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를 위한 과학' 한국적 모델 개발… 지역의 환경 · 보건 · 주거문제 해법 함께 찾아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이젠 과학기술자가 연구실을 벗어나는 것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대부분의 과학기술자는 이 말을 허무맹랑하게 생각하기 쉽다. 연구실을 떠나 어디에서 무엇을 하라는 말인지 선뜻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숙명여대 화학과 교수를 지낸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은 지난 3월24일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2004년 과학기술 앰배서더 연차대회’에서 과학자들에게 ‘외도’를 권했다. 그가 말하는 과학자의 외도는 연구를 소홀히 하라는 게 아니다. 다만 지역사회에서 시민·학생 등을 만나 연구활동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연구실에서보다 훨씬 더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베트남전 당시 ‘화학상점’이 효시
한국과학문화재단이 주관하는 과학기술 홍보대사에는 전·현직 과학기술자 1천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과학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인정받은 홍보대사들은 각급 학교·기관 등을 순회하며 참가자의 눈높이에 맞게 과학기술의 흐름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는 과학기술자들이 시민들과의 만남을 통해 사회적 책임의식을 높이며 사회활동을 봉사가 아닌 임무로 여기도록 한다는 의미도 있다. 과학기술자로서 나름대로 보람을 느낄 만한 활동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과학기술에 대한 일방적 가르침이 이뤄지는 한계를 극복하기는 힘들다. 그것도 단 한번의 강연이 이뤄질 뿐이기에 참여연구에 바탕한 과학기술의 사회적 기능을 다하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과학기술이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인간을 위한 과학기술’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게 ‘과학상점’(science shop)이다. 과학상점은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무자비한 화학전을 벌이는 것에 반대해 지난 1973년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대학 화학과 학생들이 ‘화학상점’을 연 것을 효시로 한다. 상점은 과학을 상거래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동네 구멍가게처럼 누구나 쉽게 드나든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일 뿐이다. 현재 네덜란드에는 지역별로 40여개의 과학상점이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해 서로 정보를 주고받고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모든 대학이 과학상점을 개점하도록 권고해 대학기금을 프로젝트 연구에 사용하도록 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과학상점은 암스테르담대학에 있다. 1977년 공식 인가된 암스테르담대학의 과학상점에서는 15명 안팎의 상근자가 활동한다. 대학에서는 20여년 전부터 전체 연구예산 가운데 15%를 과학상점의 연구활동에 사용하도록 하는 학칙을 마련해 해마다 5만달러 이상을 지원하고 있다. 대학 연구의 초점을 지역사회에 맞추는 과학상점에 대해 정부가 정치적으로 지지하고 대학이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셈이다. 암스테르담 과학상점은 지역주민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전문가들과 함께 해결방안을 찾는 식으로 운영한다. 이렇게 개인과 단체들이 제기한 환경·보건·주거 등에 관한 문제가 한해에 300여건(네덜란드 전체는 2천여건)에 이른다. 이 가운데 20%는 주민과 전문가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연구 프로젝트에 반영된다.
이런 네덜란드의 과학상점 모델은 유럽과 미국 등지로 퍼져나갔다. 프랑스에서는 과학상점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지만, 영국에서는 ‘대안연구센터’ 혹은 ‘기술네트워크’ 등으로 불리며 미국에서는 시민을 위한 과학 운동을 표방한 JSI센터·과학과 기술의 민주화를 목표로 내건 로카 연구소 등이 공동체 연구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이름은 나라의 실정에 따라 다를지라도 시민들이 일상에서 제기되는 과학기술적인 문제나 의문에 대한 해법을 찾도록 한다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이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 기술사회팀 김병윤 연구원은 과학상점 운동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과학기술자들이 일반 시민들과 직접 만나서 의사소통을 한다는 의미가 크다. 대학은 지역 공동체에 기여하는 모델을 만들고, 시민은 연구가 이뤄지는 전 과정에 참여해 살아 있는 과학기술을 접할 수 있다.”
전북대 과학상점이 겪은 혼란
국내에서도 과학기술과 시민 사이에 존재하는 지식의 장벽을 허물려는 움직임이 1990년대 후반부터 시도됐다. 당시 서울대 이공계 학생회와 환경동아리 ‘에코에코’(eco-eco)가 뜻을 모아 ‘과학상점운동 관악학생특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대학의 공공성 확보와 과학기술의 민주화 등을 내걸고 과학상점을 홍보하며 관악구 도림천 살리기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동아리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해 구체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999년 6월 실질적인 과학상점이 전북대에 들어섰다. 다소 생소한 이름으로 대학의 사회적 구실에 대한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전북대 과학상점(sci-shop.chonbuk.ac.kr)이 나름대로 자리를 잡기까지는 적잖은 혼란을 겪었고 아직도 풀어야 할 과제가 수두룩하다.
기본적으로 전북대 과학상점은 시민과 사회단체가 대학이 지닌 지식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든 창구 구실을 꾀했다. 실제로 ‘비료공장 주변 양계장 닭의 폐사 원인’을 밝혀달라는 지역주민들의 의뢰를 대학 내 병리학·환경공학 교수들이 나서서 해결하기도 했다. 하지만 환경보건 등 다양한 지역 문제를 해결할 만한 체계적인 인력 시스템을 갖추기 힘들었다. 대학의 공식기구로 자리잡은 상태에서도 예산상의 어려움을 겪으며 한동안 대학 밖으로 나가지 못해 ‘개점 휴업’ 상태에 놓이기도 했다. 초창기부터 전북대 과학상점을 이끌어온 이강민 교수(생물과학부)는 “아직까지는 과학상점 홍보가 부족해 구체적으로 시민의 참여행동을 이끌지는 못했다. 관련 연구자들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더라도 공식적인 연구활동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과학기술을 통한 대학과 지역의 연계에 대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여전히 한국식 과학상점 모델은 실험 중이다. 제도화된 과학상점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전북대 과학상점만 해도 대학의 지원이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과학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겨우 연명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지역주민들과의 의사소통 역시 원활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호기심 수준의 과학탐구가 이뤄진다면 과학상점 본래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 반드시 과학상점이 대학에 뿌리를 두고 행정상 지원을 받을 필요는 없다. 대학 밖에서 독립적인 연구센터를 운영하면서도 얼마든지 과학상점 구실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어디에 있든지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연구를 안정적으로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과 과학기술자의 자발적 참여 끌어내야
그런 의미에서 대전시 대덕연구단지의 시민참여연구센터는 한국식 모델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공동체의 문제를 풀기 위해 프로젝트 중심으로 활동한다는 게 커다란 장점이다. 과학상점이 지역사회에 뿌리내리는 데 필요한 요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과 과학기술자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시민참여연구센터의 경우 지역 ‘대전의제21’을 비롯한 시민단체와 정부출연연구소 연구원 등이 적극 참여하고 있다. 다만 연구 참여자들의 개인적 헌신을 실질적 연구 활동으로 인정하는 식의 제도적 뒷받침이 이뤄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 과학상점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기구여서는 곤란하다. 과학을 일상의 관심사로 여기며 지역사회의 문제를 공동의 노력으로 해결하려는 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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