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풍’ 음식과 상품 인기 만발… 여행자들이 각국의 문화 전파자로
▣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타이 쌀국수로 점심을 먹고, 인도 카페에서 ‘짜이’를 마시고, 티베트 불상을 구경하고, 네팔 전통 의상을 쇼핑한다. 이 모든 것을 하려고 굳이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된다. 서울 인사동 일대에서 언제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후진적이라고 여겨졌던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문화가 새로운 문화 흐름으로 떠오르고 있다. 사람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문화까지 실어나르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 문화의 확산에는 단순한 관광객에서 능동적인 문화 전파자로 바뀐 사람들의 기여가 크다. 서울 인사동, 홍익대 앞, 압구정동은 ‘아시아풍’의 진원지다.
‘클러버’에게 사랑받는 동남아 의상
6월8일 오후 3시. 인사동의 종로쪽 입구에서 원영순(52)씨가 노점상 좌판을 벌이고 있었다. 원씨가 풀어놓는 물건은 온통 원색과 금빛으로 가득하다. 은색 실로 코끼리를 수놓은 가방, 타이 고산족의 전통문양이 들어간 지갑, 베트남에서 수입한 원색의 스카프…. 대부분 동남아시아에서 수입한 물건들이다. 그는 3년 전부터 인사동에서 동남아시아 물건을 수입해 팔고 있다. 그의 장사는 베트남과의 각별한 인연에서 시작됐다. 베트남전 참전군인이었던 남편은 1990년대 중반부터 베트남을 자주 드나들었다. 여행은 사업으로 이어졌다. 베트남 물건을 떼다 한국에서 파는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남편은 지난해 3·1절에 베트남에서 심장마비로 숨졌지만, 그 뒤에도 그는 장사를 계속하고 있다.
그동안 인사동에는 동남아 물건을 파는 노점상이 서너개로 늘었다. 원씨는 “예전에는 젊은 여성들이 주고객층이었는데 요즘에는 중년여성들도 물건을 많이 사간다”고 전했다. 물건을 구경하던 김영미(32)씨는 “대담한 색깔과 자연스러운 옷감이 마음에 들어 이런 옷을 가끔 산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동남아풍의 의상과 원색의 스카프를 걸친 여성들이 스쳐 지나갔다.
최근 몇년 사이 ‘에스닉’(Ethnic) 코드가 유행하면서 의상 디자인에 동남아시아 물결이 스며들고 있다. 이미 동대문 시장과 남대문 상가에는 인도풍 또는 동남풍의 의상을 파는 도매상이 여럿 성업하고 있다. 히피 분위기를 풍기는 동남아 의상은 특히 ‘클러버’(클럽에 자주 가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원씨의 노점을 지나 20여m만 올라가면 ‘작은 인디아’라는 카페 간판이 눈에 띈다. 인도 전통차와 먹을거리를 파는 카페다. 카페로 올라가는 계단부터 금박으로 만든 코끼리 그림이 눈에 띄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인도 음악이 들려온다. 인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가게 한켠에는 인도 현악기인 시타르, 타악기인 타불라가 놓여 있다. 이 가게에서는 인도 전통 요구르트인 ‘짜이’를 비롯해서 인도식 만두인 ‘사모라’, 인도 전통 카레까지 즐길 수 있다.
‘작은 인디아’의 주인 정영숙씨는 1987년 첫 여행 이후로 20차례가 넘게 인도에 다녀왔다. 인도에 갈 때마다 소품들을 사모았고, 내친 김에 카페까지 열게 됐다. 정씨는 “인도 문화를 알리고 싶어 카페를 열었다”고 말한다. ‘작은 인디아’는 차를 마시는 공간을 넘어 인도 여행 정보를 교환하고 인도에 대한 향수를 달래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인도 동호회의 모임도 심심찮게 열린다.
타이 · 베트남 음식의 대중화
인사동을 지나 안국동 방향으로 올라가면 티베트 박물관이 나온다. 1층에는 티베트 불교의 유물이, 2층에는 티베트인의 일상용품이 전시돼 있다. 티베트인들의 손때가 묻은 활과 신발은 물론 승려의 유골로 만든 불상도 전시돼 있다. 2001년 문을 연 이 박물관에는 한 ‘티베트 애호가’의 집념과 애정이 들어 있다. 박물관 관장인 신영수(55)씨는 산을 좋아해 1990년 티베트로 여행을 갔다. 신 관장은 티베트의 산뿐 아니라 티베트 문화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특히 원색의 아름다움이 그를 사로잡았다. 틈날 때마다 티베트를 드나들었고, 어느새 1천여점의 유물을 모았다. 그 유물을 통해 티베트 문화를 알리고 싶어 2001년 티베트 박물관을 열었다. 신씨는 “갈수록 방문객 수가 늘어난다”며 “두어해 사이에도 아시아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음을 실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티베트 박물관에서 내려오면 ‘아트선재센터’가 나온다. 아트선재센터 1층에는 인도 음식점 ‘달’(DAL)이 자리 잡고 있다. 인도 고유의 색상인 봄베이 핑크로 도배된 달은 한껏 인도 고급식당의 분위기를 풍긴다. 2000년 3월에 문을 연 달의 고객층도 달라지고 있다. 달의 허정훈 매니저는 “인도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젊은 층뿐 아니라 나이 드신 분까지 찾아오고 있다”고 전했다. 달이 문을 열 때만 해도 서울에 서너개뿐이던 인도 식당이 최근에는 15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인도뿐 아니라 타이, 베트남 음식도 서서히 자리 잡고 있다. 아트선재센터 부근에도 최근 타이 음식점 ‘애프터 더 레인’(After the rain)이 문을 열었다. 서울 강남에서 시작된 동남아시아 음식 유행이 전국으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 쌀국수 전문식당인 ‘포호아’는 동남아 음식 열풍을 대표한다. 1998년 서울 삼성동에 1호점을 낸 ‘포호아’는 제19호점 개점을 앞두고 있다. 포호아가 성공을 거두자 포베이 등 비슷한 쌀국수 전문체인이 잇따라 생겼다.
동남아 음식문화의 대중화도 진행되고 있다. 서울 홍대 앞의 타이 음식점 ‘카오산’이 대표적인 곳이다. ‘카오산’에서는 타이의 거리에서 맛볼 수 있는 음식을 부담 없는 가격에 즐길 수 있다. 카오산의 주인 이정임(36)씨는 우연히 여행차 타이에 들렀다가 음식에 매료돼 아예 식당까지 차리게 됐다. 그는 2000년 타이 현지 식당에서 주방일을 하며 음식을 배웠고, 2001년에는 타이에서 요리사 코스까지 이수했다. 이씨는 2002년 홍대 앞에 3평 남짓의 공간을 빌려 음식점을 열었다. 타이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들을 통해 입소문이 나면서 가게 앞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2003년 11월에는 20여평의 널찍한 가게로 옮겼지만, 여전히 식사 때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이씨는 성공 비결을 묻자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타이 문화의 정수를 얼마나 이해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동남아시아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며 “예전에는 동남아시아를 그저 덥고 가난한 나라로만 알던 사람들이 직접 여행을 하면서 그 문화의 매력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동남아 음식 유행은 방송으로 이어지고 있다. 케이블 채널인 ‘푸드채널’은 지난 3월 아시아 음식 만드는 법을 알려주는 를 방영했고, 6월 중순부터는 를 방송할 예정이다. 김대희 푸드채널 홍보담당은 “시청자들이 홈페이지에 동남아시아 요리법을 알려달라고 먼저 요청해왔다”고 밝혔다.
“명품보다 나만의 개성 표현에 적합”
홍대 앞의 옷가게 ‘자연과 사람’은 타이의 천연옷감 나염기술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자연과 사람’의 대표인 강수희(33)씨도 타이 여행을 하다가 타이의 뛰어난 나염기술을 알게 돼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자연과 사람’은 타이의 전통의상에 현대적인 감각을 더한 제품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2002년 홍대점, 2003년 부산점을 열었고 6월 하순에는 백화점에도 입점할 계획이다. 홍씨는 “정형화된 명품 문화가 한계에 이르면서 나만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동남아풍 의상이 떠오르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문화는 저마다의 개성이 있을 뿐 서열로 나눌 수는 없는 것”이라며 “아시아 문화에 대해서도 섣불리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이해하려고 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서구를 넘어 아시아를 발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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