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시장님의 불도저가 질주한다

등록 2004-04-28 00:00 수정 2020-05-03 04:23

시민사회 무시하고 각종 개발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이명박 시장의 아주 독특한 ‘환경주의’

청계천 토목공사, 뉴타운 개발, 시청 앞 광장 조성 등 서울시가 추진하는 사업들이 사사건건 시민단체와 충돌을 빚고 있다. ‘치적’만을 생각하는 시장의 독선인가.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길윤형 기자/ 한겨레 사회부 charisma@hani.co.kr

지난 3월5일, 한 무더기 두툼한 서류를 손에 든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서울중앙지검을 찾았다.

그들은 이날 이명박 서울시장과 양윤재 청계천복원추진본부장을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청계천에서 잇따라 출토되는 문화재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무리하게 공사를 독촉하다, 옛 모전교 앞(동아일보사 앞)에서 나온 호안석축 48m를 훼손했다는 혐의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임기 안에 끝낸다?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 아래 시작된 서울시의 청계천 복원공사가 시장에 대한 형사고발로 이어진 ‘가슴 아픈’(?) 사태에, 고발하는 시민단체도 당하는 서울시도 당혹스러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발을 주도한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시장을 고발까지 해야 하는가를 두고 시민단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며 “문화재에 대한 고려 없이 청계천을 파괴하는 서울시 행정에 제동을 걸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 혀를 찼다.

그러나 ‘청계천 사태’는 서울시가 최근 불러온 수많은 불협화음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2002년 초여름을 화려하게 수놓은 ‘붉은악마’의 함성을 살려내기 위해 시작된 ‘시청 앞 광장’ 조성도, 강남과 강북의 균형 발전을 위해 시작했다는 ‘뉴타운’도 사업 초반의 뜨거운 열기를 잇지 못하고 곳곳에서 암초에 걸려 있다. 잇따라 터지는 문제에 일을 추진해야 하는 서울시도 반대하는 시민단체도 기진맥진해진 상태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야심차게 기획했던 굵직한 사업들이 시행 2년 만에 줄줄이 암초에 부딪치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1970년대 산업화를 일군 이명박 시장의 독재적 리더십이 시민사회의 성장으로 변한 최근 사회 지형과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는 청계천 사업에서 시민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만든 ‘청계천복원 시민위원회’(시민위)가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보면 분명해진다.

지난 40년 동안 서울에서 이뤄진 도심 막개발과 자연 파괴를 반성하기 위해 시작된 청계천 복원에 대한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는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이를 등에 업고 2002년 7월 취임한 이 시장은 자신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이 될 청계천 사업이 자발적인 시민 참여 속에 이뤄지고 있다는 ‘모양새’를 갖추길 바랐다.

이런 시장의 뜻에 따라 서울시는 2002년 9월 시민단체 활동가, 교수, 언론인, 시 공무원 등 118명을 위촉해 ‘시민위’를 출범했다. 그러나 시민위는 출범 직후부터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다.

서울시 공무원들을 압박한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2006년 6월로 예정된 시장 임기 전에 공사를 끝내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이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상류 백운동천과 삼청동천을 청계천 물길과 잇고, 상류 모전교부터 하류 영미교까지 옛 돌다리를 살려내자는 시민위원들의 입장과 화해할 수 없는 ‘절망적’ 차이였다.

청계천 토목공사 ‘이후’는 더 두렵다

서울시의 한 관계자는 “자신이 시작한 주요 사업을 임기 안에 끝내고 싶지 않은 시장이 어디 있겠냐”며 “시민위원들의 주장을 다 들어주려면 수십년이 걸려도 공사를 끝맺지 못할 것”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김영주 시민위 역사문화분과장은 “지난해 5월부터 역사·문화적인 복원을 위해 청계천 옛 다리 중에 원형이 남아 있는 광통교와 수표교만이라도 원래 모습을 살려 제위치에 복원해주기를 요청했지만 서울시는 이를 끝내 거부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결국 시민위는 지난 2월24일 이미 34%나 사업이 진행된 청계천 실시설계를 거부했고, 3월12일 열린 시민위 기획조정위원회에서도 같은 결정이 내려졌다. 시민의 축복 속에서 시작된 청계천 사업이 반쪽짜리로 전락한 순간이다.

청계천은 지난 3월8일 문화재청이 부랴부랴 나서 공사를 중지시키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현재 청계천 문화재 복원의 핵심인 광통교(광교네거리)는 상류쪽으로 이전 복원, 중구 장충단공원에 있는 수표교(서울시 유형문화재 18호)는 원래 위치(청계2가 부근)로 제 모습을 갖춰 복원하기로 가닥이 잡혔다. 그러나 지루하게 계속된 시민위와 서울시의 다툼으로 청계천 사업은 이미 만신창이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전초전에 불과할지 모른다. 고가를 뜯고 물을 흘려보내는 청계천 토목사업 ‘이후’의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 3월17일 서울시는 1980년대 이후 계속된 ‘도심 공동화’ 현상을 막겠다며 도심에 짓는 주상복합 건물의 높이·용적률 기준 완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 계획이 시행되면 도심 상업지역에 들어서는 주상복합은 용적률 950%(현재 800%), 높이는 135m(현재 90m)로 각각 기준이 완화된다.

즉, 지난 2001년 ‘도심재개발 기본계획’이 정한 건축물 높이제한 기준(90m·20층)이 무너지고, 을지로 롯데호텔(139m·35층) 높이의 ‘거대’ 주상복합이 도심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게 된 셈이다. 서울시는 물론 그동안 유지돼온 도시의 모양을 완전히 뒤바꿀 중요한 결정을 내리면서 그 흔한 공청회나 토론회 한번 열지 않았다.

‘조경광장’으로 변한 시청앞 광장

윤인숙 도시연대 도시정책센터 정책위원은 “주상복합 용적률 완화는 청계천변 주변 개발의 신호탄”이라고 지적한다. 이 계획의 일차 대상지역은 중구 장교동(3700평), 명동(2600평), 회현동(7200평), 종로구 도렴동(2000평)과 장사동·입정동·을지로4가·충무로4가 등을 포괄하는 세운상가 일대로 정해졌지만, 시정개발연구원에서 진행 중인 ‘도심부 발전계획’(발전계획)이 나오면 대상 범위가 확장될 것은 불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청계천변에 고층의 주상복합이 들어설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면, 이곳에 수십년 동안 쌓여온 기존의 ‘사회생태계’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위협이 될 수 있다.

김용창 세종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200만명이 생업을 유지하고 있는 청계천변은 단순한 노후상업·공장지대가 아니라 단단한 네트워크로 결합된 생산시스템”이라고 말한다. “외국의 경우 도심 대규모 상업업무시설 주변은 슬럼가인 데 반해, 우리나라는 특이하게 생산공간으로 자라나 공업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청계천이 복원되고 규제도 풀리면 주변의 개발 압력이 높아져 주상복합 아파트·오피스텔 등 도심 주거시설들이 들어서면서 이 산업 생태계는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는 “이런 공간들이 사라지고 대규모 빌딩 본사나 부동산개발업체들이 들어선다면 눈으로는 깨끗해지지만, 결국엔 특정한 공간을 특정한 사람들이 차지하게 된다. 대안적인 계획기법들을 찾지 않는다면 기존의 개발 방식이 되풀이될 뿐”이라고 강조한다.

홍역을 앓기는 ‘시청 앞 광장’도 다르지 않다. 서울시는 지난해 7월 2002년 월드컵의 함성이 가라앉지 않은 시청 앞에 광장을 만들기로 하고, 지난해 3월 현상공모를 통해 ‘빛의 광장’ 계획안을 뽑았다. 그러나 바닥에 박막액정표시장치(LCD) 2003개를 깔아 첨단 정보광장을 만들겠다는 ‘빛의 광장’ 계획이 설계자나 ‘시청앞광장조성 추진위원회’도 모르게 잔디광장으로 바뀌어버렸다.

한술 더 떠, 서울시는 “광장을 쓰려면 사용일로부터 7~60일 전에 허가를 받고, 행사를 진행하다 잔디를 망치면 물어내야 한다”는 내용의 조례(‘시청광장 관리 및 이용에 관한 조례’)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문화연대와 도시연대 같은 시민단체들은 “이는 광장에 잔디를 깔아 시민들의 자발적 집회나 시위를 막으려는 꼼수”라며 “시청 앞 광장은 이제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숨쉬는 열린공간에서, 죽은 조경광장으로 변했다”고 개탄했다. “4400평에 잔디가 깔린다면 그것은 광장이 아니라 잔디공원일 뿐이다. 광장은 기본적으로 비워진 공간인데 이를 잔디로 채우고 자유로운 모임과 집회를 제한한다면 시각적으로만 확 트인 개방형이지 실제로는 폐쇄형 광장이다.”

서민들 쫓아내는 뉴타운 사업

한 시민단체 활동가는 “차라리 이름도 ‘명박광장’으로 정한다면 깨끗하고 넓은 광장 이미지에 맞지 않겠냐”며 냉소했다. 임시로 잔디를 깔아둔다던 ‘잔디광장’은 이제 ‘녹색광장’으로까지 진화해 대대적으로 홍보되고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서울시 홈페이지(seoul.go.kr)의 자유게시판은 성난 네티즌들의 항의성 글이 잇따라, 시 직원들은 이를 해명하느라 한동안 진땀을 빼야 했다.

지난해 강북 집값 상승의 주범으로 지목받은 뉴타운 사업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도시연대 등에서는 서울 15곳에서 진행 중인 뉴타운 사업은 이대로 가다간 서민들은 다 쫓겨나고 중산층 이상만 사는 새로운 주거지역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한다.

왕십리뉴타운의 사정을 살펴보면, 이런 우려가 기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곳 주민들은 대부분 기계·금속, 화공·비금속 등 도심 밖으로 겨나야 하는 업종에 종사하고 있고, 세입자의 비중도 높다. ‘원주민 재정착률’이 낮아질 수밖에 없는 나쁜 조건이다.

지난해 4월 현재 이곳에 사는 4275가구 가운데 세입자는 3478가구로 전체의 81.5%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예정된 임대주택은 1100여 가구에 불과해 개발이 시작되면 세입자 대부분은 이곳을 떠나야 한다.

서울시는 재정착률 문제가 떠오르자 은평뉴타운 등에 ‘원주민 재정착 단지’를 만든다는 계획을 밝혔지만, 보상과 이주 비용 등으로 갈등을 빚고 있는 주민들의 반응은 냉랭하다. 일부에서는 뉴타운 사업으로 서울에서만 줄잡아 10만명이 다른 곳으로 겨날 것이라는 흉흉한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서울시는 애초에 강·남북 균형발전을 위해 뉴타운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하지만 결국 뉴타운 사업은 잠재된 주민들의 개발 욕망에 불을 질렀다는 지적이 터져나오고 있다. 동대문 전농지구의 총괄설계자문(MA)을 맡고 있는 박철수 서울시립대 교수(건축도시조경학부)는 “주민설명회에서 전면 재개발은 없으며 이곳은 10~20년 동안 서서히 변화해야 한다고 했더니, 주민들이 ‘교수면 다냐’며 대놓고 반발하더라”고 전했다. “서울시가 뉴타운 사업 발표 때 장기적 관점에서 시설을 정비하고 필요한 도시 인프라를 구축한다는 것으로 차분하게 나섰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제 주민들은 뉴타운 사업과 싹쓸이 재개발을 동의어로 여긴다.”

독선적 리더십이 ‘친환경’이냐

이명박 시장은 취임 초부터 모든 시정 활동을 ‘친환경적’으로 이끌고 나가겠다고 다짐하며 앞으로 서울시가 벌이는 모든 정책 앞엔 ‘친환경’이란 접두사를 붙이겠노라고 선언했다. 조명래 단국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이 시장은 스스로를 환경주의자라고 강조하지만, 실제로 그는 기술개량주의자”라고 진단한다. “건설회사의 최고경영자라는 이력 때문이 아니라, 청계천 복원 사업에서 보듯 환경적 가치를 기술공학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반론을 허용치 않는 이명박 시장의 독선적 리더십에 서울시 공무원들의 꽉 막힌 관료주의가 서울을 망치고 있다. 그가 굳이 환경주의자라고 주장한다면 환경관리주의자이거나 환경권위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사회학)도 “시민들의 관심을 모으는 사업을 추진하면서, 시민사회와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하는 이명박 시장의 무능력이 현재 위기의 본질”이라며 “서울시가 시민들과 더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개발 독재’의 기나긴 행렬

70년대 독립문과 지금의 광통교 이전이 보여주는 ‘밀어붙여’ 정신
서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내려 4번 출구로 나가면 흰색 화강암으로 만든 화려한 건축물 하나를 만날 수 있다. 사적 32호 독립문이다. 1896년 가을, 서재필 박사가 주도한 독립협회는 조선왕조가 청국 사신을 맞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프랑스 파리 개선문을 본떠 이 문을 만들었다.


1970년대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교수는 에서 “일제가 이 나라의 독립정신과 관계된 모든 시설을 송두리째 헐고 부수어버렸는데도 이 문만은 끝내 손대지 못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독립문은 원래 있던 자리(독립문네거리)에서 서북쪽으로 70m 밀려나 있다. 1979년 서울시가 도심과 경인고속도로를 잇는 성산대로(너비 30~40m, 길이 2만4천m)를 만들면서 걸림돌이 된 독립문을 해체 이전했기 때문이다.
당시 문화재위원들은 “독립문은 영은문을 헐고 그 위에 지은 것이니, 장소 자체가 역사성을 갖는다”고 제 위치 고수를 주장했다. 개발과 효율이 사회의 가장 큰 가치였던 시대, 이들의 목소리는 곧 묻혔다. 철거공사는 1979년 7월13일 시작돼 1980년 1월에 끝났다.
서울 영풍문고 앞 광교네거리 땅 밑에는 1410년(태종 10년)에 만들어진 광통교가 있다. 1958년 복개공사를 진행하며 무지막지하게 덮어버린 콘크리트를 뜯으니, 조선 태종의 새어머니 신덕왕후 강씨의 묘지석이었던 다리끝받침돌(교대석)과 교각들이 온전히 보전돼 있었다. 늙은 역사학자들은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
이들은 “국중대로인 남대문로에 놓인 광통교 위로 왕의 어가가 지났다”며 “장소 자체가 커다란 역사성을 갖는 만큼 가급적 제 위치를 지키는 게 좋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울시 ‘청계천 문화재 보존 전문가 자문위원회’는 지난 4월5일 “교통 문제 등을 고려해볼 때 광통교를 상류쪽으로 이전 복원하는 게 좋다”는 결정을 내렸다. 광통교를 제자리에 두면 왕복 8차로인 남대문로가 왕복 4차로로 줄면서 교통속도가 시속 17.8km에서 16.2km로 줄어든다는 게 이유였다.
시민단체들은 “25년간 저지른 파렴치한 문화재 파괴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무엇인가”라고 개탄했다. 역사학회·조선시대사학회 등 역사 관련 16개 학회도 12일 성명을 내어 “청계천 공사가 개발 위주로 진행되는 데 대해 불안감을 금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독립문을 훼손한 사람은 박정희 ‘5·16 쿠데타’의 주역 가운데 한명인 구자춘 전 서울시장이다. 구씨가 독립문을 이전하던 1979년, 이명박 시장은 모범 기업인으로 대통령 표창까지 거머쥔 현대건설 최연소 사장이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