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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은 주판알 튕겨본 뒤에…

등록 2004-05-06 00:00 수정 2020-05-02 04:23

차기 대선주자 그룹의 이해관계에 따라 오락가락 하는 한나라당 개헌 논의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정치권에서 제기되는 개헌론은 단순히 개헌만을 담고 있지 않다. 공식 테이블에서는 어떤 식의 권력구조 개편이 국익을 위해 바람직한지 ‘우아한’ 논의가 주를 이루지만, 물밑에서는 각 정치세력들의 손익을 따지는 주판알 소리가 요란하게 마련이다. 2002년 대선 전후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을 주장했던 민주당 지도부와 대선 이후 이들과 보조를 맞췄던 한나라당·자민련 지도부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추진에 나섰던 데서도 잘 드러난다.

수도권 중진들이 개헌론 확산 막은 이유

이번 4·15 총선을 거치면서 김종필 자민련 총재나 박상천·정균환 민주당 중진 의원, 한나라당의 영남권 중진 의원 등 내각제를 선호하거나 이의 변형된 형태인 분권형 대통령제를 주장했던 정치세력들은 대거 몰락했다. 따라서 개헌 논의의 방향은 사실상 정해져 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현재의 5년 단임제를 유지할 것이냐, 아니면 총선과 대선 일정을 맞추고 연속성을 보장하는 4년 중임제 형태로 바꿀 것이냐 하는 정도다. 노무현 대통령은 물론 여야에서 대선 후보로 손꼽히는 ‘큰손’들이 4년 중임제 개헌론자이고, 17대 국회의원 당선자의 상당수가 이런 방향에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열린우리당 일각에서 제기된 4년 중임제 개헌에 적극 화답하며 공론화를 시사했지만, 정작 4월29·30일 열린 당선자 연찬회에서 흐지부지된 과정을 잘 살펴보면 권력게임 양상이 드러난다.

박 대표는 “4년 중임제로 바꿔야 한다는 게 소신”이라며 “연찬회 의제에는 제한이 없다”고 밝혔지만, 연찬회에서는 “민생과 경제에 집중해야 할 때에 웬 개헌타령이냐”거나 “새로운 정체성 확립이 더 시급하다”는 명분에 밀려 정식 의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연찬회 논의 과정에서 개헌론과 일정한 함수관계를 갖고 표출된 쟁점은 지도체제 문제, 더 깊숙이 들어가면 박 대표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이재오·김문수·홍준표·안상수 의원 등 수도권의 3선급 의원들은 일제히 집단지도체제 도입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개헌론 확산 차단에도 주력했다. 이들은 당내에서 이명박 서울시장, 손학규 경기지사 등 잠재적 대선주자들과 가까운 사이로 꼽힌다.

박 대표 ‘원톱’ 시스템에서 변화를 꾀하려는 집단지도체제 도입 주장은 “누구 덕에 이 정도라도 살아났는데 의리가 없다”거나 “원내정당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반대에 부닥쳤지만, 각각 “공격과 방어 대상을 분산시켜야 박 대표를 보호할 수 있다”, “원내정당으로 가는 과도기 상황에서 야당은 집단지도체제가 불가피하다”는 대항논리로 맞섰다.

영남 중진은 정치권 세대교체 우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총선 전후로 박 대표의 구심력이 한껏 높아진데다 개헌 논의까지 주도할 경우 과거 이회창 총재의 위상처럼 굳혀질 수 있다”며 “4년 중임제 개헌 이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으면서도 이에 관한 논의를 누르려는 것은 손발이 묶여 있는 이 시장과 손 지사를 위해 개헌 논의 시점을 늦추려는 시도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개헌 논의에 소극적인 또다른 축은 박희태 전 대표와 이강두 정책위 의장 등 영남 중진 의원들이다. 4년 중임제의 속성상 유권자들은 8년 집권이 가능한 젊은 리더십을 선호하기 때문에, 2002년 대선과 4·15 총선을 거치면서 시작된 정치권의 세대교체에 가속도가 붙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한나라당 내에서 개헌론은 박근혜 대표와 이명박 시장, 손학규 지사 등 대선후보 그룹간의 긴장관계 속에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과정을 반복할 것으로 보인다. 개헌론이라는 소재로 직접 부상하거나 아니면 이번 연찬회의 경우처럼 다른 쟁점 안에 녹아들어서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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