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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답방길은 열릴 것인가

등록 2004-07-16 00:00 수정 2020-05-03 04:23

온갖 소문 난무하는 2차 남북 정상회담… 역시 ‘핵문제 해결’이 열쇠다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북한 당국은 노무현 정부를 그리 곱게 보지 않는다.

이는 지난해 노 정부의 취임 초기부터 죽 그래왔다. 하지만 북한은 남쪽 당국과 등을 돌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미국 부시 정부의 선제 공격 위협 공세를 견제하고, 극심한 내부 경제난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싫으나 좋으나 남쪽 당국과 ‘적절한’ 협력이 불가피하다. 그러면서 북한은 ‘민족 공조’를 줄기차게 강조해왔다. 물론 북한은 남쪽 당국이 이런 주장에 선뜻 호응해오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 듯하다. 이미 노무현 정부의 본질과 능력을 간파해온 그들이다. 남쪽의 여러 정권을 겪어온 북한은 남쪽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보통 1년은 관망하고 그 다음에 대남 정책의 방향과 협력 수위 등을 결정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다면 지금 북한은 남쪽과 어느 수준과 깊이에서 대화와 협력을 원하는 걸까.

노무현 정부 신뢰하지 않는다

2차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한 온갖 소문이 난무하고 있다. 얼마 전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김대중 전 대통령쪽이 중국 고위층에게 들은 얘기라며 김 위원장의 적절한 시기 남한 답방에 대해 발언한 것이 발화점이다. 또 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의 남·북한 동시 방문을 계기로 양 정상의 블라디보스토크 만남 가능성을 타전하기도 했다. 이는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주변 분위기가 예전보다 성숙한 데 따른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읽힌다. 지난 6월 베이징에서 열린 3차 6자회담에서 북-미 양국이 핵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안을 내놓아 실질적인 협상 단계로 들어섰다. 남북 관계도 개성공단 사업 본격화, 경의·동해선 도로·철도 연결 등이 임박해 있다. 다음 단계로 예상할 수 있는 빅 이벤트로 남북 정상회담을 꼽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셈이다.

하지만 북한 문제에 정통한 소식통들은 정상회담 조기 개최설에 고개를 내젓는다. 물론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7월9일 국회 정치 분야 대정부 질문 답변에서 밝혔듯이 “답방은 기본적으로 김 위원장이 결심해야 성사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북한의 태도나 분위기를 보면 김 위원장의 답방이 임박한 것으로 점치기는 조심스럽다. 7월8일 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인 박용길 장로 등 남쪽 인사의 김일성 주석 10주기 조문 방북이 무산된 것과 관련해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가 낸 담화는 북한 당국의 속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조평통은 담화에서 “우리의 체제를 부정하고 우리를 대화 상대로 여기지 않으려는 자들과는 더 이상 상종할 의사가 없다”며 “북-남 사이의 초보적인 인사 내왕도 가로막는 자들에게는 내왕의 길을 열어줄 생각이 없다”고 강조했다.

북의 경제적 실리 기대하기 어려워

이어 조평통은 남한에서 총리와 통일부 장관이 새로 부임하자마자 “북-남 관계를 반민족적이며 반인륜적인 6·15 이전의 (김영삼) 문민정권 시기로 끌어가려는 데 대해 책임을 엄격히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더 주목할 대목은 다음에 나온다. “이미 천만부당한 (대북 비밀송금) ‘특검’ 소동으로 6·15의 의미를 훼손하려 했고, 이제 와서는 동족이고 대화상대인 우리의 체제마저 부정하려는 남조선 당국의 오만불손한 행위에 절대로 수수방관할 수 없다.” 북한은 이 담화를 낸 뒤 7월13일부터 15일까지 속초에서 열릴 예정이던 남북 해운 실무접촉의 연기를 통보했고, 남쪽 민간단체의 방북도 미뤘다.

물론 북한 당국의 이런 토라진 태도는 다분히 정치적 공세의 성격이 짙다. 따라서 오래갈 것으로 보는 이는 거의 없다. 남쪽 당국이나 민간과의 협력을 마냥 미룰 수 없는 게 북한 내부의 다급한 사정이다. 북한 당국은 어떤 방식이든 노무현 정부의 소극적 태도에 ‘경고’할 필요성을 느꼈을 법하다. 정작 관심을 갖고 주시할 대목은 조평통이 담화에서 문제를 삼는 두 가지 불만사항이다. 첫째는 대북 비밀송금 특검에 대한 불만으로, 이는 2차 정상회담과 관련해 곱씹어볼 만하다. 전문가들은 “정상회담이 성사되려면 뭔가 남북간에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북한은 지난 2000년 1차 정상회담 때 현대의 대북사업 지원을 지렛대 삼아 5억달러를 손에 쥐는 실리를 거뒀다.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통일하는데 대한 문제’에 남쪽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등 북쪽의 입장을 상당 부분 반영한 공동합의문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북한은 1차 정상회담 때와 같은 금전적 실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노무현 정부는 정상회담과 관련된 대북 비밀송금 특검을 수용하는 바람에 비공식적 거래는 상상도 할 수 없게 됐다. 따라서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에 무언가를 주려면 국민을 설득할 만한 뚜렷한 명분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서 나온 게 최대 현안인 핵 문제의 진전이다. 노무현 정부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국면 전환을 꾀하고 싶어도 핵 문제 해결이 불투명한 상황에서는 선뜻 정상회담을 하겠다고 먼저 나설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를 확인하듯 김종민 청와대 대변인은 7월6일 “북핵 문제의 구체적인 해결 조짐이 없는 한 남북 정상회담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노 대통령의 입장”이라고 정상회담의 조기 개최를 강하게 부인했다.

물론 일각에서는 “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이 서로 신뢰를 쌓으면 이를 발판으로 북한의 대미 태도변화도 유도할 수 있고, 핵 문제 해결에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는 견해도 나온다. 하지만 핵 문제에 관한 한 미국과 풀어야 한다는 것이 북한의 오랜 입장이다. 또 북한은 노무현 정부가 자신들과의 합의를 토대로 미국을 설득할 수 있을지에도 회의적이다. 북한은 부시를 설득하기 위해 취임 초기 노구를 이끌고 워싱턴에 갔다가 무안만 당하고 돌아온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갖고 있다. 더구나 현 노무현 정부는 파병이나 주한미군 감축, 재배치 등 미국과의 각종 현안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는 인식을 북한이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최근 북한을 다녀온 재미 동포학자도 비슷한 견해를 내놓는다. “북한 지도부에는 민족 공조에 미온적이면서 미국을 감당하지 못하는 노무현 정부가 미덥지 않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남북 정상회담 자체가 핵 문제 해결에 어떤 돌파구를 마련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은 허망한 기대인 셈이다.

남한 내부의 분열도 중요한 변수

북한 내부 소식에 정통한 한 전문가에 따르면 ‘남한 내부의 분열 정도’도 정상회담 개최의 주요한 변수가 된다. 다행히 야당인 한나라당이 이전과 달리 개성과 금강산을 다녀오는 등 대북과의 변화 조짐을 보이며, 정책도 더 유연해지고 있다. 김 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한다고 해서 반대할 사람도 이전보다 눈에 띄게 적은 듯하다. 북한은 여야가 합의한 국가보안법 폐지 혹은 전향적 개정을 강하게 희망하고 있다. 이는 명시적으로 북한 체제를 인정하고, 진정한 화해와 협력의 파트너로 삼는 출발점이다. 또 국가보안법의 존폐 여부는 남쪽 내 다양한 민간단체들이나 기업들의 대북 접근과 협력을 더 자유롭고 용이하게 유도할 수 있는 실리와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이런 터에 튕겨나온 박용길 장로 등 남쪽 인사의 김 주석 조문 불허 방침은 북한 지도부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런저런 불편한 상황이 김 위원장의 남행 발걸음을 붙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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