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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은행 파업의 뼈아픈 진실

등록 2004-07-16 00:00 수정 2020-05-03 04:23

외국 자본의 금융시장 장악이 만든 폐해… 씨티그룹의 상장 폐지 등에 맞서 독립경영 주장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한미은행 노사가 지난 12일 새벽 파업사태 수습을 위한 합의안을 마련해 조합원 총회의 추인절차를 남겨놓고 있다. 이번 한미은행 파업 사태는 보름을 넘기면서 지난 2000년 말 국민·주택은행 노조가 세운 기록(8일)을 깨고 은행 사상 최장기 파업을 지속했다.

‘특공대’ 사모펀드, ‘정규군’ 외국 은행

한미은행 사태를 둘러싼 쟁점은 크게 △한미은행 상장 폐지 철회와 독립경영 △비정규직 고용 보장 △통합 뒤 점포 수 유지 등이다. 은행 부문 노사 관계에서 영업이 보름 넘게 파행을 빚고 있는데도 노사간 교섭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건 매우 이례적이다. 무엇보다 사실상 협상의 열쇠를 쥔 씨티그룹이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미은행을 인수한 씨티그룹은 한미은행 지분 99.33%를 갖고 있는 대주주다.

외국계 자본이 국내 금융권 전반을 이미 장악하고 있지만, 씨티그룹의 한미은행 인수와 이를 둘러싼 노사 갈등은 전혀 새로운 양상을 보여준다. 이번 사태의 핵심 쟁점인 한미은행 상장 폐지와 독립경영과 관련해, 한미은행은 지난 9일 임시 주총을 열어 상장 폐지 승인 절차를 끝냈다. 물론 행장을 국내 출신 인사로만 하자거나 사외이사 중 한명을 노조가 추천할 수 있도록 하라는 노동조합의 요구는 과도하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노조의 이런 요구는 상장 폐지 이후 이사회의 독립성을 보장받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조는 왜 독립경영을 요구하는 것일까?

국내 은행들은 외환위기 이후 수많은 정리해고자들의 눈물 속에 대대적인 인력 감축과 통·폐합, 공적 자금 투입을 거치면서 부실을 털어냈다. 외국 자본의 한국 금융시장 장악 과정을 보면, 우선 외환위기가 터진 뒤 미국 금융자본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국제통화기금(IMF)이 돈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대포’를 쏘면서 대규모 구조조정을 압박했다. 한국 금융시장에 진출할 사전 정지작업을 한 것이다. 그 뒤 한미은행의 옛 대주주였던 칼라일 펀드 같은, ‘특공대’라고 할 수 있는 사모펀드(소수 투자자로부터 모은 자금을 운용해 매매 차익을 추구하는 펀드)가 들어와 또 한 차례 구조조정을 통해 시장을 평정했다. 론스타와 뉴브리지캐피털이 각각 대주주인 외환은행과 제일은행도 특공대가 장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수차례의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이제 리스크가 사라진 한미은행에 ‘정규군’인 미국 정통 은행인 씨티그룹이 들어와 한미은행 수익을 따먹기 시작한 것이다.

노조 파업으로 기업가치가 떨어지고 대규모 고객 예금 이탈로 유동성 위기가 닥칠지도 모르는데도 씨티그룹이 한미은행 상장 폐지를 강행한 이유는 뭘까? 사모펀드 자본은 주식시장에서 기업 가치를 최대로 높인 뒤 팔아 시세차익을 올리는 게 목적이지만, 씨티그룹은 은행 자체 영업을 통해 수익을 빼내는 금융자본이다. 이와 관련해 금융노조 하익준 부장은 “한미은행이 주식시장에 상장돼 있는 한 주주들한테 배당금을 줘야 할 뿐 아니라 여러 주주들과 감독당국의 경영 감시를 받기 때문에 이사회를 대주주 멋대로 장악할 수 없게 된다”며 “한미은행에서 벌어들인 수익을 마음대로 처분하기 힘들다고 판단되자 (씨티그룹이) 상장 폐지를 강행한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과 감독 당국의 감시 및 견제를 피해 씨티그룹 미국 본사로 수익을 쉽게 송금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상장을 폐지했다는 것이다.

주주 감시 안 받고 수익 빼가겠다?

씨티그룹이 한미은행 수익을 모두 미국으로 이전하는 데 대해 “그것이 왜 문제냐”고 물을 수 있다. 물론 이를 법적으로 규제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장사해 번 돈이 고스란히 해외로 빠져나갈 경우 한국 경제는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그동안 한미은행이 벌어들인 수익이 국내 주주들한테 배당금 형태로 분배되면서 이것이 국내 경제의 구매력으로 연결됐지만, 이제 상장 폐지에 따라 모든 이익이 대주주한테 귀속될 게 뻔하다. 또 수익이 나면 회사를 키워 일자리를 더 늘리는 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인데 이익이 해외로 빠져나가버린다면 재투자를 통한 신규 일자리는 창출될 수 없고, 국내 은행은 외국 거대자본이 잇속을 챙기는 창구로 전락하게 된다.

파업의 장기화에도 꿈쩍하지 않던 씨티그룹은 노조가 제풀에 지쳐 백기 들고 투항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태도를 막판까지 고수했다. 국내 부유층의 씨티은행 선호도가 높기 때문에 파업에도 불구하고 기업 가치 측면에서 큰 손실은 없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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