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 지금은 남북경협시대 6회]
‘실리’를 향해 달려가는 북한… 장성급 회담 합의에 이어 경추위에서도 협력 박차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 ▣ 협찬/ 한국토지공사
‘실리’
오늘날 북한 사회를 견인하는 힘이다. 이는 곧 실리를 위해서라면 명분은 접을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이전 북한은 실리보다 이념이나 명분을 먼저 챙겼다.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념만 품에 안고 있으면 그럭저럭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사정은 달라졌다. 실리가 보장된다면 체면이 웬만큼 구겨지더라도 눈 질끈 감고 넘어가겠다는 자세다. 북한은 2003년 10월7일 김정일 당 총비서 추대 6돌 기념 중앙보고회에서 이른바 ‘3실주의’를 천명했다. 보고에 나선 당 비서 최태복은 경제 면에서는 정보산업 시대의 요구에 맞게 ‘실리’를 중시하고, ‘실력’과 ‘실적’으로 당을 받들 것을 촉구했다. 이전의 실리에다 실력과 실적이 보태지면서 북한의 변화는 급물살을 타고 있다. 실리는 경제회생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NLL에 전향적 자세
이런 맥락에서 북한의 전방위 평화 공세는 예정된 수순으로 읽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4월 중국을 방문한 것이나, 5월 고이즈미 일본 총리를 평양으로 초청해 활발한 주변국 정상회담을 전개한 것은 본격적인 실리외교의 신호탄으로 읽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최근 국내 행보도 눈길을 끈다. 용천역 대폭발 참사로 주춤하던 그는 최근 경제 챙기기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5월17일 평안북도 신의주의 낙원기계연합소에 이어 6월1일 평북 구성공작기계공장을, 3일에는 청천강 기계공장을 각각 현지 지도했다. 그의 강조점은 “생산에서 실리를 철저히 보장하자”는 실리주의 실현에 있다. 이에 따라 북한 사회는 어디에서나 ‘실리 보장’이 화두로 넘실거린다.
남북한이 막판인 6월4일 군사분계선(MDL) 일대 대북 비방 방송과 남북관계의 지뢰밭인 서해 북방한계선(NLL) 해상의 무력충돌 방지안에 극적으로 합의한 것도 실리를 챙기자는 계산이 앞섰기 때문이다. 장성급 회담 남쪽 대변인인 문성묵 대령은 “(이번 합의로) 서해 긴장이 해소되고, 꽃게잡이 어민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됐다”며 “선전활동 중지와 수단제거 합의도 첨예하게 맞선 군사분계선에서 쌍방 군사들이 신뢰를 싹틔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남과 북은 6·15 정상회담 4주년인 오는 15일을 기해 모든 형태의 선전활동을 중지하고, 확성기 방송, 선전 전광판 등 선전수단을 3단계로 나눠 올 8·15 광복절까지 완전히 철거하게 된다. 서해상뿐 아니라 155마일 휴전선 비무장지대의 군사적 긴장을 크게 완화할 중요한 조처들인 셈이다.
군사적 신뢰구축이 경협의 열쇠
사실 이제 겨우 두 번째 장성급 회담에서 이런 합의가 이뤄지리라 점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NLL에 대한 남북간의 인식 차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남쪽은 NLL을 실질적인 해상경계선으로 인식하는 반면, 북쪽은 한국전쟁 이후 유엔군사령부가 NLL을 일방적으로 그어놓았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펴왔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이 팽팽한 이견을 쉽게 좁힐 수 없는 난제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북한 군부는 예전처럼 회담장을 박차고 나갈 수 없었다. 실리적 접근이 아닌 탓이다. 시기적으로 6월을 넘기면 꽃게잡이 철을 놓쳐 합의 약발이 떨어질 뿐 아니라, 시급한 식량 지원, 게다가 개성공단, 철도·도로 연결, 금강산 관광특구 등의 현안들에 악영향을 끼치기를 원치 않은 듯하다.

사실 군사분계선 일대의 대북 방송 중단과 선전물 철거는 북한 군부가 더 반길 성과다. 군사분계선은 남북한의 국력차를 실감할 수 있는 곳 가운데 하나다. 북한은 극심한 전력난 등으로 남쪽을 향해 지속적으로 방송할 여력이 없다. 북한 군부의 불만은 남쪽에서 비방 방송을 해서가 아니다. 최근 남쪽 군부대는 6m짜리 대형 전광판을 설치해 한치의 틀림이 없는 정확한 일기예보 등 각종 뉴스를 실어보냈다. 군사분계선 건너편의 북한 군인들은 이 뉴스를 보며 적잖은 심적 동요를 느꼈던 것으로 알려진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기술 격차를 느끼듯 북한 신세대 군인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자 북한 군부는 방송 중단과 각종 구호판의 조속한 철거를 요청해온 것이다. 북한 군부는 또 남쪽의 대규모 식량 지원 요청을 더는 미룰 수 없었던 듯하다. 같은 날 평양에서 열린 제9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추위)에서 북쪽은 남쪽에 예상대로 예년 수준의 식량 지원을 요청했다. 장성급 회담에서 남북한이 극적 타결을 이룬 직후다. 결국 남쪽은 동포애와 상부상조의 원칙에서 쌀 40만t을 차관 방식으로 지원한다고 밝혔다. 남북간 군사적 긴장완화는 무엇보다 개성공단 사업 등 남북경협을 둘러싼 불확실성 제거에 가장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북한 군부는 그간 배후에서 남북경협을 진두지휘해왔다. 북한 군부의 협력 없는 남북경협 활성화는 생각하기 어렵다. 가령 개성공단을 이미 합의한 일정대로 진척시키려면 전력, 통신 등 기반시설 건설이 차질 없이 이뤄져야 한다. 이 과제들 또한 군부 소관인 것으로 알려진다. “개성공단의 북쪽 개발 주체는 군부라고 봐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현대아산의 한 관계자의 진단이다. 장성급 군사회담 북쪽 단장(수석대표)인 안익산 소장(준장에 해당)이 6월3일 전체회의에 앞서 “남측으로 넘어오면서 동해선 철도·도로 연결공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고 싶었다. 돌아갈 때는 연결공사가 어느 정도나 진행됐는지 꼭 보고 싶다”고 말한 대목도 경협에 대한 관심의 정도를 엿보게 한다.
결국 북쪽 내부 사정을 보면 경협의 성패는 북한 군부의 손에 달려 있는 셈이다. 북한은 2002년 9월 남북 군사실무회담에서 “군대가 경협사업을 밀어주자”고 공언한 바 있다. 이제 남북한 군부가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철도·도로 연결 등 이른바 3대 경협사업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왕래 인원과 차량 통과를 원만히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미 훨씬 이전부터 남북 군부간의 군사적 신뢰구축의 싹은 자라온 셈이다.
이처럼 경협과 군사적 신뢰구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3대 경협사업이 남북간 군사적 긴장완화의 끌개 구실을 하는 셈이다. 정부나 현대아산 관계자들에 따르면 군사적 긴장완화의 실마리는 금강산 관광사업이 마련했고, 이 사업을 발판으로 개성공단 개발사업과 경의·동해선 철도·도로 연결사업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가 삐걱거리면 군사 분야에 당장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게 남북경협의 현실이다. 이는 다른 말로 남북경협이 진전될수록 군사적 긴장완화의 속도도 빨라질 수 있음을 뜻한다. 남북경협에 걸린 ‘파이’가 클수록 남북 군사적 신뢰 조처도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일각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북한 군부가 개성공단 진출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시각은 옳지 않는 듯하다.

북한, 경협에 오히려 조급증
6월5일 새벽 평양 양각도호텔에서 끝난 9차 경추위 결과도 북한 군부의 영향력을 실감케 한다. 남쪽 회담 관계자들에 따르면 6월4일 설악산으로부터 장성급 회담이 원만히 합의를 이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지지부진하던 회담 합의문 도출이 급물살을 타게 됐다. 경추위 남쪽 대변인인 박흥렬 통일부 교류협력국장은 6월5일 새벽 종결전체회의를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4일 새벽 장성급 회담이 좋은 합의로 마무리됐다는 연락을 받으면서 경협위도 잘되리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말했다. 개성공단 내에 설치될 경협협의사무소의 역할이나 개성공단 통신망 구축 방식을 둘러싸고 이견이 팽팽했으나 장성급 회담 합의를 기점으로 양쪽은 서로 한 발짝식 물러서며 접점을 모색했다. 북쪽이 요청한 식량 지원에 남쪽이 긍정적 화답을 보냈고, 이에 따라 북쪽도 비로소 양보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전언이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군사 문제에 밀릴 수밖에 없는 경추위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북한은 개성공단을 경제 전반의 회생을 위한 발판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북한은 공단 내에 세울 경협협의사무소를 당국간 경제협력 분야의 협의 채널로 활용하자며, 이 창구를 통해 이뤄지는 민간경협도 당국이 보장해줄 것을 주장했다. 그간 남한 민간기업과 북한 당국 차원에서 수많은 합의가 이뤄졌으나 실제 이행 건수는 손을 꼽을 정도로 적은 데서 북한 군부의 불만은 매우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남쪽 기업들은 합의를 해놓고도 대북사업의 속성상 단기적인 수익이 나지 않자 결국 버티지 못하고 손을 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런 사업 중단은 북한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이에 북한은 민간경협에 대해서도 남한 당국 차원의 지원을 공식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적어도 앞으로는 사업의 중도 포기를 막아보자는 심사에서다. 하지만 남쪽 당국은 경협사무소가 민간의 어려움을 지원하는 기능은 갖되, 당국간 협의 채널이나 보장기구로 쓰자는 것은 자유로운 민간경협의 기본 취지에 맞지 않는다며 한 발짝 물러서 북한 당국의 애를 태웠다.

통신망 구축은 일단 개성까지
개성공단 통신망 구축도 남북간 견해가 첨예하게 엇갈린 장애물이었다. 이번 회담에서 제일 힘들었던 대목이기도 하다. 박흥렬 통일부 교류협력국장은 “개성공단이 연말까지 생산을 시작하려면 전력과 통신을 적기에 공급하는 것이 핵심 문제”라며 “이번 회의에서 일단 9월 말까지 제공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우리는 주로 공단 입주기업을 대상으로 남측과 연결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고, 북측은 서울-평양을 연결하는 망의 일환으로 하는 데 중점을 뒀다. 우리가 일단 개성공단까지 연결하고 나중에 여건을 봐서 평양까지 연결해야 할 때 논의하면 되지 않냐고 설득, 결국 우리측 주장대로 하기로 합의했다”고 덧붙였다. 남쪽은 ‘통신망 연결은 일단 개성공단 입주 한국기업을 대상으로 한 지원일 뿐’이라는 입장인 데 반해, 북한은 ‘개성공단을 뛰어넘어 평양까지 연결되는 기반시설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었던 셈이다. 북한은 이 또한 민간사업자 주도가 아닌 남쪽 당국의 책임 아래 추진하자고 맞섰다. 남쪽 정부의 단계적이고 신중한 접근 방식과, 이와는 사뭇 대조되는 북한의 조급증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이 남북경협을 경제회생의 열쇠로 간주하는 한 남북간 군사적 긴장완화는 지속적으로 이뤄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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