떻게 치료하나 </font>

▣ 방콕= 엄기호/ HIV : AIDS 인권모임 나누리+ 활동가

“거짓말하지 말라. 우리는 에이즈가 아니라 비싼 에이즈 치료제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후천성면역결핍증(AIDS) 확산이 시작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 방콕 제15차 세계에이즈대회에 참가한 활동가들은 전세계에서 수백만명을 죽이고 있는 것은 에이즈 바이러스가 아니라 비싼 에이즈 치료제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비싼 에이즈 치료제 뒤에는 지적재산권을 강화해 저개발국들이 값싼 복제약을 생산, 혹은 수입하지 못하게 하는 미국과 초국적 제약회사들이 있다고 고발했다. 에이즈 활동가들은 에이즈 양성반응자들이 질병이 아니라 이들의 욕심에 의해서 죽어간다며 전시장과 강연장에서 연설 방해, 제약회사 전시장 습격 등 직접적 행동을 감행했다.

미국은 우선 HIV·AIDS와 결핵, 말라리아를 퇴치하기 위한 유엔의 야심찬 계획인 글로벌 펀드를 의도적으로 파산내고 있다고 강력한 비난을 받았다. 미국은 국내총생산(GDP)을 고려할 때 최소한 300억달러를 내야 함에도 지난해 고작 2억달러를 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미국이 글로벌 펀드에 최대 기부자라며 더 많은 돈을 내어줄 것을 요구한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복제약 단속 나선 미국, 유엔엔 비협조적

대신 미국은 대통령 산하에 에이즈 구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계획(President’s Emergency Plan for AIDS Relief)이라는 기관을 신설하고 해외 원조를 직접 실행하고 있다. 원조 대상 국가의 선정부터 지원내용, 지원조건을 아무런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요컨대 해외 원조의 문제에서도 글로벌 펀드라는 다자주의적 방식이 아닌 양자주의 방식을 추진하고 있다. 이 계획을 통해 지난해 집행된 돈은 무려 150억달러에 달한다.
문제는 이 긴급 계획이 부시의 HIV·AIDS에 대한 보수주의 종교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지적재산권 방어에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지원조건에는 성행위 회피 위주로 구성된 이른바 ABC 정책, 즉 금욕(Abstinence)·정조(Be faithful)·콘돔 사용(Condom use))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실제 ABC 정책은 낙태찬성 단체에는 지원하지 말 것, 카피약 사용의 엄격한 제한 등으로 귀결된다. 콘돔 사용은 허울일 뿐 금욕과 정조가 핵심인 것이다. 이 때문에 이 긴급 지원을 받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인 우간다 대통령은 이번 세계에이즈대회 연설에서 “우간다에서 콘돔을 사용하는 사람은 비시민들(non-citizens)”이라고 말했다.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돈을 받아내기 위해서 대통령이 나서서 미국 부시 행정부의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보여야만 하는 것이다.

한편 미국은 건강권을 무역보다 우선한 세계무역기구(WTO) 도하 협정의 선언문을 회피하기 위해 양자간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더 강화된 지적재산권을 저개발국에 강요하고 있다. 이미 모로코 등과 자유협정을 체결한 미국은 현재 타이와 협정을 진행 중이다. 그 내용에는 지적재산권 보장을 20년에서 25년으로 늘리고, 새로 개발되는 약에 대한 강제 실시(특허권을 인정하지 않는 조치)를 통한 카피약 생산을 엄격히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대해 타이감염인 네트워크의 의장은 “지금까지는 타이 정부 주도로 값싼 복제약을 생산하여 모든 HIV 양성반응자와 에이즈 환자들에게 공짜로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미국과 타이의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면 이 모든 것은 끝”이라며 우려했다. 이에 타이감염인 네트워크는 미국의 에이즈운동단체인 헬스 갭(Health Gap), 액트 업(Act Up) 등과 공동 행동을 취할 것을 결의했다. 현재 타이의 에이즈 복제약 값은 초국적 제약회사들이 생산하는 오리지널 약의 100분의 1에 불과하다.

제3세계 여성에게 실험한 길리드

에이즈 활동가들의 직접적 행동은 미국 에이즈 대통령 자문위원이자 대통령 긴급계획의 총책임자인 토아이어스의 13일 특별 강연에서 최고조를 이루었다. 한국의 HIV·AIDS 인권모임 나누리+, 액트 업 파리, 타이감염인 네트워크 등으로 이루어진 50여명의 시위대는 토아이어스가 강연을 시작하자마자 ‘그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적힌 피켓을 들고 일제히 강연장으로 구호를 외치며 들어왔다. 토바이어스는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다 연단을 내려오면서 강연은 10여분간 중단됐다. 강연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시위대는 토바이어스가 “우리는 에이즈 치료제의 생산지가 어디인지, 오리지널 약인지, 복제약인지를 가리지 않고 가장 값싸게 에이즈 치료제를 제공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는 순간 “거짓말쟁이!”라고 외치면서 일제히 일어나 다시 한번 시위를 감행했다.

에이즈 활동가들의 두 번째 타깃은 초국적 제약회사들이었다. 바르셀로나 14차 세계에이즈회의 때 이미 제약회사들의 전시장은 스페인과 유럽의 청년 활동가들에 의해 박살이 났다. 이번에도 나누리+, 액트 업, 아시아 섹스워커(성매매노동자) 네트워크 등으로 구성된 시위대는 붉은 페인트를 전시 부스에 던지며 공격을 감행했다. 첫 번째 타깃은 초국적 제약회사 길리드였다. 최근 길리드가 생산한 첫 에이즈 치료제인 브레드(Vread)의 효능을 테스트하는 과정이 문제가 됐다. 길리드는 효능을 캄보디아와 카메룬 등지에서 섹스워커와 성병 병력이 있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면서 실험과 부작용 등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고 고발당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테스트에는 감염 예방 효과 테스트까지 포함됨으로써 비감염인 실험 참가자들을 감염의 위험으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길리드는 이에 대해 충분히 감염 예방 조치를 취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액트 업 활동가 폴은 “약에 포함된 성분이 감염 예방의 효능이 있는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고 일축했다. 시위대는 전시 부스에 희생자의 피와 길리드의 탐욕을 상징하는 붉은색 페인트를 던지고 “길리드가 나를 병들게 하였다”고 적힌 벽보를 붙였다.

이 밖에 초국적 제약회사인 로쉬는 가장 비싼 에이즈 치료제를 소유하고 있으며, 에이즈 치료제의 가격을 낮추기 위해서 세계보건기구(WHO)가 제안한 ‘(에이즈 약의) 접근을 더 용이하게’라는 제약회사들과의 파트너십을 거부했고, 새로운 약을 개발하던 과정 중에 시장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개발을 중단한 점 때문에 고발됐다. 애봇은 이유도 없이 최근 약값을 5배 인상하여 가장 욕심이 많은 제약회사로 고발됐다. 파이자는 그동안 특허권을 보호하기 위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을 협박한 죄목으로 고발됐다. 각각의 제약회사 부스는 시위대의 페인트병 공격에 붉게 물들며 차례차례 박살나고 전시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콘돔 · 깨끗한 주사기 · 복제약이 필요하다”

미국과 초국적 제약회사가 에이즈를 질병의 위기로 이야기하는 동안 메리 로빈슨 전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을 포함한 인권운동가와 에이즈 활동가들은 에이즈는 개발의 위기이며, 인권의 위기이며, 사회와 정치의 위기라고 선언했다. 저개발국의 부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동성애자·마약 사용자·여성·이주노동자·성매매노동자의 인권이 개선되지 않는 한, 민주주의와 공공보건 의료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는 한 에이즈의 확산은 저지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허권이 아니라 환자의 권리가 우선돼야 하며, 금욕운동과 마약 사용자들의 인권 유린이 아니라 콘돔과 깨끗한 주사기와 복제약을 제공하는 것이 에이즈에 맞서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에이즈 확산을 위해 저지돼야 하는 것은 바로 미국 부시 행정부이며, 초국적 제약회사라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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