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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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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는 유령인가

등록 2004-05-06 00:00 수정 2020-05-02 04:23

각 정당은 잇달아 당선자 연수를 갖고 당 정체성 찾기에 고심이다. 열린우리당은 ‘실용정당론’을, 한나라당은 ‘따뜻한 대북정책’을 표방하고 있는데….



[정당 정체성 찾기 | 열린우리당]

노무현-정동영 말은 똑같지만 알맹이는 조금 달라… 언론개혁 · 보안법 등 과제별 토론 통해 가려질 문제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열린우리당이 당 정체성을 놓고 일대 논쟁 국면에 들어가 있다. 총선 민의에 대한 해석이 엇갈리는 가운데 진보, 보수, 중도보수, 중도개혁 등의 복잡한 용어들이 뒤얽혀 쏟아져나오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논란에 휩싸인 데는 나름의 배경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첫째로 열린우리당은 지난해 가을 민주당에서 분당할 당시 “신당의 정책노선은 민주당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적어도 정책노선에서는 ‘민주당이 모태’임을 자임한 것이다. 그러나 총선을 통해 열린우리당이 완승을 거두고 민주당이 완패함에 따라 민주당 모태론은 효용을 잃게 됐다.

‘실용정당론’의 실체는 무엇인가

두 번째로는 “열린우리당이 민주당 출신자들로만 구성된 게 아니다”(유시민 의원)라는 측면도 작용했다. 즉, 국민경선 방식 등을 통해 새로운 인물이, 그것도 매우 다기다양한 출신과 성향의 인물들이 각자 ‘제 발로’ 참여함으로써 ‘잡탕화’가 훨씬 심해진 것이다. 과거 제왕적 총재 시절에는 당 지도부의 ‘낙점’으로 새 인물을 끌어들인 탓에 오히려 충원의 동질성은 유지된 편이었다.

이런 가운데 일단 관심의 초점은 정동영 의장이 제기한 ‘실용정당론’의 실체가 무엇인지, 다른 주장들과는 어떤 점이 같고 다른지 따위에 쏠리고 있다. 당을 이끄는 의장으로서 나름의 화두를 제기한데다, 당내 논쟁도 이를 둘러싼 찬반 토론 형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정 의장이 4월27일 당선자 연수회 이래로 주장하고 있는 실용정당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우리당은 중도·진보·보수를 모두 아우르는 폭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이 시대는 이념정당이 아니라 실용정당, 민주정당을 원하고 있다… 정당의 정체성은 이념으로 결정할 게 아니라 의사결정 구조 속에서 결정돼야 한다… 결코 이념의 울타리에 갇혀서는 안 되며, 이념과 경직성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의 주장은 당의 방향을 지도부가 미리 정해 ‘내리먹이기’보다는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를 통해 그때그때 상향식으로 토론해 정리하자는 아이디어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민주화 세대가 확보한 의회 권력을 가지고 국민 참여와 권한을 확대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여권 일각에선 참여정부가 지향하는 탈권위주의, 그리고 참여정치의 확대 원리와 맥을 함께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5일 대전을 방문한 자리에서 “진보도 보수도 아닌 합리적 실용주의로 간다”며 ‘노무현식 제3의 길’을 주창했으며, 올해 4월11일 북악산 ‘산상 간담회’에서는 “좌우 이념 대결의 시대에서 거버넌스(governance) 경쟁의 시대로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정 의장과 노 대통령이 ‘실용주의론’에서 코드를 맞추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셈이다.

노 대통령의 한 참모는 “‘거버넌스 경쟁의 시대로…’에는 관료들이 독점해온 정책적 의사결정 구조를, 이해당사자들을 모두 참여시켜 공동으로 결정하고 결정에 책임지도록 하는 구조로 바꾸자는 생각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이를테면 노 대통령은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에 관련 당사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타운 미팅’ 방식이 갈등 해결의 좋은 방식이라는 믿음을 굳히게 되었으며, 이런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정 의장과 노 대통령의 아이디어는 비슷한 면이 있다고 이 참모는 말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다른 참모는 “이념이 없는 실용주의가 어떻게 가능하냐”며 “노 대통령과 정 의장의 생각을 같은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를테면 외교나 사회갈등 해결을 위한 행정조직 운영 원리에 제한한다면 몰라도 그 밖의 국정철학 전반에 ‘이념 없는 실용주의’를 적용하는 것은 노 대통령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언론개혁이나 국가보안법 개·폐 등의 정책과제로 들어가면 정 의장과 노 대통령의 코드는 상당 부분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 의장은 이 과제들을 “소리가 나는 것”이라며 뒤로 미루자는 입장을 펴고 있으며, 그러다보니 보수세력의 눈치를 보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받고 있다.

정동영-김근태 ‘파병’온도차 감지

반면 노 대통령은 정치권에서 ‘언론개혁의 원조’로 유명하며, 송두율 교수 사건이 났을 때도 ‘개방적 대처를 기대한다’는 입장을 공개 표명했다. 즉, 정치 지도자의 가치 지향과 직결된 이 현안들을 두고 정 의장이 ‘민감한 문제’로 보는 반면, 노 대통령은 ‘민감할 게 뭐냐’는 분위기가 강한 셈이다.

다음으로는 정 의장과 김근태 원내대표의 생각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정 의장이 당내 관료·전문가 그룹에 기반을 둔 반면, 김 대표는 재야 개혁파의 리더로 권력게임의 대척점에 선 듯한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대표도 언론개혁과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와 관련해선 이렇다 할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그의 측근들은 “둘 다 필요한 일이되, 좀더 시간을 갖고 여건 형성을 기다리면서 추진하자는 게 김 대표의 생각”이라고 설명한다. 정 의장의 브레인으로 활동하는 조기숙 교수(이화여대)가 “정 의장도 개혁을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견줘보면, 적어도 이 쟁점들만 놓고 보면 누가 더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셈이다.

다만 이라크 추가파병 문제로 들어가면 두 사람 사이에 온도차가 감지된다. 김 대표가 국제정세의 변화와 명분 등을 거론하면서 추가파병 재론 필요성을 제기하는 반면, 정 의장은 ‘기존 결정 재론은 곤란하다’는 입장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 쟁점을 놓고 볼 때 김 대표가 자주외교 노선에 충실하려 하는 반면, 정 의장은 상대적으로 한-미 동맹 중시론에 가까운 것으로 해석된다.

신기남 상임중앙위원, 또는 유시민 의원을 비롯한 개혁당 출신 소장그룹과 정 의장의 노선을 비교하는 것도 흥미롭다.

신 위원은 당내 개혁강화론의 선두주자로서 언론개혁을 소리 높여 주장하고 있다. 출신과 당내 기반으로 보면 정 의장과 비슷한 전문가 그룹에 속하면서도 나름의 차별적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정 의장이 5월 말~6월 초로 예상되는 개각에서 입각할 경우 신 위원은 전당대회 득표 차순위자로서 당의장직을 승계할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언론개혁이나 국가보안법 문제 등의 정책현안을 둘러싸고 갈라져 있는 당내 정체성 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다만 신 위원은 이라크 추가파병 문제에 관한 한 “대통령이 원직에 복귀한 다음에 검토하도록 하는 게 옳다”며 기존 결정 유지론을 택하고 있다.

정체성 논란을 계기로 독자세력화를 모색하고 나선 개혁국민정당 출신 그룹도 주목된다. 이들은 언론개혁, 국가보안법 개·폐, 이라크 추가파병 문제에 모두 적극적인 견해를 폄으로써 그 중 가장 진보적 성향으로 분류된다.

개혁국민정당 집행위원 출신인 유기홍 당선자는 “현재 제안 단계이지만 개혁당 출신을 주축으로 당내외 인사가 참여하는 ‘참여정치연구회’ 구성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엄밀하게 개혁국민당 출신자만 따진다면 원내로 김원웅 유시민 의원, 유기홍·김태년·강기정·김형주·정청래 당선자 등 7명에 불과하지만 이 밖에 비슷한 생각을 가진 소장파 당선자가 30~40명에 이르는 것으로 분석된다.

‘개혁후퇴’ 우려 속 여론 수렴

어쨌든 4월26일의 당선자 연수회에서 촉발된 열린우리당의 정체성 논쟁은 조만간 새로운 국면에 들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정 의장이 5월1일 “당내 새정치실천위원회에 별도 기구를 둬 사법·언론 등 개혁과제들에 대한 시민사회의 여론을 수렴할 예정”이라며 “개혁과제의 일정과 뼈대는 전문가들이 만들어갈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런 움직임은 정 의장이 애초 ‘소리나는 것은 뒤로 미루자’는 입장을 취하다가 실용주의 노선 설정이 ‘개혁 후퇴’로 비치자 이에 부담을 느낀 탓으로 읽힌다. 새정치실천위원장을 맡고 있는 신기남 위원은 “17대 국회 개원 전에 언론·사법 개혁을 포함한 주요 개혁과제에 대한 접근방식과 입법방향을 논의할 것”이라며 “국민들에게 우리당이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한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의 정체성 논쟁은 정책과제별 토론을 통해 한 걸음 진전될 것으로 전망된다. 정당의 이념 문제는 진보냐 보수냐, 실용주의냐 교조주의냐 따위의 원론적 논의로 가릴 수 없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실용적으로 우향우?


정동영은 토니 블레어 따라가는가… “실용주의는 정체성 될 수 없다” 시각도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이념보다 실용을…”이란 주장의 뿌리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정치노선과 관련해 정 의장의 자문 역할을 담당해온 사람은 최상용 전 주일 대사, 권만학 경희대 교수,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 김재홍 경기대 교수(17대 총선 비례대표 당선자) 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용정당론과 관련해선 특정한 브레인에 의존하기보다는 정 의장 스스로 생각을 정리한 측면이 강하다고 그의 참모들은 설명하고 있다.

한 참모는 “정 의장이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무렵부터 지금 선보이는 바와 같은 논리를 가다듬은 바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정 의장은 2002년 3월9일 제주경선 유세에서 “한 신문이 좌를 0점으로, 우를 10점으로 놓고 평가한 결과 노무현 후보는 1.5점이 나왔다”며 “노 후보는 과격한 이미지와 안정감 부족 때문에 이회창 총재한테 이기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진보와 보수 양쪽 기득권을 모두 거부하는 내가 진정한 개혁후보”라고 주장했다. 당시 거론된 한 신문은 인데, 여기에서 정 의장은 0~10점 척도에서 중간쯤으로 분류됐다.
정 의장의 아이디어가 영국, 독일, 미국 등 서구의 진보정당들이 ‘실용적으로 우선회’한 것을 중시하는 지적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예컨대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제3의 길’을 들고 나오면서 영국 노동당의 국유화 강령 등을 폐지하고 당을 중도쪽으로 이동시켜 2기 연속 노동당 정권을 창출한 예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창당 이념으로 황태연 동국대 교수가 정립한 ‘중도개혁주의’도 비슷한 흐름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서구 진보정당들이 이념과 노선의 뿌리를 확고히 한 가운데, 중간층을 포섭하기 위해 실용주의적 요소를 일부 보완한 것이란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반론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또한 서구 나라들의 경우 진보·보수 정당이 번갈아 집권하는 과정에서 분배와 사회복지의 인프라를 광범위하게 구축한 반면, 우리나라는 ‘사회개혁 지체’가 유달리 심하다는 현실이 무시된 측면도 지적된다.
이런 맥락에서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인 정해구 교수는 최근 기고문에서 “보수도 실용주의적일 수 있으며 진보도 실용주의적일 수 있기 때문에 정당의 정체성으로서 실용주의라는 노선은 있을 수 없다”며 “실용주의는 사안에 임하는 하나의 태도이지 당의 정체성이 될 순 없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또 “각 정당이 지역주의 성격을 가질 때는 지역주의 자체가 정체성이었다”며 “그러나 4·15 총선 결과 국민들은 좀더 근대적인 정당을 원하는 게 나타난 만큼 각 정당은 이제 자신의 분명한 정체성을 정립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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