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 안보 현안에서 무력함 보이는 여권… 한쪽은 무관심에 가까운 침묵, 또 한쪽엔 무조건적 신뢰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냉정과 열정’ 또는 ‘냉탕과 온탕’.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2개의 주요 외교·안보 현안인 주한미군 감축과 국군의 이라크 추가 파병 문제를 대하는 여권의 태도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미국이 지난 6월6일 1만2500명의 병력을 오는 2005년까지 감축하겠다고 한국 정부에 일방적으로 통보하면서 쟁점으로 부상한 주한미군 감축 문제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지나칠 정도로 낙관론에 기울어 있다. 건전한 감시와 대안 제시를 통해 정부를 견인해야 할 열린우리당도 ‘침묵’에 가까운 한가로운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미군 감축 검토할 전문가 없어
반면, 16대 국회 후반기 내내 격렬한 내부 논쟁을 거쳐 지난 2월 국회에서 동의안까지 통과된 ‘국군의 이라크 추가 파병’ 문제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모습이 나타난다. 청와대와 국가안전보장회의, 국방부는 미군의 포로 학대, 미국의 주요 동맹국들 사이에 철군 움직임 확산 등 국제 정세의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미 동맹’과 ‘국제적 약속 준수’를 외치며 파병을 서두르는 데 급급하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의 소장파 의원들은 파병 재검토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추가 파병 문제에 관한 한 여권이 ‘감정의 과잉’ 상태에 빠졌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로 정부와 열린우리당 모두 열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논의 절차와 방식, 그 결과에 따라 한국 정부의 외교적 역량, 세계평화와 인권존중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동의 수준, 나아가 21세기 한반도의 외교·안보 환경까지 규정할 중대 사안에 대한 여권의 이런 태도는 과연 적절한 것일까.
주한미군 문제에 대한 열린우리당의 무관심에 가까운 냉정은 청와대와 국가안전보장회의, 국방부 등 정부의 낙관적 전망과 안일한 대응에 대한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신뢰에 1차적 원인이 있다.
지난 5월14일 미국이 주한미군의 이라크 순환 배치 방침을 밝힌 뒤 미군 감축 문제가 사회적 화두로 등장했지만, 정부와 열린우리당 모두 “한-미 동맹은 굳건하고, 주한미군의 전력은 수보다 질로 강화되고 있다”는 원론만 강조했다.
6월6일 1만2500명의 주한미군 감축 방안이 한국 정부에 공식 통보된 뒤에도 여권의 이런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6월11일에야 국방부의 관련 보고를 들은 안영근 제1정책조정위원장이 “한-미간에 협의가 돼야 철군이 가능하며, 합의가 안 되면 철군을 보류할 것”이라고 밝힌 것이 열린우리당이 내놓은 거의 유일한 대책이다. 떠나겠다는 미군을 어떻게 잡아두겠다는 것일까. 기자들의 이런 질문에 집권 여당의 통일외교안보 정책을 총괄하는 안영근 위원장은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신뢰에 문제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궁색한 답변 뒤에 “앞으로 정책위 차원에서 미군 철수와 이에 따른 전력 공백, 군의 소수정예화 개편 방안 등에 대한 정책청문회를 개최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여당의 이런 논리는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 국방부의 낙관론을 중계방송한 것에 불과하다. 정부 고위당국자들은 일관되게 “미국은 우리 정부에 1만2500명의 감축 계획을 제안한 수준”이라며 “한-미 협의를 통해 조절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중계방송’에 머무는 이유는 주한미군 감축에 관한 정보의 빈곤과 외교·안보 분야 인력풀의 한계가 큰 몫을 하고 있다.
이라크 파병 반대 서명에 적극 참여한 열린우리당 한 초선의원은 “주한미군 문제도 주요하게 논의해야 할 사안이지만, 우리는 그 분야에 전문성이 없다”며 곤혹스러워했다.
실제 열린우리당 안에는 주한미군 감축을 진보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시각에서 점검하고 대안을 제시할 만한 역량을 갖춘 전문인력이 아주 취약한 상태다. 당 안팎에서 자천·타천으로 거론되는 외교·국방 전문가는 장영달(16대 국회 국방위원장), 유재건(한-미 의원외교협의회장), 조성태(전 국방부 장관), 정의용(국제노동기구 이사회 의장), 최성(전 청와대 행정관) 의원 정도다. 그나마 유재건·조성태·정의용 세 의원은 당내 소장파들로부터 “보수적인 시각에 치우쳐,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어, 여권 내부의 논의를 주도하기 어려운 처지다.
‘초당적 협력’ 야당 제안에도 시큰둥
오히려 한나라라당이 제시한 적극적인 해법에도 답을 주지 못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 박진 한나라당 의원은 주한미군의 이라크 순환배치 및 감축 문제가 불거진 지난 5월 미국을 방문해 미군감축 상황에 대한 미국 정부와 조야의 동향을 파악한 뒤 열린우리당 의원 3명에게 “여야 협력이 필요한 위기상황인 만큼 초당적인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거나, 국회에서의 정책청문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정치적 발언으로만 생각지 말라”며 초당적 협력 의지도 밝혔다. 하지만 이들은 “신중한 접근”을 언급할 뿐이다.
주한미군 감축을 ‘고진감래’로 받아들이는 여권 내부의 정서적 공감대, 보수언론의 ‘안보공백론’의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전술적 판단도 여권의 미온적 대응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은 지난 10일 기자에게 “주한미군 감축은 정해진 절차이고, (한-미 관계에) 변화는 와야 하는 것 아니냐”며 “어느 정도 동요는 따르겠지만 거부할 수 없는 추세로 언제까지 우리를 지켜달라고 (미국에) 애걸복걸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의 다른 한 재선의원은 “보수언론이 주한미군 감축 논쟁을 안보 공백을 부추기는 빌미로 이용하는 상황에서 여당이 단선적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며 “신중하게 처신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런 발언은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장의 “(미군 감축은) 무조건 안 된다며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잡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는 5월29일 열린우리당 의원 워크숍 발언과 맥을 같이한다. 미국의 ‘해외주둔 미군기지 재배치 계획’(GPR)에 따른 철수인 만큼 우리가 막을 사안이 아니라는 정서적 기류가 여권 내부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권 내부의 낙관론이나 노무현 대통령의 ‘협상하는 한-미관계론’을 정책적으로 적용하는 정부의 대응을 비판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주한미군 감축에 대해 효과적인 대응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말만 앞세우는 정부와 그런 정부에 대한 감시와 견인 기능을 포기한 듯한 열린우리당의 한가한 태도다.
정부 스스로 밝혔듯, 미국이 주한미군 감축 방침을 통보한 것은 지난해 6월이다.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 등 정부 고위관계자들은 나름의 대응책을 숙의했다. 하지만 그해 9월 미국이 감축 논의를 1년 동안 미뤄달라는 우리쪽 요구를 받아들이자, 이후 미온적으로 대처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한 고위인사는 “미국쪽이 그 이후 주한미군 감축에 관해 별 얘기가 없어 그 내용을 한-미 협상에 반영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반면, 미국은 100년 뒤 한-미동맹을 얘기하자며 지난해 시작된 ‘미래한미동맹 정책구상 회의’에서 용산기지 이전, 미2사단 이전, 주한미군의 (동북아) 역내 안정에 대한 기여 강화론 등을 내걸고 집중적인 협상을 벌여왔다. 한-미동맹 강화가 명분이지만, 실제는 자신들의 ‘해외주둔 미군기지 재배치 계획’(GPR)에 따르는 부담을 우리 정부에 전가하는 치밀하게 계산된 협상 전술을 발휘한 것이다.
국방부의 대응도 문제 투성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해 6월 미국의 주한미군 감축 기류를 감지한 뒤 8·15 경축사, 국군의 날 기념사 등에서 ‘자주국방’을 역설했다. 군의 과학화·정예화가 그 핵심이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현재 정부 관계자조차 “군구조 개혁, 병력 감축 등 구체적인 계획이 마련된 게 거의 없다”며 “이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추가파병 문제 ‘서명운동’으로 책임 끝?
이런 상황에서 조영길 국방장관과 권안도 국방부 정책실장은 지난 11일 열린우리당 정책의원총회에 참석해 주한미군 철수, 용산기지 이전 협상 등을 근거로 “향후 국내총생산(GDP) 대비 3.2%의 국방비 지출이 필요하다”며 여당 의원들의 협조를 당부했다. 국방부는 또 전력 강화를 위한 전력투자 비율 확대 등을 이유로 올해보다 13% 증액된 21조4752억원의 내년도 국방예산안을 기획예산처에 제출했다. 오랫동안 익숙한 ‘예산타령’을 시작한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의 한 관계자는 “국방부의 태도가 못마땅하지만, 미군 철수에 따라 당장 발생할 전력 공백을 메워야 하는 현실적 고민도 무시할 수 없다”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이라크 추가 파병에 대한 여권의 태도는 미군 감축 문제와 정반대 상황이다.
열린우리당 의원 67명은 시민단체인 ‘이라크파병반대비상국민행동’의 파병 재검토 서명에 동참했다. 이들 가운데 김원웅·유기홍·유승희·임종인 의원 등은 서명 차원을 넘어 시민단체와 긴밀히 협력하며 이라크 파병 원점 재검토를 관철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김원웅 의원은 “정부와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16대 국회에서 파병을 결의할 당시보다 더욱 명분이 약화된 추가 파병을 서두르는 상황에서 국민적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긴급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며 “6월 안에 국회에서 파병 원점 재검토 결의안이 처리될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이들의 대응은 변화된 국내외 정세에 눈감은 채 16대 국회 말기인 지난 2월13일 국회를 통과한 파병동의안에 따라 8월 파병계획을 밀어붙이는 정부의 강경론에 대한 견제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이라크 파병 문제에 대한 정책청문회” 소신을 밝혔던 천정배 원내대표 등 열리우리당 지도부가 정부 방침에 따라 파병당론을 조기에 확정하려는 현실에서 당 안팎에 ‘상황 변화에 대한 재검토’ 필요성을 공론화하는 데도 공헌했다. 11일 파병당론을 확정하려던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이들이 파병 재검토 서명 의원 명단을 공개하자 추가 여론 수렴을 명분으로 17일 이후로 시기를 늦춘 것은 서명파 의원들의 압박 때문이다.
하지만 원내 과반을 확보한 집권 여당의 의원들이 서명운동 방식으로 정부와 당 지도부를 압박한 것이 최선인지에는 당 안팎에서 상당한 논란이 일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미군 포로 고문 파문만 보면 서명운동 이상의 행동도 해야겠지만, 주한미군 감축, 한-미동맹 관계 재조정 등 현안이 맞물리고, 여당의 정책 혼선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센 현실에서 시민단체와 서명운동으로 압박전을 펼치는 것은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지난 4일 서명이 시작될 때부터 명단이 공개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일이 이렇게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서명 의원들 안에서도 당 지도부를 압박하기 위해 지난 10일 67명의 서명의원 명단을 사전 동의 없이 언론에 공표한 데 대한 비판과 함께 ‘역풍 현상’도 일부 나타나고 있다. 한 소장파 의원은 “서명자들은 파병 불가, 원점재검토, 단순재검토, 재검토 여부에 대한 당론 수렴 등 동의 수준이 달랐고, 파병 철회나 원점재검토론자들은 10명 안팎의 소수였다”며 “모든 의원의 이름을 성급히 공개해 재검토 여론 확산에 어려움을 겪게 됐다”고 말했다.
성급한 명단 공개로 재검토 여론에 찬물
실제, 서명자 명단 공개 다음날인 11일 상당수 서명자들이 “16대 국회의 파병안 의결 상황과 이후 정세 변화를 한번 살펴보자는 뜻이었다”고 발을 빼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분위기를 감안한 듯 서명운동에 적극적인 의원들 안에서도 원론적인 파병 재검토 요구는 퇴조하는 듯하다. 대신 △유엔의 평화유지군 파병 결의를 전제로 한 파병(송영길 의원) △주둔지 변경 등 위험요인의 약화를 반영한 민간인 중심의 파병(채수찬 의원) △국회 차원의 정책청문회 개최(이은영 의원) 등 구체적인 대안 제시쪽으로 논의가 옮겨가고 있다.
지난 2월 파병동의안 의결 당시 국군의 예상 주둔지였던 키르쿠크보다 안전한 에르빌 주둔이 유력하고, 나라 안팎의 상황도 변한 만큼 3655명 규모의 파병계획을 고수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에 바탕한 이런 대안이 여권 내부에서 얼마나 공감대를 형성할지는 좀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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