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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김밥, 옆구리 아슬아슬…

등록 2004-06-04 00:00 수정 2020-05-03 04:23

최근 인사 등 현안 처리에서 허점 드러내… 내부 ‘시스템 플레이’ 강화할 필요성 제기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청와대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노무현 대통령은 또 왜 저렇게….”

열린우리당 의원들 사이에서 다시 청와대와 노 대통령을 겨냥한 이야기들이 ‘와글와글’ 나오고 있다. 재신임 국면과 탄핵 정국을 경과하면서 모처럼 일치단결하던 모습도 잠시에 그치는 것일까.

그동안의 경과를 보면 청와대가 나름의 원인을 제공한 측면이 있다.

고 총리와 식사라도 같이 했더라면…

첫 번째 사례를 들어보자. 정찬용 인사수석은 5월24일 기자들과 만나 “개각 시기가 늦춰진다면 꼭 3자리로 못박는 것은 신통치 못하다”고 말했다. 그 무렵은 고건 총리의 각료 제청권 행사 고사로 개각이 한달 뒤로 늦춰질 듯하던 시점이었다. 이런 가운데 6월 중·하순 개각의 폭이 넓어질 수도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다음날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세분의 장관에 대해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보도는 사실”이라며 “그러나 개각이 늦춰지면서 개각 폭이 커질 것이라는 일부 보도는 사실과 다르고,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인사수석이 하루 전에 한 이야기와 다음날 대통령의 말이 다른데 왜 그럴까?”라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참모들이 대통령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든지, 아니면 대통령이 참모들의 조력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 아니냐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고건 총리 다루기’의 미숙함이 거론된다.

노 대통령은 조기 개각 방침을 세우고 김우식 비서실장을 통해 고 총리에게 각료 제청권 행사를 요청했다. 이에 고 총리는 ‘새 술은 새 부대에’라며 제청권 행사를 고사하고 사직했다. 피차간에 헌법정신과 절차를 준수한 것으로 나무랄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은 5월23일 기자간담회에서 두 차례 고 총리를 찾아간 사실을 공개하면서 “내일 한 차례 더 찾아가 제청권 행사를 요청할 생각”이라고 밝힘으로써 화근을 제공했다. 이에 고 총리쪽 관계자들은 “말을 듣지 않으니까 아예 공개적으로 압박하고 밀어붙이는 것이냐”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여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합리주의가 지배하는 서구 문화와 달리 한국 풍토에선 논쟁을 하다가도 ‘당신 몇살 먹었냐’ ‘왜 반말하냐’라는 정서적 문제로 논제가 옮겨가는 경우가 왕왕 있지 않느냐”라며 청와대의 대처방식에 아쉬움을 표시했다. 열린우리당의 한 중진 의원도 “노 대통령이 조기 개각 뜻을 세웠다면 곧바로 고 총리를 불러 식사라도 함께 하면서 뜻을 알리며 의논하는 모양을 갖췄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텐데…”라며 “노 대통령이 스킨십과 프로토콜 따위가 약한 편”이라고 말했다.

세 번째로 청와대가 ‘김혁규 카드’를 관철하는 과정에서도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엿보이고 있다.

노 대통령은 5월29일 열린우리당 당선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을 함께 하면서 “총리 지명은 재·보선을 치르고 난 뒤 당 지도부와 상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방통행식 당-청 관계는 곤란하다는 당쪽의 반발에 응답함으로써, 그런 대로 난관을 수습한 것이다.

그러나 5월20일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신·구지도부 만찬 때의 분위기는 달랐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김혁규 총리’의 당위성을 한참 역설했다. 그리고 자리를 파할 때 발표 문구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노 대통령은 ‘총리 문제도 넣자’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날은 다른 참석자들이 “그 문제는 빼자”고 만류함으로써 ‘김혁규 총리후보’가 공식화되는 것은 유보됐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볼 때 그날 총리후보가 공식화됐더라면 열린우리당 소장파들의 반발은 걷잡기 어려울 정도로 커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김우식 실장 이후 시스템 실종

청와대의 현안 처리에서 ‘김밥 옆구리가 터질 듯 말 듯’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여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렇게 진단했다. “문희상 비서실장 때만 해도 수석·보좌관회의 외에 문 실장 주재로 정무·민정·홍보수석이 거의 매일 20~30분씩 티타임을 하면서 현안을 긴밀하게 점검했는데, 김우식 실장이 들어온 뒤로 그 시스템이 없어졌다. 김 실장이 대학총장 출신이어서 정무나 행정 경험이 없는 터에 필터링 시스템이 더욱 약화된 것이다. 몇몇 수석과 핵심 비서관급이 함께 참여하는 ‘현안 점검회의’도 종전에 10명 정도가 하던 것이 지금은 20명 정도로, 즉 회의라기보다는 ‘집회’ 수준으로 확대되면서 논의의 치밀성이 떨어졌다.”

청와대도 최근 들어 특정인의 개인적 판단을 줄이고 시스템 플레이를 강화할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당-청간 조율 문제만 해도 조만간 공식·비공식 채널을 새로 정비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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