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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는 정말 위기인가

등록 2004-05-21 00:00 수정 2020-05-03 04:23

주가 급락이라는 그림자를 빼면, 실물경제에서 위기를 이야기하기란 쑥스러운 국면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경제위기론이 퍼지고 있다. 보수언론이 ‘이런 판국에 무슨 개혁이냐’며 위기론 확산을 꾀하고 있지만, 그런 주장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 회사원은 “국제통화기금(IMF) 때도 괜찮다 괜찮다 하다가 그렇게 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낙관론이 미심쩍다는 것이다. 체감경기가 갈수록 나빠지는 사람들에게 최근의 경제 흐름은 심상치 않게 느껴진다. 기름값 상승을 핑계로 모든 물가가 뛰고 있다. 내수는 여전히 꽁꽁 얼어붙었고, 저소득층의 소득은 오히려 줄어든다. 경제가 어려울 때는 사회적 약자가 가장 큰 고통을 받는다. 그들에게 경제는 지금 ‘위기’다.

보수언론의 위기론, 주가 급락이 근거?

경제위기론은 최근 주가 급락을 핵심 증거로 삼는다. 주가의 하락 속도는 단지 주식투자자들만 놀라게 한 것이 아니다. 종합주가지수는 지난 4월23일 936으로 연중 최고치로 치솟은 뒤, 불과 보름 만인 5월14일에는 168이 빠진 768까지 떨어졌다. 하락률은 무려 18%(그래프1 참조)에 이른다. 주가가 기업수익에 대한 기대치의 반영이고 기업수익은 경기 동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주가 급락은 우리 경제에 대한 기대가 급격히 나빠진 것으로 일단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지나치게 낙관적일 때도 있고, 지나치게 비관적일 때도 있다. 특히 주식시장은 국제적인 돈의 흐름에 의해 실물경제와는 매우 동떨어진 시세를 연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런 의미에서 주가 급락은 위기의 징조로 볼 수는 있어도, 그 자체를 위기의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 주가 급락을 위기의 증거로 삼는 사람들은 최근 주가 하락세가 시작되기 전의 주가흐름을 애써 잊고 있다. 종합주가지수는 지난해 3월17일 515로 연중 최저치를 기록한 이후, 14개월 동안 쉬지 않고 올랐다. “18%의 주가 폭락이 ‘위기’라면 1년여에 걸쳐 80%가 넘는 상승률을 보인 것은 뭐라 불러야 하는가?” 한 증권사 분석가의 말이다. 실제 515에서 936까지의 주가상승률은 무려 81.7%나 된다.

언제나 그렇듯이 주식시장에는 비관론과 낙관론이 지금 팽팽히 맞서고 있다. 네덜란드계 증권사인 ABN암로는 지난 14일 “한국 증시가 1년 안에 600선까지 추락할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ABN암로는 그 이유로 중국의 경제성장률 둔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경기선행지수의 정점 도달, 내수경기의 부진을 들었다. ABN암로는 “한국 증시는 과거 경제협력개발기구 경기선행지수가 고점에서 저점까지 떨어질 때 종합주가지수가 50%씩 빠졌다”며 “주가가 600 이하로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했다. ABN암로의 이런 분석은 국내외 증권사의 분석 가운데 가장 비관적이다.

그러나 최근 주식시장의 흐름을 보면, ABN암로의 분석이 놓치고 있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증권시장 관계자들은 최근 주가를 떨어뜨린 악재를 크게 3가지로 본다. 중국 쇼크, 미국의 금리인상설, 기름값 상승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요인이 주가를 급락시킨 가장 큰 이유였을까? 또 앞으로 영향을 줄 것인가?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 증시의 종합주가지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삼성전자의 주가 흐름이다. 시가총액 1위인 삼성전자는 중국 경제나 국제유가의 변동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 종목이다. 그런데도 삼성전자는 4월26일 63만8천원에서 5월14일 49만1500원으로 그사이 22.9%나 하락했다. 같은 기간 종합주가지수 하락률 18%보다 훨씬 높다.

한화증권 이종우 리서치센터장은 최근의 주가 급락은 장기간에 걸친 상승에 뒤이은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 주가는 이번 하락기를 맞기까지 14개월에 걸쳐 별다른 조정 없이 쉼 없이 상승했다(그래프2 참조). 주가 흐름은 일반적으로 상승과정에서 과대 평가된 부분이 제거되는 조정기를 갖는다. 그런데 이번 장세에서는 뒤늦게 본격적인 조정이 시작됐고, 그만큼 하락폭을 키웠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이 센터장은 “그동안 주가가 오르는 데는 외국인의 힘이 컸다. 그런데 그들이 갑작스레 시장에서 빠져나가면서 이를 떠받쳐주는 세력이 없으니 일종의 진공상태가 되어 주가를 급락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그동안 1%대에 머물던 미국의 금리가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과 이로 인해 달러화 가치가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한국 시장에서 주식을 팔아 달러 현금을 챙기는 외국인들의 움직임을 가속화했다”고 말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최근 아시아 시장 대부분에서 주가가 급락한 가장 큰 요인은 미국의 조기금리 인상에 대한 우려라는 것이다.

중국의 과열억제책, 악영향 적어

한국 경제가 위기인지 아닌지를 따지기 전에, 한국 경제가 지난해 이후 걸어온 길과 지금 서 있는 자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종합적인 경기상황을 지표로 보여주는 경기동행지수 순환변동치는 지난해 5월 이후 상승세가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 3~6개월 뒤의 경기상황을 예측하게 해주는 경기선행지수 전년동월비(그래프3 참조)도 지난해 5월부터 상승세가 이어지고 있다. 지표로 본 한국 경제는 투자와 내수 부진에도 불구하고 회복을 향해 잰걸음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경제의 회복세는 그동안 중국의 호황, 그리고 최근 미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의 완만한 회복세에 힘입은 바 크다. 한국은 중국의 호황으로 수출을 통해 성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중국의 성장률이 낮아지는 것은 한국 경제에는 매우 부정적인 요인이다. 지난 7일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유럽 순방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과열을 억제하기 위해 강력한 조처를 하겠다”고 밝히자, 한국과 대만을 중심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주가가 급락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중국의 과열억제책이 한국 경제를 위기로까지 몰아넣으리라는 것은 아직까지는 기우에 불과하다. 단기적으로 ‘중국 쇼크’는 주가를 크게 끌어내렸지만, 최근 주가 하락의 핵심 원인은 아니다. 은 지난 13일치 중국발 보도를 통해 “최근의 산업생산 증가나 무역적자 확대, 금융긴축 등의 지표들을 감안할 때 중국 경제는 점진적으로 정부의 과열진정 정책에 반응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당분간은 중국 경제가 계속 높은 성장률을 유지할 것임을 뜻한다. 대부분의 분석가들도 중국 경제가 심각한 상황을 맞지 않을 것이며, 중국의 긴축으로 인한 악영향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골드만삭스의 후(Hu) 이사는 지난 12일 특별기고에서 “중국의 2003년 9.1%, 2004년 1분기 9.7%의 성장률은 중국 경제의 잠재력에 비해 과도한 수준은 아닐 것”이라며 “중국 경제성장의 과열 양상은 통제 가능한 문제이고, 중국 경제의 경착륙 우려는 과장된 것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OECD도 지난 11일 ‘세계경제전망’ 보고서에서 “중국 경제는 과열 위험에 직면했으나 최근 중국 정부의 적절한 조처로 성장이 둔화되는 등 연착륙이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 금리인상, 길게보면 오히려 호재

정작 심각한 것은 국제유가의 상승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미국의 이라크 점령으로 국제 기름값은 안정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됐다. 세계 2위의 석유매장국인 이라크에서 석유를 생산하면, 석유 공급이 대폭 늘어날 것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미국 점령군은 이라크에서 강력한 저항에 부닥쳤으며, 석유 공급 확대는 요원한 일이 돼가고 있다. 세계 경제의 회복과 함께 석유 수요도 늘었다. 이로 인해 급등하기 시작한 석유값은 마침내 지난 14일 뉴욕거래시장에서 서부텍사스 중질유 6월분 인도가격이 배럴당 41.15달러로 오르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유가 급등을 진정시키기 위해 석유수출국기구(OPEC) 전체 석유생산 쿼터를 하루 150만 배럴 늘려 2500만 배럴로 늘릴 것을 제안했다. OPEC 푸르노모 의장은 즉각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회원국들은 증산이 석유가격을 떨어뜨리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석유가격의 급등은 세계 경제의 회복을 지연할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다시 석유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특히 수출지향형 경제구조를 갖고 있는 한국 경제에 큰 악영향을 주게 된다. 문제는 석유가격이 당분간 안정세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과거 석유파동기에 세계 경제는 갑작스러운 원자재 가격 상승의 충격으로 물가상승과 경기침체가 동반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어야 했다. 한국 경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석유값이 한국 경제에 위협요인이라면, 이는 독자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처방이 거의 없다.

미국의 금리인상은 주식시장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준 요인이다. 외국인들은 지난해 이후 한국 시장에서 주식을 쉼 없이 사들였다. 그러다가 최근 집중적으로 매도했다. 미국의 조기금리 인상설이 그동안 풍부하던 유동성을 위축시켰다. 그러나 금리인상은 단기적으로 자금 흐름을 흔들어놓을 수는 있어도 장기적인 악재는 아니다. 금리인상은 미국 경제가 그만큼 빨리 회복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길게 보면 오히려 호재다. 금리인상이 악재가 되려면 단기간에 큰폭으로 인상돼야 하지만, 경기회복세를 저해할 정도로 미국이 금리를 인상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사람은 없다.

진짜 위기는 경제가 아니라 민생

심지어 미국이 올해 안으로는 금리를 올리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워싱턴의 싱크탱크인 국제경제연구소(IIE) 프레드 버그스텐 소장은 지난 12일 “급속한 생산성 증가 덕분에 심각한 인플레가 없는 한 올해 미국은 5% 성장이 가능할 것”이라며 “인플레 압력이 가벼운 수준인 만큼 올해 중 (미국이) 금리인상 카드를 꺼낼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국제유가의 고공행진이 계속된다면 미국의 금리인상 시기는 늦춰질 가능성도 있다.

한국 경제는 지금 미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의 회복이란 호재와 국제유가 상승이라는 악재, 그리고 중국의 긴축이란 불확실성에 둘러싸여 있다. 주가는 경제의 그림자다. 최근 주가 급락이라는 그림자를 빼면, 실물경제라는 본체에서 위기를 이야기하기란 쑥스러운 국면이다. 진짜 위기를 겪는 것은 경제 전반이 아니라 갈수록 팍팍해지는 민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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