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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해서 실태조사 하겠나”

등록 2004-04-08 00:00 수정 2020-05-03 04:23

이라크 최악의 상황 속 ‘점령실태 국제조사단’ 활동 연기… 참가단원 박원순 · 임영신씨 진한 아쉬움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이라크 상황이 갈수록 혼미해지고 있다. 바그다드·아마라·바스라 등 이라크 곳곳에서 4월4일 이슬람교 시아파 지도자인 무크타다 알사드르 추종자들과 연합군 사이의 유혈충돌이 발생했다. 지난 4월2일 시아파 지도자 알사드르가 금요 합동예배에서 “제국주의자들의 점령 1주년을 맞이해 이제는 성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라고 설교했다.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 통치 시절 수니파에 눌려 불이익을 받던 시아파는 지난해 미군의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 축출을 환영했다. 미군은 반미항전을 주도했던 수니파는 제쳐놓더라도 내심 우호세력으로 믿어던 시아파마저 반미 투쟁에 나서자 크게 당황하고 있다. 자칫하다간 미군이 전 이라크인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에 앞서 ‘팔루자 쇼크’가 미국을 강타했다. 지난 3월31일 이라크 팔루자에서 저항세력의 공격을 받고 미국인 4명이 참혹하게 살해됐다. 사고 장소에 몰려든 이라크 시민들은 미국인들의 주검을 끈으로 묶어 길거리에서 끌고 다녔으며 쇠몽둥이로 주검을 내려치고,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팔루자는 미국인들의 무덤”이라고 외쳤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미 우호세력인 시아파마저 등돌리다

팔루자가 이라크 수니파 저항세력의 거점이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라크 사람들의 극단적인 적개심은 충격적이다. 지난 1년 동안 미군 점령하의 이라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이라크에서는 미국 주도의 ‘재건’ 사업이 진행 중이다. 미국과 연합군은 6월30일 이라크 과도정부에 주권을 이양함으로써 이라크 점령이 끝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미국의 구상대로 미군의 이라크 점령은 6월30일 뒤면 끝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국제 평화단체인 이라크 국제점령감시센터(Iraq Occupation Watch Center)는 세계 각국의 국회의원, 언론인, 학자, 시민운동가 등 15명으로 구성된 이라크 점령실태 국제조사단(INTERNATIONAL FACT-FINDING MISSION ON THE IRAQ POLITICAL PROCESS)을 이라크에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이 국제조사단에 한국에서는 인권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인 박원순 변호사(아름다운 재단 상임이사)와 평화운동가 임영신(이라크 평화네트워크 준비위원)씨가 참가할 예정이었다. 국제조사단은 1주일 동안 이라크를 방문해 미국의 점령통치와 민정이양 과정의 실태와 문제점 등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할 계획이다.

하지만 현지 치안상황 악화로 이라크 점령실태 국제조사단 활동이 4월5일 저녁 무기 연기되고 말았다. 애초 박원순 변호사와 임영신씨는 4월6일 오후 출국 기자회견을 하고 4월7일 이라크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이라크파병반대 비상국민행동 관계자는 “최근 수니파뿐만 아니라 시아파까지 미군과 충돌하는 등 이라크 내부가 너무 유동적이다. 당분간 이런 상황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는 애초 기대했던 조사활동이 이루어지기 힘들고 조사단의 안전 보장도 불투명하다”고 국제조사단 파견 연기 배경을 설명했다.

국제조사단은 당분간 이라크 상황을 지켜보면서 출발일을 다시 잡을 예정이다.

“민정이양 과정 검증할 기회였는데"

조사단에는 월든 벨로(필리핀 마닐라대학 사회학 교수), 제러미 코빈(영국 의회의원), 캐롤린 루커스(유럽 의회의원·영국), 짐 맥더모트(미 하원의원), 카예타나 드 주루에타(이탈리아 의회의원), 케리 네틀(오스트레일리아 의회의원), 에타 로잘스(필리핀 의회의원), 도리스 에르난데스(온두라스 의회의원), 필리스 베니스(미 중동정책 전문가), 윌리엄 로빈슨(미 캘리포니아 샌타바버라대학 교수·미 외국개입연구 전문가), 알레한드로 벤다나(니카라과 전 산디니스타 정부의 유엔대표) 등이 참가했다.

박원순 변호사는 “참가자들의 면면으로 볼 때 가장 공정하고 객관적인 이라크 보고서를 기대할 수 있었다”며 국제조사단 출발 연기를 아쉬워했다. 임영신씨는 지난해 이라크에서 인간방패 활동을 벌인 평화운동가이다. 임영신씨는 “미국이나 한국은 이라크 파병을 재건·평화라고 하지만 이라크 입장에서는 외국군의 점령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임씨는 국제조사단 출발이 늦어지면 다른 형식으로라도 이라크에서 점령군 감시 활동을 벌일 계획으로 알려졌다.

임영신씨는 “지난 1년 동안 5천명이 넘는 이라크인들이 불법 구금되거나 실종됐는데 이들의 행방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라크 현지에서 점령군 감시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씨의 지적처럼 국제사회는 미국인의 사망 소식에 주목할 뿐, 전쟁 이후 미군 점령하에서 숨지거나 다친 이라크 민간인들한테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미군정 1년 동안 이라크 민간인들이 겪은 일들은 충격적이다.

2월23일치 기사에 따르면, 이라크 사람 한명의 목숨값은 308만200원이다. 지난해 8월 이라크인 안와르 카둠과 그의 남편, 4명의 자녀들은 차량에 탄 채 표지판이 없는 미군 검문소를 지나가고 있었다. 미군들은 경고 없이 사격을 시작했다. 28발의 총알이 차를 벌집으로 만들었고, 안와르의 20살 난 아들과 18살 난 딸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남편과 8살 난 딸은 몇 시간 뒤 병원에서 사망했다. 미군은 ‘위로금’으로 안와르에게 1만1천달러를 줬다. 위로금은 미 점령군이 후세인 대통령 시절 집권층의 재산을 압수해서 미군 지휘관이 임의로 만든 기금에서 지출한다.

미군은 지난해 말 ‘전후 미군에 의한 이라크 민간인 사망보고서’를 펴낸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트워치(HRW)에 “이라크 민간인 사망에 대한 통계자료를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정확한 수치를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휴먼라이트워치는 “미군의 이런 태도는 이라크 민간인 사망이 미군에게는 대단한 관심거리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휴먼라이트워치는 보고서에서 지난해 5월부터 9월까지 미군이 정당성이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모두 94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미군은 지난해 10월까지 불법적인 민간인 살상 혐의가 있는 다섯건만 인정했다.

휴먼라이트워치는 민간인 사망과 관련된 핵심 문제는 미군 병사와 지휘관의 책임감 부족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임시행정처(CPA) 규정 제17호에 따르면 이라크 법정은 연합군 병사를 기소할 수 없다. 또 과잉 진압과 불법 살상 혐의를 조사하고 국내 군사법과 국제인권법을 위반한 병사나 지휘관의 신병을 책임지는 권한이 연합국에 동참한 파병국가에 있다.

‘재건’과 ‘점령’의 간극은 넓고 깊다

휴먼라이트워치는 사실상 이라크 내 미군 병사들은 면죄부를 지닌 채 임무 수행을 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병사들은 의심이 들면 별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 단체는 보고서에서 “미군이 과도하고 무차별적이며 무모한 살상무기 사용을 억제하는 대책은 미군이 책임을 추궁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주지하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미국이 이야기하는 이라크 ‘재건’과 이라크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점령’의 간극은 넓고 깊다. 한국은 주둔 지역을 둘러싼 혼선에도 불구하고 6월까지 ‘평화재건 부대’를 이라크에 추가 파병할 계획이다. 하지만 현재 이라크에서 미군은 믿었던 시아파마저 등을 돌리는 고립무원의 상황에 빠졌다. 이라크는 ‘평화재건’이란 파병부대의 이름이 무색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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