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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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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쌀과의 고독한 승부

등록 2004-05-13 00:00 수정 2020-05-03 04:23

9 대 1로 혼자 싸우는 쌀개방 재협상 본격화… ‘관세화 유예 연장 사수’ 밝힌 정부 협상 능력 시험대에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지난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서 우리나라는 ‘예외 없는 관세화’ 원칙에 대한 특별대우를 적용받아 쌀 개방을 10년간 유예받았다. 대신 관세화 유예 대가로 최소시장접근(MMA·저율관세에 의한 의무수입물량) 방식으로 국내 쌀 소비량의 1%(1995년)∼4%(2004년·20만5천t)를 의무적으로 수입하고 있다.

9개국 공동합의 못하면 자동 개방

그 뒤 10년, 우리나라 쌀시장 개방 재협상이 본격화됐다. ‘관세화 유예’를 더 연장할 것인가, 아니면 고율의 관세를 물리는 조건으로 쌀 시장 빗장을 푸는 ‘관세화 개방’으로 돌아설 것인가? 이번 재협상 참가국은 미국·중국·오스트레일리아·타이·캐나다·인도 등 9개국으로, 우리 정부는 지난 5월6일 워싱턴에서 미국과 처음으로 만나 양자협상을 개시했다. 정부는 주요 관심국(미국·중국·타이·오스트레일리아)과 먼저 개별 협상을 진행하는 쪽으로 일정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5월 중순까지 4개국을 한 바퀴 돌면서 상대국들의 의중을 타진해 대충 감을 잡은 뒤 이에 대응한 협상전략을 짠다는 것이다. 이번 쌀 재협상은 상대국들과의 양자협상 결과를 종합한 뒤 이를 기초로 9개국이 모두 만족하는 ‘공동합의’를 도출해내야 끝난다. 만약 올해 안에 합의안이 도출되지 못하면 2005년 이후 자동으로 관세화로 가게 된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원칙은 이미 서 있다. 이번 협상은 어디까지나 ‘관세화 유예를 연장하기 위한 협상’이며, 유예를 연장받는 대가로 상대국이 ‘과도한’ 요구 조건을 내걸 경우 최대한 ‘실리’를 확보하는 쪽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세계무역기구 농업협정 부속서는 우리나라가 관세화 유예를 연장할 경우 관세화 원칙을 일탈한 데 따른 보상으로 협상 참가국들이 수락할 수 있는 수준의 추가 양보(MMA물량 확대)를 해야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최대한 실리를 확보한다”는 정부 입장은, 비록 농민 반발을 의식해 ‘관세화’ 얘기를 꺼낼 수는 없지만 관세화 개방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음을 뜻한다. 덮어놓고 관세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국들이 지나치게 높은 MMA쿼터 확대를 요구할 경우 관세화 카드도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쌀 관세화를 유예받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필리핀 두 나라뿐이다. 일본과 대만은 1999년과 2003년 각각 관세화로 전환했다.

미 · 중, 주판알 튕기기에 열심

한국 쌀시장에 대한 최대 관심국인 미국과 중국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부가 미국과 가장 먼저 협상을 시작한 건 전략적 판단이 깔려 있다. 상대국 중 최고수라고 할 수 있는 미국과의 협상에서 패키지가 만들어지면 이것을 근거로 다른 나라와 절충협상을 벌인다는 것이다. 지난 6일 첫 협상에서 미국쪽은 “미국쌀의 실질적이고 안정적인 한국시장 접근이 이뤄지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처럼 미국은 MMA에 의한 저율관세(현행 5%) 의무수입물량(TRQ)을 늘리는 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미국쌀은 2003년 말 현재 우리나라 의무수입물량의 27∼28%(5만5천t)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이 관세화 유예 연장을 원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쌀시장을 노리고 있는 또 다른 경쟁국인 중국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시장에서 교역되는 쌀의 대부분(75%)은 쌀알이 길쭉한 장립종(인디카)이다. 반면 한국인들이 주로 먹는, 쌀알이 둥글고 단단한 중·단립종(자포니카)은 세계 쌀 생산량의 약 10%를 차지하며 중국 동북3성·미국 캘리포니아·오스트레일리아 등이 주요 생산지다. 그런데 캘리포니아 쌀 수입 가격은 지난해 t당 최고 539달러로 중국쌀(469달러)보다 훨씬 비싸다. 한국 쌀시장이 관세화로 개방될 경우 승부는 품질보다 가격에서 갈릴 가능성이 큰데, 미국쌀이 가격경쟁력에서 중국에 밀리기 때문에 실익이 적은 관세화 대신 MMA물량 확대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MMA물량은 이면계약을 통해 국가별 물량이 어느 정도 할당돼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MMA쿼터 확대 외에도 “한국 소비자들에게 수입쌀 일반판매를 허용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현재 우리 정부는 MMA로 들어온 수입쌀에 대한 구매·유통·소비를 완전히 통제하면서 쌀과자 등 가공용으로만 수입쌀 용도를 제한하고 있다. 수입쌀을 시중에 방출해 소비자들이 미국쌀을 직접 맛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한국 쌀시장을 타진해보겠다는 의도다. 미국은 또 관세화 유예 연장을 받아줄 테니 대신 MMA물량 중 일정부분에 대해 민간자율수입(SBS·민간업자가 관세를 내고 외국 쌀을 수입하는 것)을 허용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만약 의무수입물량도 늘어나는데다 민간업자가 직접 참여해 수입 쌀을 유통시키고 소비자 판매까지 허용된다면, 비록 MMA방식으로 쌀 수입이 제한된다 해도 국내 쌀값은 큰 폭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수입쌀 시장에서 일정한 가격이 형성될 것이고 시장논리에 따라 국내 쌀값이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것이다. 대만의 경우 2002년에 국내 쌀 소비량의 8%(14만t)가 MMA로 들어와 시장에 풀린 뒤 국내 쌀값이 폭락하자 두 손 들고 2003년부터 관세화 개방으로 돌아서버렸다. 우리나라의 MMA 수입쌀 재고 물량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지난해 말 250만섬(36만t)을 넘어선 상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서진교 박사는 “국내 가공용 수입쌀 소비량은 아무리 늘려도 11만t 이상 늘어날 수 없다”며 “재고부담이 갈수록 커져 도저히 버텨낼 수 없는 상황까지 와 있다”고 말했다. 수입쌀 일반판매를 더 이상 금지시킬 수 없는 처지라는 얘기다.

반면, 중국은 ‘관세화’ 방식이 한국에 쌀을 더 많이 팔아먹는 데 매력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중국쌀이 가격도 싸고 품질도 개선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95년 7.9%이던 일본 쌀시장에 대한 중국쌀 점유율은 일본이 관세화로 돌아선 뒤인 2001년 17.8%로 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탈농 현상으로 쌀 재배면적이 감소하고 자포니카 쌀에 대한 중국내 수요도 증가하고 있다. 그만큼 한국 쌀시장이 관세화될 경우 누릴 수 있는 이점이 줄어들고 있는데, 이에 따라 중국도 관세화를 요구할 것이냐 MMA쿼터 확대냐를 놓고 복잡한 주판알을 굴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제 MMA쿼터 확대는 제쳐놓고 ‘관세화 개방’쪽만 따져보자. 한국 쌀시장 관세화를 둘러싸고 우리 정부와 중국, 미국은 모두 도하개발어젠다(DDA) 농업협상에 발이 묶여 있다. DDA에서 쌀의 관세 감축 폭과 방식, 의무수입물량 확대 등 세부 원칙이 결정되는데 DDA협상이 지연되면서 아무런 객관적 기준도 없는 상태에서 참가국들이 한국 쌀시장 재협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관세가 얼마나 낮아질지 불확실한 상태이고, 따라서 관세화에 따른 수입물량 예측 등 이해득실을 따지기 어려운 ‘안개 속 협상’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 쌀값 지키기 어려운 이유

또 다른 불확실성은 관세상당치(TE·수입쌀에 매길 수 있는 양허관세율)다. 쌀의 관세상당치는 기준연도(86∼88년)의 국내 가격과 국제 가격의 차이를 기초로 설정되는데 우리나라의 관세상당치는 400% 정도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농촌경제연구원 서진교 박사는 “관세상당치는 우리가 상대국에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세계무역기구에 통보하는 것도 아니다”며 “한국의 관세상당치를 모르는 상황에서 미국·중국은 우리나라에 관세화를 몰아쳐 압박했을 때 팔아먹을 수 있는 쌀 물량이 늘어날지 여부를 한창 따져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타이 등 나머지 국가는 우리나라 쌀시장과 직접적인 이해관계는 적고 대신 쌀 이외 다른 분야의 개방압력 행사차원에서 이번 협상에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관세화 유예를 연장해주는 대가로 중국이 MMA쿼터를 30만t, 미국이 20만t을 요구했다고 치자. 양쪽을 합친 50만t이 과도하다고 판단해 우리 정부가 관세화를 전격 선언할 경우, 관세화 이후 실제 국내에 들어오는 수입쌀 규모가 MMA 요구안보다 오히려 더 늘어난 60만t이 될지 아니면 더 적은 30만t에 그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이와 관련해 한국 소비자들의 소득 수준과 쌀에 대한 기호를 따져볼 때 관세화 개방 때 수입쌀이 잠식 가능한 시장규모는 40만t을 넘어설 수 없다는 분석도 있다고 한다. 물론 상대국들의 동의를 거쳐 MMA 물량중 30만t 정도를 대북지원용으로 보낼 수 있다면 관세화 유예를 지속하고 MMA쿼터 확대를 수용하는 게 더 유리할 수 있다. MMA쿼터는 ‘국내’ 쌀 소비량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대북지원으로 쓸 경우 상대국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관세화 개방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역시 관세 수준이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은 관세화로 전환할 경우 관세상당치의 90% 수준에서 관세를 물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10년간 우리나라 쌀 수매값은 30% 정도 인상돼 국제 쌀값과 격차가 더 벌어졌다. 현재 국내 쌀값은 국제 가격의 4.9배 정도 더 비싼 편으로, 국내 쌀이 16만원(80kg)인데 비해 MMA로 들어오는 중국쌀과 미국쌀은 각각 3만2천원과 3만4천원 선에 불과하다. 수입쌀과 가격 차이가 더 커져 개방 충격을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와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관세를 400% 선에서 부과할 경우 국내 쌀값이 10만∼12만원 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관세 수준 외에 △국제 쌀값이 지속적으로 상승할 것인지 △중국·미국의 자포니카 쌀 생산 감소로 수출 여력이 줄어들 것인지 △국내 환율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등도 관세화 개방에 따른 유·불리를 따지는 변수가 된다. 그런 점에서 관세화에 따른 위험부담은 우리 정부도 크고 상대국들도 큰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처럼 관세화 유예 도중에 관세화로 전환하더라도 기존의 MMA쿼터 물량은 우리 정부가 의무적으로 계속 사줘야 한다. MMA쿼터가 족쇄처럼 붙어다니는 것인데, 예컨대 이번 협상에서 관세화 유예를 연장하는 대신 MMA쿼터를 2008년 8%, 2014년 12% 등으로 확대할 경우 나중에 관세화로 돌아서더라도 8%, 12%를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한다. 농림부 관계자는 “우리가 이번에 관세화로 갈 경우 지금의 MMA 4%가 유지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DDA협상에 따라 개도국 지위를 잃게 되면 의무수입물량이 늘어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물론 MMA쿼터를 2014년 12%까지 대폭 높여주는 대신 2008년까지는 5∼6% 정도로 확대 폭을 줄인 뒤 2008년에 가서 갑자기 관세화로 전환해버리는 전략을 구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국들이 눈뜨고 속아줄 가능성은 크지 않다.

유예에 성공해도 ‘MMA’ 지뢰는 남아

한 농업문제 전문가는 “정부 협상팀이 ‘우리는 끝까지 버티면서 개방을 막으려고 노력했는데 결국 협상 시한을 넘겨 관세화로 갈 수밖에 없게 됐다’는 결론을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협상을 끌고 갈 가능성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실리’나 ‘이해득실’을 따지기 이전에 일부러 협상을 결렬시키는 쪽으로 몰아가는 ‘정치적 판단’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관세화 개방이 불가피할 경우 이에 대한 책임을 피해가기 위해서다. 농촌경제연구원 서진교 박사는 “이번 재협상에서 혼자 싸우는 우리의 입지가 어려워질 경우, 전략적으로 협상을 중단하고 다자간협상인 DDA로 넘어가 일본·스위스 등 다른 쌀 수입국들과 함께 똘똘 뭉쳐 쌀 품목만은 건지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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