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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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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당의 한달, 행복하십니까

등록 2004-07-16 00:00 수정 2020-05-03 04:23

사회적 약자를 위한 법안 제출의 통로 마련… 소수당 한계 · 정책 역량 부족 등 문제점도 노출

▣ 글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비례대표 지지율 13.1%(227만4천여표), 지역구 2석 포함 10명의 국회의원 배출. 지난 4·15 총선을 통해 원내 제3당으로 급성장한 민주노동당은 진보 진영의 정치 세력화라는 오랜 꿈을 실현해주는 희망의 싹이었다. 그로부터 석달, 10명의 민노당 의원들이 보수정당의 대표자들이 독점하던 국회의사당을 활보한 지도 어언 한달이 넘었다. 민노당은 과연 무엇을 변화시켰고, 어떤 한계에 직면하고 있을까.

“우리는 아직 수업료를 치르며 배우는 단계다. 한계도 있다. 하지만 민노당 의원 10명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갖는 의미와 그로 인해 촉발된 변화는 무시할 수 없다.” 조승수 의원(울산 북구)은 민노당이 아직 국민을 열광시킬 정도의 메가톤급 변화를 몰고 오거나 국회 운영의 주도권을 행사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의미 있는 실험을 거듭하면서 나름의 성과를 축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에게 진보적 소신 확산

실제 당략보다는 소신을 앞세우고, 금배지의 특권을 거부하며 집단적으로 개혁을 부르짖는 민노당 의원의 출현은 17대 국회에 적잖은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첫째, 민노당은 국회의원들 사이에 진보적 소신에 대한 고민을 확산시키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진보의 실체를 증명하도록 강제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지난 6월23일 여야 의원 50명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군 부대의 이라크 추가 파병 중단 및 재검토 결의안’을 제출했다. “김선일씨 피랍 등 일반 국민들의 안전마저 심각하게 위협당하는 상황 속에서 평화 재건 임무 수행이 불가능하다”며 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에게 추가 파병 중단을 권고하는 것이었다.

이날 새벽 김선일씨 참수 소식을 전해들은 천정배 원내대표 등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소속 의원들에게 결의안 제출을 며칠만 늦춰달라고 호소했다. 국민적 분노와 추모 분위기를 고려해 여당 의원답게 처신하자는 이유였다. 하지만 열린우리당 의원 27명은 격론 끝에 재검토 결의안을 예정대로 국회에 제출했다.

열린우리당의 한 재선 의원은 “김선일씨 참수 사건이 알려지자 서명 참석자들 사이에도 논쟁이 벌어졌고, 며칠만 미루자는 신중론도 나왔다. 하지만 민노당과 약속한 일을 미룰 경우 파병 반대에 대한 이니셔티브를 빼앗길 뿐 아니라, 분위기가 잘못된 애국주의로 흐를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그대로 강행했다”고 말했다. 민노당 의원 10명의 파병 철회 드라이브가 여당 내부의 진보 성향 의원들의 고민과 반성, 결단을 촉발하는 소금 역할을 한 셈이다.

둘째, 민노당의 원내 진출로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법안을 제출할 수 있는 상시적 통로가 열리고, 제도권 바깥에서만 논의됐던 민감한 의제들이 본회 의장과 상임위에서 본격 논의되기 시작했다. 지난 6월28일 민노당의 권영길·심상정·조승수 의원 등이 주도한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안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 △고금리제한법안(대부업법 개정안) 등 ‘민생 3법’ 발의가 대표적 사례다. 기존 보수정당이 여론에 떼밀려 입법은 했지만, 임대업자나 고리대금업자들이 얼마든지 빠져나갈 허점을 터놓아 사회적 약자의 피해가 계속되는 것을 민노당 의원들이 봉쇄하고 나선 것이다.

국회에서 ‘왕따’, 무너진 캐스팅보트

또 민노당은 민주노총위원장 출신인 단병호 의원 주도로 노동계의 최대 현안인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위한 노동 4법(근로기준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파견노동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직업안정법) 개정 드라이브도 시작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명문화, 기간제 노동 제한, 파견법 폐지 및 불법 파견 금지,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권 보장 등 노동부조차 법제화에 난색을 표해온 민감한 내용들로 논란이 불가피한 것들이다. 그러나 김혜경 민노당 대표는 “현실적인 법제화 과정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활발한 연대와 설득으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할 것”이라며 “이 법안은 (민노당) 원내 진출 이후 변화된 사회 지형의 상징”이라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셋째, 국회에서 관행으로 용납됐던 불합리한 요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시정하는 작업도 본격화됐다. 지난 7월8일 국회운영위원회는 교섭단체 정책연구원 수를 늘리는 규약 개정안을 상정해 통과시켰다. 각 정당이 당료들의 인건비를 국회로 떠넘기기 위해 새 국회가 출범할 때마다 자행해온 관행에 따른 것으로, 지금까지 여야 모두 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국회 개혁을 외친 열린우리당조차 현재 29명의 정책연구위원 가운데 14명에게 정당 직책을 겸임토록 하면서 사실상 인건비를 국회로 떠넘겨왔다. 하지만 심상정 민노당 의원은 “정책연구원 제도가 교섭단체의 인건비 부담을 국회로 떠넘기는 제도로 악용되고 있다”며 시정을 촉구하면서 공론의 영역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변화 조짐에도 불구하고, 제3당으로 급부상한 민노당의 미래를 마냥 장밋빛으로 그려내기에는 아직 현실적 한계가 너무 많다.

일단, 민노당이 교섭단체 중심인 국회에서 절처히 왕따당하면서 유력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할 것이라던 기대는 점차 물거품이 되고 있다.

심상정 의원의 보좌관으로 변신한 손낙구 전 민주노총 교육선전실장은 “우리 모두 기대와 설렘으로 최초의 원내 진출을 맞았지만, 10석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음을 절감하는 나날”이라고 말했다. 천영세 민노당 의원단 대표는 13.1%의 비례대표 지지율과 정치적 상징성 등을 감안해 국회부의장과 상임위원장 한 자리를 할당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소수당의 설움뿐이었다. 상임위원장은 고사하고, 재벌 개혁에 역점을 둔다는 당 차원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오랫동안 정무위 배치를 준비해온 노회찬 의원을 일방적으로 법사위로 배정했다. 국회는 지난 1년여 동안 이라크 추가 파병 반대에 앞장선 민노당 권영길 의원에게 김선일씨 피살 사건을 추궁할 마이크조차 주지 않았다. 최순영 의원은 민노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교섭단체 중심의 이런 횡포에 울분을 토하며 눈문을 흘렸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현실에 별다른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노당은 교섭단체 요건을 비례대표 5석, 또는 정당득표율 5%로 낮추는 방안을 제안하고 있지만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관심이 없다. 교섭단체의 수석부대표 사이에 비공식 회담을 통해 국회 운영 전반을 결정짓는 관행을 타파하자며 국회운영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제출하고, 상임위별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캐스팅보트를 행사하는 전략 등 대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지만 그 효과는 장담하기 어렵다.

의원단과 당 지도부 이원화의 한계

민노당의 한계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만 촉발되는 게 아니다. 원내 진출 이후 폭주하는 각종 정책 현안에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정책 역량을 갖추지 못해 제 목소리를 내는 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최근 핫이슈로 부상한 행정수도 이전 문제와 고위공직자 비리조사처에 대한 기소권 부여 논란 등 민감한 현안에 뚜렷한 당론을 확정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김종철 민노당 최고위원은 “국회 밖에 머물 때는 국가보안법, 이라크 파병 등 이념적 가치 판단이 명확한 과제에 대한 입장만 정리하면 됐다”며 “지금은 이념보다는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판단을 요구하는 모든 국가 정책들과 맞닥뜨려 체계적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데, 아직은 내부 역량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민노당은 소속 의원 10명이 월 세비 620여만원(실수령액 기준) 가운데 180만원만 급료로 가져가고, 연봉 5천만원 수준인 보좌관들 역시 월 149만5천원을 제외한 돈을 모두 당에 반납하는 방식으로 마련된 재원으로 40명의 정책연구원을 채용했지만, 부족한 정책 기능을 보완하는 데 한계가 뚜렷하다. 주대환 정책위의장은 “정책 기능이 취약하다는 게 민노당의 가장 아픈 구석이지만, 당장 이를 보강할 재원이나 인력풀의 한계가 많아 고민스럽다”고 말했다.

민노당이 처음 도입한 ‘공직과 당직 겸임 금지’ 원칙도 의정 활동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요소로 지적받고 있다. 민노당은 지난 5월6일 중앙위원회에서 논란 끝에 이런 원칙을 확정하고, 10명의 소속 의원을 배제한 채 원외 인사로 당 대표와 최고위원회의를 구성했다. ‘의원단은 최고위원회의 방침에 따라 원내 활동을 집행한다’는 당 지도부 우위론도 확고히 했다.

당시 민노당은 ‘국회의원의 당이 아닌 당원들의 당 구성’을 그 이유로 내세웠다. 의원들이 당무에서 손을 떼고 의정 활동에 주력하면서 효율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한달여 만에 이런 실험에 대한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당장 이해찬 총리 인준안 표결을 두고 논란이 촉발됐다. 의원들은 “특별히 반대할 이유가 없다”며 인준에 무게를 뒀지만, 최고위원회는 “이라크 파병에 찬성하는 총리를 인정할 수 없다”는 명분론을 앞세워 인준 반대를 결정했다. 의원들은 당 우위 원칙에 따라 반대표를 던졌지만, ‘민노당은 샴쌍둥이’라는 언론의 조롱을 받는 등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최고위원회의나 의원단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원칙을 지키겠다고 합창한다. 박용진 민노당 대변인은 “원내외 분리는 정치인으로서 끊임없이 타협을 요구받을 수밖에 없는 민노당 의원들의 선택이 ‘기성 정치인과 똑같다’는 비판을 불러와 민노당이 공멸하는 것은 막자는 공포심에서 비롯됐다”면서 “아직 이 원리는 유효하다”고 말했다.

2012년 집권의 길은 멀고 험하다

하지만 권영길 전 대표, 천영세 전 부대표, 노회찬 전 사무총장 등 중량감 있는 인사들 대부분이 원내에 진출한 상황에서 상대적 약체인 원외 인사 중심의 최고위원회가 이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지도할지, 또 의원의 표결에 어디까지 당이 개입해야 하는지 등 논란거리는 무성하다. 민노당의 한 의원은 “현재 당과 의원단의 의사결정 구조가 너무 중층적이라 대응력이 떨어진다”며 개선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제 막 17대 국회 원구성을 마친 현실에서 민노당의 원내 진출 성과나 그 성패를 가늠하는 것은 섣부르고 위험하다. 그러나 확고부동한 원내 제3당으로 거듭나고, 김혜경 당 대표가 제시한 2012년 집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민노당이 넘어야 할 산이 너무 험난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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