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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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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딱지 잔혹극’ 1막 종료

등록 2004-04-15 00:00 수정 2020-05-03 04:23

1심에서 징역 7년 선고받은 송두율 교수… 정황만으로 지도위원 인정, 임무는 저술활동?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송두율 고국방문기 1편’은 예상대로 비극이었다.

37년 만에 고국땅을 밟은 초로의 교수를 주인공으로 한 이 잔혹극은 지난해 9월 ‘개봉’ 이후, 우리 안의 ‘빨간 딱지’를 자극하며 흥행몰이에 나섰다. 한때 주인공을 둘러싼 ‘진실게임’ 공방이 벌어지면서 주인공의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언론 앞머리에 장식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상영기간’이 길어지고 ‘영특한’ 관객들이 내용의 부실함을 눈치채면서 결론을 둘러싼 논쟁도 잦아들었다. 관객들과 ‘제작자’의 눈치를 보며 결론을 고심하던 ‘감독’은 결국 ‘비극’으로 마무리했다. 싫으면 2편을 만들라며 다른 ‘감독’에게 공을 넘긴 셈이다.

국내 학자 ‘이적성’ 더 높다

지난 3월3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4부(부장판사 이대경)는 송두율 교수에게 “반국가단체인 북한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지도적 임무를 수행한 것이 인정된다”며 징역 7년을 선고했다. 변호인단과 검찰이 가장 예민하게 대립했던 ‘정치국 후보위원’ 선임 부분에 대해 검찰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재판부는 “황장엽이 김용순 등에게서 들었다는 전문 진술의 증거 능력이 인정되고,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단독 결정만으로도 정치국 후보위원이 될 수 있다는 점, 대남 간첩이었던 이선실이 정치국 후보위원이었지만 대남활동만 했을 뿐 후보위원으로서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송 교수가 정치국 후보위원이었음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결국 후보위원이라는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송두율이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는 황장엽씨의 진술과 송 교수 자신이 펴낸 에 김일성 장의위원으로 등장한 ‘김철수’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표시된 점, 송 교수가 자신이 ‘김철수’로 불렸다는 것을 인정한 점 등을 종합해 송두율=김철수=후보위원으로 결론지은 것이다. 재판부는 이 ‘심약한’ 학자가 후보위원으로서 수행한 ‘지도적 임무’로 저술활동을 들었다. 송 교수의 저술에서 주체사상에 대한 비판을 찾아보기 어려운 반면,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냉엄한 비판만 해 철학자·사회학자의 객관적 연구물로 볼 수 없다는 설명이다. 재판부는 “이론적 근거가 없었던 이른바 ‘주사파’ 등 친북 세력에게 이론을 제공해 큰 영향을 끼쳤다”며 “맹목적 친북 세력을 양산해 국가안보에 큰 위협이 됐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검찰이 송 교수의 또 다른 ‘지도적 임무’로 제시한 남북통일학술회의 부분에 대해서는 “학술회의에서 북한의 입장만 대변하지는 않고 주도적 위치는 아니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변호인단쪽은 “재판부가 후보위원 부분에 대해 뚜렷한 증거 없이 정황만으로 판단했다”며 즉각 항소할 뜻을 밝혔다. 정략적인 발언을 할 수밖에 없는 황장엽씨의 진술을 결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누가 작성했는지 몰라 증거 능력을 다투는 ‘김경필 파일’을 결정적인 증거로 인정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변호인단은 또 “후보위원으로서 활동을 인정하면서 송 교수 저서의 이적성을 인정했는데, 저서로 치면 송 교수의 저서보다 ‘이적성’이 높은 국내 학자들의 저술이 훨씬 많다”며 “다른 사건에 비춰서도 합당하지 않은 판결”이라고 꼬집었다. 헌법이 보장하는 ‘학문과 사상의 자유’는 국가보안법 사건에서는 항상 그랬듯이 이번 판결에서도 고려할 ‘가치’가 없는 대상이었다. 특히 재판부는 송 교수가 ‘경계인’을 가장해 북한 체제에 편향된 주장을 객관적인 것처럼 위장하면서도 ‘철저한 반성’이 없어 중형에 처해야 한다고 밝혔다. ‘철저한 반성’이라는 표현에 대해 일부에서는 조사 단계에서 논란이 됐던 ‘전향’을 재판부가 노골적으로 강요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문제 다시 전면으로

재판부의 판결 내용과 중형 선고는 국내외의 적극적인 비난여론을 불러일으키며 새로운 싸움을 예고한다. ‘오래됐지만 여전히 현재형’인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에 힘이 실리고 있는 것이다. 법 조항 대부분이 모호하고 불명확해, 사람들 머리 위에 매달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다모클레스의 검’이라는 국가보안법은 송두율 교수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송 교수의 변호인단은 지난 4월7일 국가보안법 3조에 대한 위헌소송을 헌법재판소에 제기했다. ‘반국가단체의 간부, 기타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를 사형 또는 무기 혹은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보안법 3조 1항 2호가 위헌이라는 주장이다.

변호인단쪽은 보안법 3조에 ‘간부’와 ‘반국가단체’ ‘기타 지도적 임무’ 등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지 않아 재판부의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한다. 죄형법정주의는 국가가 형벌권을 과도하게 또는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일을 막아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근대 시민형법의 최고원리다. 송두율 교수의 주요 처벌 근거가 된 보안법 3조는 이러한 원칙에 크게 위배된다는 것이 변호인단의 주장이다. 송호창 변호사는 “이 조항이 재판에 적용되면 자의적인 법 집행이 이뤄져 과도하거나 차별적인 처벌을 낳을 수 있고, 수많은 북한 주민이 법 적용을 받을 수 있다”며 “이는 헌법상의 과잉금지 및 평등의 원칙, 평화통일의 원칙에도 크게 위배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변호인단은 보안법 6조인 ‘잠입·탈출’과 8조 ‘회합·통신’ 조항에 대해서도 죄형법정주의와 이중처벌 금지 등의 헌법에 위배된다며 항소심을 담당할 재판부에 위헌법률 심판제청을 신청할 계획이라 밝혔다.보안법 문제에 천착해온 국내 인권단체들도 다시 ‘투쟁의 칼날’을 벼리고 있다. 너무나 오래되어 싸움 자체가 ‘만성화’돼버린 보안법 문제를 다시 전면에 제기하겠다는 다짐이다. 송 교수 판결 직후, 인권운동사랑방과 천주교인권위원회 등 국내 14개 인권단체들은 공동성명을 내고 “국가보안법의 조문과 판례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서도, 인권적 기준이나 헌법적 원칙에는 눈감는 사법부의 논리비약과 자가당착이 가여울 뿐”이라며 “이번 판결을 계기로 다시금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에 모든 노력을 다해 17대 국회에서 반드시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이들에게 큰 상처 주고 말았다”

기대와 설렘으로 한국땅을 밟았던 송 교수의 부인 정정희씨는 ‘악몽’ 같은 기억을 안은 채 4월12일 한국을 떠났고 아들 송린씨도 18일께 독일로 돌아갈 예정이다. 정정희씨는 “아이들이 정체성을 고민하며 한국에 가고 싶어했지만, 부모와 함께 가겠다며 지금까지 기다려왔다”며 “아이들에게 빚을 갚는 것 같아 설레는 마음으로 고국땅을 밟았지만, 오히려 아이들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 말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린씨도 “국가가 한 인간에게 어떻게 이만큼 잔인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5월 초에 다시 막이 오를 ‘송두율 고국방문기 2편’은 다른 결론을 맺을 수 있을까. 1심 재판부는 송 교수에게 “피고인은 남북 이해와 신뢰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 통일의 장애물이 됐다”고 일갈했다. 적어도 2심의 결론이 ‘남북의 이해와 신뢰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 ‘통일의 장애물’이 되지는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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