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업도시’ 안 들고 나온 전경련… 토지 수용권 등 국가의 권한까지 넘겨달라 요구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지난 1998년 초 김대중 정부 출범 때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부설 싱크탱크인 한국경제연구원을 통해 정부 조직 개편에 관한 제안서를 내놓았다. 전경련은 당시 정부의 경제정책 및 금융통화정책 담당부서를 아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국방부와 외무부만 남기고 정부의 모든 부처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까지 전경련 내부에서 흘러나와 파문이 일기도 했다. 이처럼 전경련은 정부의 모든 규제를 시장과 기업의 적으로 보고 있다.
재계의 온갖 민원 압축해놓은 안
최근 전경련이 또다시 파격적인 ‘기업의 자유’를 들고 나와 논란이 불붙고 있다. ‘기업도시’ 건설 방안이 그것이다. 전경련은 지난 6월15일 ‘기업도시 건설을 위한 정책포럼’을 열고 9월 정기국회에서 기업도시건설특별법(가칭)을 통과시켜달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지방자치단체 몇곳에 대기업 주도로 산업시설·주거·학교·병원·복지시설 등을 갖춘 100만∼1천만평 이상 규모의 자족도시를 건설한다는 게 전경련의 기업도시 구상이다. 전경련은 기업도시 형태로 △전통 제조업과 정보기술(IT) 등 미래 산업형(사례: 일본 도요타시) △콘텐츠, 문화, 레저산업이 복합된 고부가치형 서비스업(미국 할리우드) △산업시설과 연구개발(R&D) 시설이 집적된 R&D형(스웨덴 시스타 사이언스시-에릭슨·핀란드 울루시-노키아)을 제시하고 있다.
전경련 유재준 기업도시팀장은 “정부의 각종 규제 때문에 기업의 투자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고용 창출도 안 되고 경제의 잠재 성장능력도 떨어지고 있다”며 “기업도시라는 공간 안에 특정 대기업이 주도하거나 여러 기업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미래성장 산업시설을 유치하면 지역 균형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경련은 기업도시가 건설되면 국내총생산(GDP)과 취업자 수가 3년간 연 1∼2% 증가하고 주택가격 안정도 도모할 수 있다며, 500만평의 첨단산업 기업도시를 개발할 경우 산업시설과 배후시설에 3년간 28조원이 투자될 것으로 추산했다. 지방자치단체가 토지 수용 및 규제 완화를 지원하되 개발·시공·분양은 기업이 담당하게 된다.
그런데 기업도시가 주택가격 안정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애초에 전경련은 부동산 시장이 과열되자 대안으로 대기업 주도의 신도시 개발 추진을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다가 “부동산 가격 안정을 핑계로 대기업이 신도시 개발 사업에까지 뛰어들어 막대한 개발 이익을 차지한다”는 비판이 제기될까 우려해 기업도시로 방향을 튼 것으로 전해진다. 투자를 통한 일자리 창출과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좋은 정치적 명분이 있는데다, 개발이익도 챙기면서 정부 규제도 대폭 완화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방안으로 ‘기업도시’라는 그림이 나온 것이다.
“투자할 테니 개발이익 보장하라”
전경련의 기업도시건설특별법 제안은 그동안 기업들이 줄곧 요구해온 대정부 민원을 모두 압축해놓고 있다. 전경련은 우선, 도시 개발 단계부터 기업이 주도해 산업시설과 주거·상업시설 등을 건설하고 기업도시 안에서는 민간기업에도 토지수용권을 허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 이렇게 조성된 토지의 처분 가격과 주택공급 방식을 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전경련의 주장이다. 토지 수용권과 처분권 등 정부의 고유 권한을 기업도시 특구에서는 기업이 행사하겠다는 것인데, 대기업이 사들인 땅이므로 주택 일반분양 등 재산권을 무제한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논리다.
전경련은 이 밖에 기업도시 안에서 △출자총액제한 폐지 혹은 예외 인정 △자립형 사립고 및 특목고 설립 허용 △영리법인의 대학 설립 허용 △외국인 교원 임용 및 외국인대학 설립 허용 △기여입학제 허용 △영리법인의 종합병원 개설 허용을 요구하고 있다. 특별법 건의안은 또 △경제자유구역 수준의 조세 및 부담금 감면 혜택 부여 △긴박한 경영상의 요건이 없어도 정리해고 허용 △근로자 파견사업 전면 허용 △파업시 대체근로 허용까지 담고 있다. 공정거래법, 노동법, 교육법 등 수많은 법률 조항이 기업도시에는 사실상 무력화되는 것이다. 전경련 유재준 팀장은 “주거, 학교, 의료, 노사관계 등이 모두 해결되지 못하면 어느 기업이 지방의 기업도시로 가겠느냐. 규제의 일괄 타결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며 “현행 법 한두개를 고쳐서는 기업도시 구상이 불가능하므로 특별법 형태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전경련의 이런 기업도시 구상은 “투자할 테니 대신 규제를 풀고 개발이익을 보장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전경련은 “학교·의료 분야의 요구사항은 지방 기업도시로 사람들을 오게 만들기 위한 인센티브”라고 말하지만 대기업 등 영리법인이 운영하는 종합병원과 외국인대학 등이 들어서야 개발이익이 확실하게 보장된다는 계산도 깔려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과거에 재벌이 비업무용 부동산을 대거 사들여 비록 본업에서 손해보더라도 엄청난 부동산 차익을 냈듯, 기업도시 안의 생산활동 못지않게 디벨로퍼(부동산개발업자)로서 이익 확보도 중요한 요소로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온갖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기업도시 방안은 개발·투자 이익에 대한 ‘보장성 보험’을 정부한테 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규모 기업도시 건설에 따른 개발이익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전경련쪽은 “이익이 안 난다면 기업도시를 건설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며 “개발이익 중 일부는 시설투자 또는 기부체납 등으로 자치단체에 넘겨줄 수 있지만, 모두 다 정부와 자치단체에 빼앗길 수는 없다. 봉사하기 위해 기업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기업도시를 유치하려고 이미 발벗고 뛰고 있는 지방자치단체들도 개발이익을 더 많이 보장해주기 위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지난 15일 열린 기업도시 건설 포럼에 참석한 경남 진주시쪽은 “대기업이 기업도시를 개발해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면 개발이익을 지역의 복지시설 등에 재투자하는 방식을 고려하고 있다”며 “그러나 이것은 개발이익을 시가 환수하는 것이 아니라 재투자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며, 일정한 개발이익은 보장해줘야 기업이 우리 지역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말했다.
자치단체들의 기업도시 유치전은 벌써 본격화됐다. 특별법안을 정부에 제출하기도 전에 전경련이 각 자치단체에 제안서를 보내 사전 정지작업을 벌여왔기 때문이다. 전경련이 밝힌 후보지는 경남 김해와 진주, 경북 포항, 전북 군산과 익산, 강원 원주, 전남 광양 등이다. 이들 자치단체는 각종 세금우대 정책 등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으면서 정부가 과감하게 규제를 풀어 기업도시 설립을 지원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전경련이 자치단체들을 앞세워 불을 지피고, 이에 따라 투자 유치에 사활을 건 자치단체들이 중앙정부를 압박하는 양상인 셈이다. 진주시쪽은 “기업도시 후보지 180만여평의 토지 매입비(약 1천억원)에 대한 대출이자를 건물 준공 때까지 시비로 보전해주고 공업 용수도 10년간 무상으로 제공할 방침”이라며 “재산세, 종토세를 대폭 깎아주는 인센티브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진주시는 조만간 전경련과 대기업들을 방문해 투자 유치를 제안할 예정이다.
정부의 반응은 어떨까? 열린우리당 홍재형 정책위의장은 “특별법이 필요하면 열린우리당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반겼고, 김광림 재정경제부 차관도 “전경련의 건의를 반영해 지원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합창으로 화답했다. 건설교통부는 ‘기업도시 실무위원회’를 구성해 전경련의 요구를 본격 검토할 예정이다. 재경부 지역경제정책과쪽은 “투자가 잘 안 되는 상황에서 기업도시 구상은 일자리도 창출되고 대환영할 일”이라며 “관련 부처끼리 협의한 건 아니지만 전경련이 구체적인 안을 제출하면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 · 정은 “협조하겠다” 반겨
물론 기업도시 하나를 만드는 데 28조원이 들기 때문에 재벌그룹 빼고는 엄두를 내기 어렵다. 전경련에 따르면, LG는 기업도시에 아직은 별 관심이 없고, 충남 아산시 탕정면에 삼성전자 기업도시 건설을 진행 중인 삼성쪽이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삼성이 현행 ‘산업입지 및 개발에 관한 법률’로는 탕정 기업도시를 건설하는데 한계에 부닥치자 기업도시특별법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이선근 위원장은 “기업도시 건설 방안은 소수 재벌에 대한 특혜 조처이자 기업투자를 조건으로 재벌자유구역을 설치하겠다는 것”이라며 “토지 수용권 등 국가의 권능까지 재벌한테 부여하는 재벌 공화국 설계도”라고 비판했다. 지난 2002년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한 경제자유구역법 제정 때 빚어진 특혜 논란이 국내 재벌의 기업도시 건설을 놓고 또 한바탕 벌어질 조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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