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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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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가까울 수 없다

등록 2004-06-17 00:00 수정 2020-05-03 04:23

자주 독대 · 조언하다 총리 후보에 오른 이해찬 의원과 대통령의 끈끈한 인연… ‘종합 참모장’ 역할 예상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이해찬 국무총리 지명자는 최근 기자가 ‘대통령에 대한 조언자 역할은 어떻게?’라고 묻자 “삼청동 총리 공관과 청와대는 거리가 가깝지 않느냐”라고 말했다(물리적 거리는 100여m이다).

이 말은 그가 총리가 될 경우 대통령과 수시로 만나 깊은 의논을 할 수 있는 관계임을 비친 것으로 읽혔다. 고건 전 총리와 대통령의 관계가 다분히 ‘사무적’이었던 데 비해 사정이 전혀 다르다는 이야기였다.

‘노동위 3총사’로 팀플레이 과시

실제로 정치권에는 ‘이해찬 총리’가 내각을 이끄는 것은 물론이며, 대통령을 가까운 거리에서 돕는 종합 참모장 역할도 겸할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청와대와 열린우리당 관계가 원할하지 못하고,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이 정무 관리에 취약점이 있는 상황에서 그가 자연스레 역할을 넓히리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측은 이 지명자와 노무현 대통령 사이의 길고도 끈끈한 인연에 토대를 두고 있다.

두 사람은 1988년 13대 국회에 나란히 재야 출신 초선의원으로 진출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이들은 당시 노동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이상수 전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단연 주목을 받았다. 노동 탄압이 극심하던 상황에서 이해찬(평민당), 이상수(〃), 노무현(통일민주당) 의원 세 사람이 당이 다른데도 긴밀히 팀플레이를 벌여 정부를 꼼짝 못하게 하는 실력을 발휘한 탓이다.

당시 이들은 상임위 회의장 좌석이 마침 나란히 앉도록 돼 있었다. 한 사람이 질문하다 지치면 자료를 통째로 옆 의원에게 넘겼다. 릴레이식 질문을 끝없이 이어나갔다.

세 의원의 보좌진도 자료를 거의 공유하다시피 했다. 또한 지금까지 보좌진들이 거의 한 식구와 같은 팀워크를 유지해오고 있다. 이해찬 의원의 보좌관을 한 유시민씨는 지금 열린우리당 재선의원이 됐으며, 비서관을 지낸 곽해곤씨는 청와대 제도개선비서관을 거쳐 지금 부동산신탁업협회 부회장으로 재직한다. 역시 비서관을 한 정태호씨는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으로 근무 중이다.

당시 노무현 의원의 보좌관을 한 이호철씨는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하다 최근 퇴직했다. 비서관을 한 이광재씨는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거쳐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이 됐고, 또 다른 비서관 출신인 천호선씨는 청와대 의전비서관으로 근무 중이다. 이상수 의원의 비서관을 한 이화영씨는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이 됐다.

‘이해찬-노무현 관계’는 그 뒤로 주고받기를 거듭하며 이어진다. 13대 국회 도중 노 의원이 “제구실도 못하는 국회의원에 회의가 든다”며 의원직을 내던지고 잠적했다. 그러다 우물우물 국회로 복귀하면서 궁지에 몰렸을 때 이 의원이 나서 그를 적극 엄호했다.

1992년 14대 총선 때는 이 의원이 반동교동 깃발을 들었다가 공천 탈락 위기에 몰렸는데, 그때 노 의원이 “이해찬 같은 사람을 공천하지 않으면 나도 탈당하겠다”고 위력시위를 해서 이 의원이 구제받도록 했다. 노 의원은 이 무렵 3당 합당을 거부하고 DJ 민주당으로 옮긴 상태였다.

1998년 이 의원은 교육부 장관이 되자 노 의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교육개혁을 하려 한다. 그러니 국회에서 뒷받침해달라.” 이에 노 의원은 별 인연도 없던 교육위원회를 선택하고, 교원 정년 단축이나 교사 촌지 파동 따위로 궁지에 몰리던 이 장관을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노 의원이 해양수산부 장관이 되자 이번에는 이 의원이 도움을 제공했다. 고위직에서 사무관까지 함께 참석하는 정책토론회를 열어 중요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부처 운영방식(이 의원이 교육부에서 먼저 실험) 따위를 노 의원에게 전수한 것이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최소한 해당 부처 관료들 사이에선 ‘괜찮았던 역대 장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정치적 난관시 서로 도와… 대선 승리 결정적

대선이 치러진 2002년 가을에는 노 후보가 다시 이 의원을 찾았다. “대선 전략은 역시 이 의원이 맡아줘야겠다”는 이야기였다. 이 의원은 DJ 아래서 총선기획단장과 대선기획단장 등을 여러 차례 거친, 공인된 전략통이었다. 그 무렵은 대선 후보로 선출된 직후 문희상·이강래·정세균 의원 등을 주축으로 대선기획단을 운영했지만 지지율이 신통찮아 고민이 깊을 때였다. 이 의원은 선거대책본부 기획본부장을 맡아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2003년 초 참여정부의 첫 조각 때 노 대통령은 이 의원에게 국가정보원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국정원 개혁과 함께, 아무래도 가까운 위치에서 대통령의 물밑 참모장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기대가 담긴 것으로 읽혔다. 그러나 이 의원은 ‘국정원장 경력이 정치를 오래 하는 데 크게 도움되는 것도 아니고…’라는 생각에서 고사했다고 한다. 이 의원은 당시 기획예산처 장관직을 희망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관료 출신으로 주요 경제부처를 채운다는 원칙에 따라 반영되진 않았다.

그러나 그 뒤로 이 의원은 평균 한달에 한 차례, 많을 때는 한달에 두 차례씩 청와대로 불려들어가 노 대통령과 마주 앉아온 것으로 알려진다. 여권 관계자는 “대통령이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마다 의견을 청취하는 대상에 이 의원이 빠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지난해 12월 노 대통령은 박봉흠 정책실장을 기용하는 등 청와대 개편을 단행했는데, 그때도 이 의원의 조언이 한몫한 것으로 전해진다. 노 대통령은 당시 이 의원에게도 의원직을 버리고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들어와줄 뜻은 없는 지를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은 사실 독특한 성격 탓인지, 동년배 정치인 가운데서 ‘인간적으로’ 친한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런 까닭에 이 의원과 노 대통령이 10여년에 이르러 끈끈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게 한층 주목된다.

그 배경은 일차적으로 두 사람이 재야 출신 정치인으로서 코드가 맞았던 점이 꼽힌다. ‘어떤 사회를 꿈꾸느냐’라는 가치 지향에서 우선 일치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두 사람이 인간관계 측면에선 쿨하면서도, 일에 관한 한 합리주의와 실용주의를 추구한다는 삶의 태도가 비슷하다는 점도 들 수 있다. 여권의 다른 관계자는 “노 대통령과 이 의원 모두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두루 여러 사람을 챙기는 ‘정치권 마당발’과는 정반대의 인간형”이라며 “‘명분도 좋지만 그 명분을 어떤 방식으로 실행하느냐 하는 방법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똑같이 닮았다”고 말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 의원이 바둑과 골프 등을 즐기는 반면에 노 대통령은 ‘일 중독증’이 좀더 강한 편이다.

비슷한 가치 지향에 둘 다 ‘방법론’ 우선

‘고건-노무현 관계’는 막판 언론플레이 사건(고 전 총리쪽이 각료 제청권 행사 불가 이유를 담은 문건을 한 신문에 흘린 일)으로 불신을 쌓은 가운데 끝났다. 반면에 ‘이해찬 총리 카드’에는 노 대통령이 ‘인간적으로 믿는 정치권 동료’를 선택했다는 의미가 담겼다. 이 의원도 의 물음에 “대통령과 총리는 어차피 자주 만나게 돼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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